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찍을 때까진 쉼표,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

특집 ▶ 그대가 주인공입니다 ▶ 시작의 또 다른 이름

2020-05-28     안경자

잠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결혼했고, 두 아이를 낳았고, 집을 장만했고,

● 서른아홉에 브라질 이민 후 장사를 하며 주말학교 교장이 됐고, 의류 제품 사업을 시작했고, 골프를 시작했고,

● 할머니가 됐고, 국제학교 교사가 됐고, 혈압약을 먹기 시작했고,

● 인스타그램(@drawings_for_my_grandchildren)을 시작했고, 사표를 냈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인스타그램 전시회를 열었고,

● 귀국했고, 언론 인터뷰에 응하기 시작했고, 책을 냈고, 강연을 시작했고,

●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고, 부천시민 기자가 되었고, 유튜브(Dear Grandchildren)에 올릴 동화를 쓰기 시작했고, 웨비상(Webby Awards; 웹사이트, 쌍방향 광고, 온라인 필름과 비디오, 모바일을 포함한 우수 인터넷 사이트에 수여하는 국제적인 상)을 수상했고,

● 틱톡(@grandpachan)을 시작했고,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지난 생애를 돌아봤는데 그 어느 지점에도 마침표는 찍히지 않았지요? 오히려 새로 시작한 일이 더 많습니다. 생각해보면 아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은 흐르고 흐르는 것이니까요.

 

| 퇴장의 미학

몇 년 전 저는 브라질 상파울루 국제학교에서 한국 학생을 대상으로 문학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단편소설이나 시를 가르치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긴장되는 일이었습니다. 수업을 듣는 학생보다 선생인 제가 먼저 문학 작품에 몰입하고 감동해서 목소리 떨림을 조절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학의 아름다움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저는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터넷 세계를 유영하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미 읽은 작품도 수업 때 짚고 넘어갈 부분을 표시해가며 여러 번 다시 읽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던질 질문도 머릿속에 잘 정리해 두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존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등 사실주의 문학을 읽게 했습니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날씨는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당시의 물가는 어떠했는지, 주인공이 무엇을 먹었는지, 인물의 행동반경이 얼마큼 자세하게 나타나 있는지 학생 스스로 알아보게 했습니다. 소설 속 등장하는, 가진 게 많지 않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고단한 하루와 소박한 꿈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문학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설 속 지명 하나가 입에서 나오질 않았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고향이면서 작품의 배경으로도 많이 등장하는, 아주 유명한 지명이었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등에서 진땀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그 단어를 슬쩍 빼놓고 계속 소설 속 장면을 그려나갔습니다. 3분 정도 지났을까요? 절 괴롭혔던 문제의 지명이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떠올랐습니다. 이후 수업은 매끄럽게 진행됐습니다. 문제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진땀 흘렸던 그 일이 이후 또 발생하고 또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전 알았습니다. ‘아, 그래. 인제 그만 쉬라는 뜻이야.’

그로부터 3년 후 2017년 6월, 사표를 냈습니다. 마침 제 일을 맡아줄 좋은 후임이 있어서 마음이 덜 무거웠습니다. 은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슬퍼하거나 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영롱하던 내 기억력이 이토록 겸손하게 퇴장하는구나! 이때까지 수고했다’라고 선생 역할을 했던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고할 뿐이었습니다. 그간 문학 수업을 하며 학생들과 쌓은 행복한 추억과 고마운 시간을 떠올렸습니다. 그동안 저를 즐겁게 만들어준 문학 수업 자료 하나하나를 파워포인트로 정리했습니다. 사표를 낸 후 저는 머지않아 제 글을 쓰게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퇴사 후 제가 인생 제3막을 열고,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만든 원동력이 됐습니다.

 

|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인연이 인연을 낳고 그 인연이 또 다른 인연을 낳아서 지금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습니다. 남편이 그린 그림에 더할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입니다. 1963년, 대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남편은 제가 쓴 시에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동갑 내외인 남편과 저는 지금도 여전히 같은 모습입니다. 새삼 ‘아, 놀라운 인연이구나’ 하고 중얼거리게 됩니다.

