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몰아쳐도 조이면 OK! 내 삶의 단단한 안전벨트

2020-05-28     일광 스님

배가 방향을 바꿀 때 도는 각도를 터닝서클이라고 한다. 무언가 인생의 돌파구를 찾고는 있었지만, 쉽사리 출가할 마음이 나지가 않았다. 세속적인 애착이나 집착이 있었다기보다 어릴 적 인연과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스님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출가에 간절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부처님과 인연이 몸과 마음처럼 너무 가까이 있으니 소중한 줄도 모르고 애써 찾으려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 집 떠나는 즐거움

“절에 가면 부처님께 이쁘게 절하고 스님께도 요렇게 인사드려야 한다.”

비녀 꽂은 머리 위로 양손을 쓸어 올리며 할머니는 손녀에게 고두례 절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할머니가 법당에서 기도하고 있으면 나는 탑전에서 혼자 놀곤 했는데, 어떤 보살이 다가와 “너는 부처님 제자가 되면 좋겠구나”라며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할머니가 다가와 그것이 무슨 뜻인가 물었는데, “아이가 명(命)이 짧은 듯하니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집에 돌아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부모님께 일러바치듯 말했다.

“나는 절에서 살아야 한대요!”

다섯 살 난 자식이 단명한다는 말보다 절박한 소리가 있겠는가? 다음날 부모님은 절에 올라가 상의했고 스님은 내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 문종이에 싸서 부처님께 올리는 의식을 하며 기도해 주셨다. ‘너는 오늘부터 내 유발상좌니라.’ 다섯 살이던 나에게 스님의 목소리는 어떤 선언(宣言)처럼 들렸는데 부처님 가문에 들어와 보호를 받는 것처럼 느껴져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스님의 유발(有髮)상좌가 되었고, 초등학교 내내 방학이면 어김없이 절에 가 천수경과 약찬게를 외웠고 예불을 올리다가 개학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절에 가는 것은 외갓집 가는 일보다 더 자연스러웠고, 부모님도 당연하게 여기셨다.

은사스님은 어린 상좌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줄곧 설 명절이 되면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셨다. 그리고 시장에 데리고 가 설빔으로 스웨터나 점퍼를 골라 주셨다. 어린 마음에 꽃 색깔 옷을 입고 싶어 걸려있는 방향을 마냥 바라봤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은사스님은 어린 상좌에게 회색 무늬 옷을 척 골라 입히고는 ‘참 곱다’며 좋아하셨다. 아쉽고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스님이 사 주신 옷’이라며 얼마나 자랑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은사스님은 내가 출가할 때까지 ‘너 출가하거라’라는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시절인연에 맡기고 스스로 발심(發心)하기를 기다려주신 듯하다. 재촉하지 아니하고 유발상좌의 선택을 존중하고 기다려주신 스님이 30년이 된 지금에도 참 감사하고 그립다.

 

| 하얀 드레스 아닌 회색 장삼 휘날리며

출가의 간절함은 뒤늦게 발견했다. 신심 깊었던 고모의 권유로 1년여 동안 『금강경』과 『선가귀감』 독송 기도를 하게 됐는데….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서 벗어나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다.”

『선가귀감』의 이 구절에서 눈이 번쩍 뜨이고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 몸 받았으니 내가 누군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깊이 궁구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파도처럼 끝없이 일어났다.

‘그래, 시집 장가가는 것은 뭇 중생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출가해서 마음 밝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주인공을 찾고 주인으로 살아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결정적 순간은 며칠 후 가게 된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 자신을 향한 문답이 화두처럼 뇌리에 꽂혔다. ‘하루 동안의 화려함을 취(取)한 웨딩드레스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 나는 일생 청복(淸福)을 누릴 수 있는 가사 장삼을 수(垂)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 인생을 내 책임 아래 두고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나 스스로가 자유자재 주인인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확고한 생각이 들었다. 그길로 돌아와 부모님께 출가하겠다고 선언했고, 아버지는 딸을 택시에 태웠다. 출가하는 길에 동행한 아버지는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나도 네 나이라면 출가해서 부처님 공부를 해보고 싶다. 아버지는 네가 부럽다. 성불의 길에 입문했으니 망상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보아라.”

