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서 적멸로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 조각가 김인경

2007-09-16     관리자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조각가 김인경(조선대학교 조소과,44세) 교수가 광주 시내에서 이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올해로 3년째가 된다. 청와헌(靑蛙軒)이라는 당호가 씌여진 집 커다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치 목공소 같은 그의 작업장이 보인다.
그리고 그 작업장을 지나 철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거실 겸 주방으로 꾸며진 공간이 나오고, 그 옆으로 나있는 방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김인경 교수의 인상만큼이나 단아한 방에 이희익노사의 사진과 청와 큰스님의 사진이 인상깊게 놓여져 있다.
아래층에는 함께 조각의 길을 가고 있는 부인의 작업실이 있다. 살고 있던 아파트 전세값이 부담스러워 아예 이런 촌구석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참 잘했다는 생각을 두고두고 하고 있다. 처음엔 주위를 둘러싼 대나무숲 바람소리와, 쑥쑥 죽순 자라 오르는 소리에 밤잠을 설친적도 있다고 한다.
기자가 찾은 그 날은 초여름 바람에 부딪치는 대나무잎 소리와 앞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6월의 신록만큼이나 싱그러웠다. 창문을 열어놓고 앉아보니 일어나기가 싫어졌다. 공부하기에 좋은 방이다. 지난해와 지지난 해 여름에는 이곳에서 선도회(禪道會,宗達 이희익 노사께서 생전에 이끄셨던 참선모임으로 지금은 그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공부를 하고 있다)수련회를 3박 4일씩 가졌다.
선도회 광주 모임을 이끌고 있는 김인경 교수가 스승 종달노사를 만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그러나 마음먹고 선공부를 시작한 것은 1990년 노사가 열반에 드시기 5년 전쯤이 된다.
그 이전 그러니까 대학 3학년 때 고등학교 1년 선배와 함께 여행을 하며 들은 <육조단경>에 마음의 충격을 받아 불교 수행에 매료되긴 했으나 절에 가고 스님을 만나는 것이 무섭고 두려웠다. 그러나 막연하나마 동경은 있었다. 그러다가 1983년 지금은 미국에 가있는 친구를 따라 조계사에 가게 되었다. 대웅전에서 절하는 모습이 너무나 간절해 보인다며 그 친구는 참선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인도한 것이 당시 화곡동에 있었던 종달 노사의 선방이었다.
1미터 50센티미터쯤이나 될까. 작은 키였으나 안광이 시퍼런 종달노사가 어찌나 무서워 모였던지 몇 번인가 선방에 나가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 후로도 노사의 모습이 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꿈에 자주 나타났다. 그러다가 다시 노사를 뵙게 된 것이 그후 3년이 지난 뒤였다. 다시는 안 빠지겠다는 결심을 하고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다녔다. 광주에 내려온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매주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혹은 비행기 타고 광주에서 서울을 오가며 공부모임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종달노사께서는 80노구에도 제자를 제접하시는 기용을 발휘하셨습니다. 방법이 특유하고, 밀고 당기기를 잘 하셨어요. 앉아 있는 것만 보시고도 공부의 정도를 아셨어요. 돌아가실 때에도 부고문을 돌릴 곳 몇 곳만을 적어놓으시고 조등도 못 달게 하셨지요. 노사를 만났다는 것은 제 인생에 있어 최대의 행운이었어요,"
스승께서는 공부한 만큼이라도 지도하라고 하셨다. 김인경 교수는 스승의 말씀을 따라 인연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공부한 대로 선공부를 시키고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시간이 많은 대학원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학교 연구실 의자를 밀치고 방석을 깔고 앉으면 그대로 그 곳이 선방이 된다. 지난 성도재일을 즈음해서는 1주일 전부터 세명의 도반들과 함께 한자리에 모여 용맹정진을 했다.