놀라운 인연 하나 더. 브라질에 이민 갈 때 여섯 살이던 딸이 두 아이 엄마가 되었을 때 남편과 저는 두 손자가 저희 내외의 온전한 행복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네가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손주에 대한 그리움과 허전함에 빠질 즈음 뉴욕에 있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림 그릴 것을 권했습니다. 인생 제3막 주인공이 될 인연의 시작입니다.

아들 청에 못 이겨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글과 그림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어느 때쯤 가니 댓글 분위기가 ‘그림도 좋지만, 글도 좋아요. 울었어요’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글도 아버지가 쓰길 바랐던 아들, 결국은 엄마의 글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오! 아들의 인정을 받다니!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는 길지 않아야 합니다. 아들이 영어로, 딸이 포르투갈어로 번역해 한국어까지 총 세 개 언어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글을 고치고 또 고치고 수없이 다듬은 후 이제 괜찮다 싶으면 그림과 함께 메신저로 보내 아들딸의 반응을 기다립니다. 제 글의 첫 독자인 아들딸에게 제가 쓴 첫 이야기가 잘 전달됐는지 궁금해집니다.

작가라는 꿈을 구체적으로 꾸기 시작한 것은 이민 직전인 70년대 말. 두 아이 재워놓고 공책이나 200자 원고지에 써놓았던 단편소설과 희곡작품이 지금도 ‘컴퓨터 님, 제게 디지털의 기운을 맛보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듯 서랍 속에서 발견됩니다.

오랫동안 문학소녀 퇴물(?)로 지낸 이민의 세월, 가게에서 옷을 팔면서도 한국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뭔가 표현하기 어려운 이민자만의 결핍 증세였습니다. 결핍은 결핍증으로 번져 일상생활을 조금씩 조금씩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두 손자의 열렬한 “하지, 하니(‘할아버지, 할머니’의 아기 말), 빨리 오세요”라는 메시지가 날아들고, 저희 내외는 자석처럼 이끌려 2017년 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 방탄소년단 얼굴을 구분할 때까지

이제 한국으로 돌아온 지 2년 반! 나의 나라에서 내 생각을 내 나라말로 말하는데 왜 저는 아직도 뭔가가 부족한 듯 깊은 잠을 자기가 어려운 걸까요? 아버지에게 그림을 권한 것도, 손주들을 위한 그림이 좋겠다고 한 것도, 또 그림에 어울릴 이야기를 쓰라고 권한 것도 아들입니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케이 팝 아이돌의 춤을 가르치던 손자 녀석들이 요즘은 제 엄마와 결탁을 하고는 ‘이것이 틱톡. 틱톡을 하자!’ 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저를 키우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유튜브, 그리고 틱톡까지 하는 저는 외로울 짬도 답답할 새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 좋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끊임없이 주위에 관심을 기울이고, TV와 유튜브를 봐야 합니다. 왜 요즘 아카시아가 보이지 않는지, 왜 하얀 달걀은 없어졌는지 알아봐야 하고, 살구꽃이 벚꽃보다 먼저 핀다는 사실을 산책길에서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과 의견 나누는 어떤 순간에는 ‘이거 어때?’라며 권하는 제 의견이 빛을 발하기도 합니다.

이제 제 삶을 끌어주는 것은 제가 아니라 자식들과 손주들인 것을 인정하며, 그 애들과의 소통을 위해 오늘도 저는 방탄소년단 일곱 남자애 이름과 얼굴을 구분해보려고 애씁니다.

“정국인지 뷔인지 모르겠어. 쟤가 슈가니? 진이니? 뭐? 지민이라고? 남준이란 이름보다 랩몬(RM)이 멋있다, 제이홉은 춤 잘 추는 친구 맞지?”

 

 

안경자
1942년 서울 출생.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다,
1981년 브라질 이민 후 상파울루 한국학교 교장, 국제학교 한국문학 교사를 역임했다.
한국으로 돌아간 두 외손주를 그리워하며 인스타그램에 올린 안경자·이찬재 부부의 글과 그림이
인기를 끌면서 지금까지 SNS 인플루언서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영주 귀국 후 2019년 도서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