 

| 도량석, 마을의 아침 여는 시그널

마조도일(馬祖道一) 스님이 도를 이루어 고향으로 돌아올 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노파가 ‘큰스님이 오신다고 하더니 겨우 마씨네 꼬마 녀석이 아닌가?’라는 소리를 듣고 마조 스님은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에 가지 마오. 고향에서는 도를 이룰 수 없네. 개울가의 노파는 아직도 내 옛 이름을 부르고 있네”라고 했다.

나 역시 승가대학(강원)과 동국대를 졸업하고 선방을 다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것인가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자라고 성장한, 나를 키워 준 고향사람들 속에서 회향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고향을 등지지 말고 그들 속에서 부처님 법을 실천하며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새벽 도량석 목탁소리는 마을 사람들의 아침을 열어주는 시그널이기도 하다. 목탁소리를 신호로 밭으로 들로 나간다. 그해 처음으로 수확한 사과를 한 광주리 따 와서는 목탁소리 듣고 자란 사과라며 부처님께 올려 달라는 염보살, 수술실 들어가기 전 스님 음성 듣고 싶다며 전화하는 아랫마을 보살, 취업면접 보러 가는 길에 스님이 끼워주는 단주를 지니면 안심이 될 것 같다는 채영이…. 그들에게 건네는 스님의 위로와 메시지는 진언과도 같은 힘이 되는 것 같다. 때때로 나태해지고 싶을 때 그들은 나를 지켜주는 호법신장이고 게으른 내 어깨를 후려치는 장군죽비다.

 

| 봄바람처럼 설레며 행복 나누다

숭고하고 엄격하여 다가서기조차 어려운 자리가 스님의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극히 인간적이며 언제든지 따뜻한 마음을 열어주는 스님, 세상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 이 시대 불교의 역할이고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만 잘 먹고 잘살면 무슨 소용인가. 내 주위의 사람도 잘살도록 도와야 그게 행복인 거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들에게 더불어 행복하자고 늘 이야기한다.

복지관 소임을 맡은 지 10년 세월이 흘렀다. 복지관 어르신들 가운데 중·고교 시절 은사도 계시고 아버지의 친구들도 계신다. 한 다리만 건너면 인드라망처럼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분들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한 바퀴를 돌아 지금은 내가 회향할 차례다. 가만히 있어도 절에 찾아오는 불자뿐만 아니라, 복지 현장에서 어르신들과 장애인들을 보살피고 한솥밥을 먹고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일들 이곳 역시 수행도량이고 용맹정진의 장(場)이다. 나의 스승이고 선지식이 되어 주는 그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사는 일들. 어느 것 하나 소홀하고 가벼울 수 있으랴.

활발발한 삶의 현장에서 터득하는 통찰과 지혜로 내 살림살이도 대나무의 마디처럼 굳건해진다. 스님으로 살아가는 길 위에 훈풍만 불고 꽃길만이 펼쳐져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때로는 돌풍이 휘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번뜩일 때도 있다. 하지만 굳건한 신심과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라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이면 그 어떤 태풍이 오더라도 지나가면 그만이다. 출가의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어떤 마음을 나눌까? 봄바람처럼 설렌다.

 

 

일광 스님
1992년 혜선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97년 통도사에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동학사승가대학과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토론토 불광사에 2년여 머물며 해외포교를 했다.
2008년부터 노인·여성·장애인복지시설 ‘거창군삶의쉼터’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2014년부터 현재까지 관장을 맡고 있으며 거창 죽림정사 주지로 재임 중이다.
저서로는 『아루나찰라를 걷다(2013)』와 『스님의 남자친구(201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