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은 죽을힘을 다해 피어난다

테마 에세이 - 살며 사랑하며 1

2020-05-29     조용호

산수유가 피었다가 지는 중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그 노란 별꽃 무리를 연전에는 그녀와 함께 보았다. 화사한 봄빛 속에서 산수유 가지를 젖히며 그녀는 웃으려고 애쓰며 걸었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느꼈을 뿐인데, 그날 사진과 동영상을 다시 들춰보니 그녀는 태생이 별꽃처럼 맑은 사람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도 아픈 사람 같지 않던, 아니 정확하게는 전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녀는 그해 가을 빼빼 마른 채 가벼운 작별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올봄도 산수유는 어김없이 피었다가 지고 목련이 뒤를 잇더니, 벚꽃이 만개하고 진달래 철쭉이 시야를 어지럽히는 중이다. 꽃은 다시 피는데, 사람만 보이지 않는다. 떠나간 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윤회를 받아들인다면 더이상 말할 것도 없지만, 사바세계 어리석은 중생의 시각으로 본다면 대기의 물질로 사라지는 것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어서 허무 그 자체이기도 하다. 어디에서 그리움을 삭힐까.

매년 봄이 시작될 무렵이면 꽃을 찾아 남하하곤 했다. 올해는 아직 차가운 1월, 그동안 벼르기만 하던 수선화를 영접하기 위해 제주로 내려갔다. 한림공원 수선화밭에서 청초하게 바람에 하늘거리는 그녀들을 만났다. 흰 꽃잎 위에 노란 병아리 부리 같은 꽃이 가운데 피어나는 모양, 멀리서 보면 흰 나비들이 춤추는 것 같다. 수선화 곁에는 이미 매화도 피어나고 있었다. 수선화는 한겨울부터 피지만 매화도 이른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이다. 황량한 겨울에 이 꽃들이 벌들을 유혹하는 수단은 특유의 향이다. 수선화 향은 진하지만 서늘하고 맑다. 매화 역시 진하긴 마찬가지지만 향이 알싸하다. 밤이면 암향은 더 멀리 퍼져나간다. 황량한 대지에 먼저 피어나는 꽃들은 저마다 무기가 있다.

복수초의 생존 셈법도 만만치 않다. 복수초는 철저한 향일성(向日性)이다. 날이 흐리면 잎을 닫아버리고 해가 날 때 낯을 보인다. 아직 봄이 오기도 전에 쌓인 눈을 제 몸의 열기로 녹이며 기어이 뚫고 나오는 것도, 햇빛 때문이다. 복수초처럼 키가 작은 야생화들은 봄이 와서 주변에 키 큰 풀들이 자라나면 금방 묻혀버려 햇빛을 차지할 기회가 사라진다. 미리 피어나 부지런히 열매를 맺은 뒤 키 큰 경쟁자들이 등장하면 조용히 퇴장하는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노랑앉은부채, 너도바람꽃, 변산바람꽃 같은 야생화도 복수초와 운명을 함께 한다.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들이 어디 저들뿐이랴. 만개하여 비처럼 꽃잎을 뿌리는 벚꽃도, 출렁이는 목련도, 산천을 연분홍으로 물들이는 진달래도, 아주 붉게 얼굴을 내미는 철쭉도, 빛깔과 자태는 모두 황갈색 대지에서 벌 나비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치열한 생존 전략의 결과물이다. 보기에는 그저 아름다울 뿐이지만 저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매년 봄이면 만나는 저 엄청난 생명의 에너지들, 역동적인 오케스트라 연주, 생명을 격려하고 함께 밀어 올리고 부축하는 그 힘으로 한 해를 힘겹게 시작하곤 했다. 올봄은 유난히 독한 바이러스가 날아다니면서 그 생명력을 억압하는 듯 보이지만 저들의 피어남을, 저 웅장한 연주를, 약동을 손톱만치도 방해하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바이러스조차 저 살겠다고 인간 세포에 침투해 들러붙어 악착같이 증식하는 것인데, 하물며 인간이 속수무책 무기력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해남 미황사에서 만난 금강 스님은 ‘꽃들이 죽을힘을 다해 피어난다’고 했다. 그녀가 남기고 간 바람구멍을 스님의 말씀으로 채운다.

“물은 흘러가는 겁니다. 그 물이 흘러오면서 노루와 입을 맞추기도 했을테고, 꽃밭 사이를 내려오기도 했을 겁니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물은 계속 흐르고 흘러갑니다. 이 물이 다시 어느 풍경을 만나고 어떤 구비를 돌아갈지는 모릅니다. 새 풍경 속으로 물은 흘러갈 뿐입니다.”

 

 

조용호
1961년 전북 정읍군 좌두에서 출생. 서울대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소설을 쓰며 오랫동안 문학전문기자로 살고 있다. 저서로 장편소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산문집 『여기가 끝이라면』, 『꽃에게 길을 묻다』,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이 있다. 무영문학상과 통영문학상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