[불광초대석] 생사 초월하려던 소년 붓끝으로 법사리 새기다

2020-05-29     최호승

벌써 세 번째다. 아버지의 감시망, 아니 애끓은 부정은 촘촘했다. 사찰과 떨어진 토굴에서 정진했지만, 아버지는 어김없이 소년을 찾아왔다.
소년은 학창 시절 불교학생회에서 불연 맺고, 경전과 게송을 세필(細筆, 글씨를 잘게 씀)로 옮겨 적으면서 불교 서적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고교 시절 선문답에 취해 생사를 초월하는 선승이 되고자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건만….
‘아, 이번 생에 출가 인연은 여기까지일까.’
소년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꼼짝없이 산 아래집으로 내려왔다. 출가수행자로 거듭나는 계를 받기 3일 전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소년에게 불연의 씨앗을 심은 게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향교 책임자였던 아버지는 소년에게 붓 잡는 법부터 해서 서예를 가르쳤다. 한글을 붓글씨로 배운 소년은 경전, 게송을 쓰기도 했다.
불교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고 출가를 발심했던 그때 그 소년을 찾았다.

| 700년 전 전통 잇는 그때 그 소년

선승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부처님 제자의 길을 걷고 있다. 경전을 옮겨 쓰며 부처님 가르침을 실어 나른다. 조계종과 당대 최고 명필 여초 김응현 선생(1927~2007. 동방연서회장)이 1997년 공동주최한 제1회 불교사경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아예 전업했다. 온통 사경 외길이던 과거는 중략. 그리고 700년 전 황금기를 맞았던 한국전통 사경을 잇는 장인이 됐다. 문화재청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한 ‘사경장(寫經匠)’ 제1호로 인정받았다. 김경호(57) 한국전통사경연구원장이다.

사경장 김경호는 사경하다 빠진 어금니 대신 인공치아 임플란트를 끼웠다. 하지만 “사경은 내 운명”이라고 말하며 웃는 그의 미소는 진짜였다.

“사경을 오래 연구해왔어요. 한국전통과 예술의 세계화를 위해 진력해온 노력을 국가가 인정해서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기독교 성서 사경, 코란 사경과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에요. 고려 시대 사경이 중국을 넘어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그런 전통을 계승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도 생겼어요.”

그가 말하는 한국전통 사경의 역사는 깊다. 사경은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 시대(918~1392)에 만개했다. 국가 발전과 개인의 복을 기원하며 공덕을 쌓는 의미가 커졌다. 『고려사(高麗史)』 등에 따르면 국가에서 사경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기관을 운영했고, 사경은 국가 최고의 역량을 동원한 당대 문화의 집약물이었다.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국보 제235호)’ 등 금자(金字)·은자(銀字) 형식의 사경이 많이 제작됐고, 충렬왕 때에는 중국에 수백 명의 ‘사경승(寫經僧)’을 파견하는 등 고려 사경의 우수성이 널리 퍼졌다. 이보다 앞선 통일신라 시대(745~755년)에 제작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국보 제196호)’이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경 유물이다. 그야말로 ‘사경 전성시대’였다.

그는 오랜 기간 문헌과 유물에서 사경의 재료, 형식, 내용을 연구해 신심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고, 장인 정신과 기술로 승화시켰다. 사경 연구와 계승, 세계화에 기꺼이 반평생을 바치고 나서야 가능했다.

2002년 처음으로 사경 개인전을 계기로 한국사경연구회를 창립, 초대 회장으로서 고려 전통사경 원형 복원과 보급에 앞장섰다. 불러만 주면 해외도 자비 털어 나갔다. 미국 LA 카운티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사경 특강과 전시, 제작을 시연했다. 사경 시연 영상은 수만 뷰를 기록할 정도로 높은 관심을 받았다. 반면 국내는 온도 차가 확연했다. 전통사경 보급을 위해 여러 차례 출간한 도서는 ‘비인기’ 종목이었다. 사경반과 복장 사경 등 불교계 내에 적지 않은 사경 인구가 있지만, 그는 고독했다. 위안이라면 국가무형문화재 지정과 구례 화엄사에서 전통사경원을 개원해 본격적인 전통사경 보급에나선다는 점이다.

| 붓끝 0.1mm로 쓰는 신심 ‘끝판왕’

사경장 김경호는 뛰어난 진리인 부처님 가르침을 옮겨 적으면서 글자 한 획 어긋나는 일도 경계한다. 법신사리를 모시는 경건한 불사에 몸과 마음가짐은 더 중요하다. 그는 세 가지 청정함[三淸淨]을 갖추고 세 가지가 없는 상태[三無]에서 사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몸의 청정, 마음의 청정 그리고 재료와 도구의 청정. 탐진치 삼독심은 없어야 한다. 일찍이 구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 스님도 그랬다. 스님이 755년 쓴 ‘신라화엄경사경조성기(新羅華嚴經寫經造成記)’에 당시 사경하는 이들의 태도가 그대로 기록돼 있다.