"참선방에 한 번 앉아보는 것도 좋은 인연이 돼요. 사실 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자리를 깔고 앉기까지가 어려워요. 수천 명중에 무문관에 들어와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10명도 안 돼요. 손을 잡아끌어도 들어오는 사람은 몇 안 되지요. 정(定)에 들어 일어나기 싫을 때까지는 오래 걸립니다. 그러나 주 1회 6개월 정도 후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선은 버릇을 들여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혼자 하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승이 있어야지요."
김인경 교수의 국민학교 학적부에는 늘 집중력이 떨어지고, 주위가 산만하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돌이켜 보건대 그의 젊은 시절은 방황의 연속이었고 황폐할대로 황폐해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인생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 것은 선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우선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부드러워지고, 기존에 있던 고정관념이 하나하난 깨지기 시작했다. 원래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 그 형태가 엷어지고, 감정에 쉽게 말려들지 않게 되었다. 삼라만상과 동질감이 느껴지면서 삶이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참선도 인생의 굴곡과 허망함이 있어야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교리 위주의 불교공부는 집 위에 또 집을 짓는 것이 돼요. 번뇌에 또 하나의 번뇌를 쌓는 격이 됩니다. 알면 알수록 환상만 더 해주는 경우가 많아요. 단 30분이라도 입을 다물고 앉아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공부가 되면 책을 보라시던 스승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수행불교가 되어야지요. 이것이 불교가 건강해지는 법입니다. 곳곳에 많은 시민선방이 세워졌으면 합니다."
수행을 하다보면 일체의 장애가 녹아나고, 또한 장애가 오더라도 그 장애가 크지 않다는 김인경 교수. 덕분에 높은 인생의 파도를 넘을 때에도 그 이전보다는 무난하게 넘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물과 사물이 서로 무관하게 떨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위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주위엔 모두가 맑고 선량하고 좋은 분들만 있다는 것도 그에게 복이라면 큰복이다.
그의 이러한 수행의 과정은 바로 조각작업으로 이어진다. 나무를 다듬고, 깎고, 밀고 할 때 시간 가는 것을 잊는다. 이런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자신을 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신정화가 잘 되어지는 것을 느낀다. 굳이 좌선의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작업 속에서도 정(定)에 든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그의 좌선은 곧 행선(行禪)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좌선을 할 때보다 훨씬 빨리 정에 몰입되는 경우다.
참선 이후의 작품 변화라고 한다면 우선은 복잡한 것이 단순해지고, 작품에 중심구조 체가 생겼다는 것이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으면서 정확한 대칭구조에서 중심부분에 핵심을 이루는 구조체를 이룬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들은 김인경교수가 "침착한 표현과 밀도를 추구하는 좋은 감각의 작가로 장식적인 요소들이 과감하게 버려지고, 정면돌파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듯 절제와 완벽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그의 최근 작품 가운데에는 아이스하키용 스틱같은 것이 50개쯤 놓여진 것이 있다. 사람들을 의인화한 이 작품은 얼핏 보기에는 같아 보여도 2개, 3개, 5개씩 같은 모습을 보이며 무리지어 있다. 모두 함께 놓여져도 되고 둘씩 셋씩, 혹은 하나씩 떼어놓아도 그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지며 공간 조형미를 형성하고 독자성을 갖고 있다. 그의 작품의 형태는 또 박스나 원반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보고 그것은 표현했다기보다 자신의 심상을 형상화한 듯 작품의 의미가 바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은 제목이 따로 붙여지지 않는다. 모두가 사일런스(Silence), 침묵이다. 말 많은 세상에 말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작업은 적멸(寂滅)이다. 공부가 깊어지고 자유스러워져 적멸의 바다를 마음대로 헤엄치게되면 그때는 그 적멸의 세계가 형상으로 보여질 것이다.

*김인경(金仁卿)
1953년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조소과와 동대학원 조각과를 졸업, 현재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로 있으며, 지금까지 네차례의 개인전과 수십차례의 단체전을 가졌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