“닥나무 뿌리에 향수를 뿌려 생장(生長)시키며 다 자란 후에는 닥 껍질을 벗기는 자, 연마하는 자, 종이를 만드는 자, 사경하는 자, 표지와 변상도를 그리는 자, 표구하는 자, 심부름하는 자 모두 보살계를 받아야 하며 음식은 청결히 가려 먹어야 한다. 위의 사람들이 대소변을 보거나 누워 자거나 음식을 먹었을 때는 향수로 목욕한 뒤에야 사경하는 곳에 나아간다.”

사경은 단순히 부처님 가르침을 옮겨다 적는 행위가 아니다. 그는 문화재, 신앙, 수행적인 요소를 모두 갖춘 기도이자 예술, 전통의 총체라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사경은 필사, 변상도(變相圖, 불경 내용이나 뜻을 알기 쉽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 제작, 표지장엄(불보살·꽃·풀 등으로 장식하는 것) 등 크게 세 단계로 구성된다. 세부적으로는 금가루 발색, 아교 만들기, 종이의 표면 처리와 마름질, 잇기, 선 긋기, 경필사, 변상도 그리기, 표지 그리기, 금니 표면 처리 등 10여 가지 과정을 거친다.

여기에는 서예·한문·불교 교리·회화 등 숙련된 기능은 물론 오탈자가 없어야 하기에 고도의 집중력과 오랜 제작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한자[一字]에 한 부처님[一佛]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해서 불자들이 초집중[三昧]하는 수행이기도 했다. 마음 살짝 흐트러지면 크기가 1mm 내외인글자도, 부처님 가르침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사경은 재료와 형태에 따라 종류도 여러 가지다. 먹으로 쓰면 묵서경(墨書經), 금으로 쓰면 금자경(金字經), 은으로 쓰면 은자경(銀字經)이다. 피로 쓴 혈사경(血寫經)도 있었다. ‘예술의 극치’이자‘신심의 극치’이자 ‘끝판왕’이라고도 일컬어도 부족함이 없다.

“사경은 음양오행 등 동양 사상이 깃든 서예, 즉 글씨가 기본 바탕이에요. 붓 하나 굴리고 꺾는데 오행의 이치를 담는데, 붓끝으로 나오는 동양정신의 예술인 셈이죠.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글자를 그대로 옮기는 행위, 글씨의 균형감과 조화는 중도와도 닮았어요. 여기에 불상 안에 넣는 복장사경을 포함하면 지극한 신심까지 더해지는 거죠. 붓끝 0.1mm에 이 모든 정신을 집약해서 ‘옮겨 새기는’ 겁니다.”

 

| “어금니 빠져도 괜찮아, 행복하니까”

사경장 김경호의 진짜 어금니는 진즉에 다 빠졌다. 앞니도 그렇다. 사경 전시회 하나를 준비할 때마다 뿌리까지 녹았단다. 한때 숱한 밤샘으로 두 달 만에 몸무게 12kg 빠지기도 했다. 글씨는 물론이고 부처님 상호를 그려 넣을 땐 0.1mm 붓끝에 자신과 온 우주의 정신을 쏟아붓는다. 눈 한번 깜빡여도 어긋나서다. 금자경 작업은 온도 최소 35°C 전후, 습도 70% 이상의 환경을 갖춰야 하는데, 그냥 사우나다. 집중할 때 이를 무는 습관이 있으니, 이가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는 빠진 이가 애석하거나 아깝지 않단다. “그래도 작품 하나 남잖아요”라며 배시시 웃는다.

어지간한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내겠다고 엄살(?)을 부렸다. 사경장 김경호는 오히려 “쉽다”고 단언했다. “잘 써야지” 하는 마음만 내려놓으란다. 그렇게 비우면 고요함이 저절로 채워진단다. 그래도 보통 사람에게는 힘겨워 보이는 사경. 대체 왜 그렇게 사경에 매달렸을까.

“숙연이에요. 비록 이생에 출가 인연은 여물지 못했지만, 고려 시대엔 사경승이지 않았을까요(웃음)?”

출가 발심했던 그때 그 소년의 마음은 이미 출가한 듯 보였다. 질문이 말을 잃었다. 소년처럼 환한 그의 웃음 하나 메모했다.

 

 

글.
최호승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