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直指)로 만나는 선지식 -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승가난제 존자와 가야사다 존자

2020-04-29     범준 스님

|    #1 기이한 아이
오랫동안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코살라(Kośalā, 憍薩羅)의 수도 슈라바스티(Śrāvastī, 舍衛城)의 보장엄왕(寶莊嚴王)에게는 갓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아이는 세상에 나오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찬탄하는 말을 할 정도로 특별한 아이였다. 항상 고요한 곳을 찾아 명상하기를 즐기던 아이는 7살이 되어 자신의 의지를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이제 세상의 인연을 벗어나 출가수행을 소원하니 제 뜻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
보통 아이들과 달리 기이한 성장을 보이던 아들이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 보장엄왕과 어머니 분타리(芬陁利) 부인은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고자 하는 아들의 출가를 허락할 수 없었다. 벌써 수일째 음식을 거부하며 출가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아들을 위해 부모는 두 가지 특별한 조건을 제안하며 출가를 허락했다.

|    #2 출가의 조건
첫 번째, 왕궁을 떠나지 않고 왕궁에서 출가 수행자로 살아야 한다. 두 번째, 높은 수행력과 덕망을 갖춘 장로 선리다(禪利多) 비구를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 
출가의 해결책을 찾던 아이는 부모님의 조건을 받아들인 후 ‘승가난제(Saṃghanandi, 僧伽難提)’라는 법명을 받았다. 비록 출가 형식은 괴이했지만, 승가난제 존자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19년 동안 정진하여 게으른 적이 없었다. 그날도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정진을 마친 승가난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참다운 수행자의 마음가짐은 처음 출가하던 때와 조금도 어긋남 없이 오롯하여 수행과 정진에 게으르지 않았다. 아직도 육체의 몸은 왕궁에서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을 뵈면서 편안하게 살고 있으니 이것을 어찌 진정한 출가라 할 수 있겠는가? 수행의 향상과 소소한 번민이라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왕궁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
비록 출가는 했다 하나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깊은 명상에 잠겨 있던 승가난제는 하늘에서 한 줄기 광명이 비추며 곧게 뻗은 평탄한 길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승가난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수행처를 찾아 왕궁을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모두 잠든 시간이었다. 왕궁을 빠져나온 승가난제는 오랜 시간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커다란 바위 앞에 있는 석굴을 수행처 삼아 조용히 정진을 시작했다.

|    #3 선등(禪燈)을 부촉할 제자
왕궁을 떠나 수행한 10년 동안 승가난제는 스승인 라후라다(Rāhulata, 羅睺羅多) 존자에게 법을 부촉(불법 보호와 전파를 맡겨 부탁함) 받아 제17대 조사가 되었다. 이미 곳곳에서 수행과 교화를 펼치던 승가난제는 인도 북부의 강대국인 마가다(Magadha, 摩竭陀)에 이르렀다. 예나 지금이나 마가다국은 활기가 넘치고 문물이 번화한 나라였다. 함께 수행하던 대중들과 전법을 펼치던 승가난제는 어느 산의 봉우리 아랫마을에 이르렀다. 
거룩한 수행자를 찾기 위해 승가난제와 제자들은 오래도록 마을을 배회하며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어느 집에서 12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구리로 만든 둥근 거울[銅鏡]을 가지고 곧바로 승가난제 앞으로 오는 것이었다. 혹여 자신이 찾던 수행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당한 기개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는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나이가 몇 살쯤 되었느냐?” 아이가 대답하기를 “백 살입니다”라고 했다. 승가난제는 “나이가 아직 어려 보이는데, 어찌 백 살이라고 하는가?”라고 물었다. 아이는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제 나이는 분명히 백 살입니다”라고 했다.
다소 엉뚱한 아이의 대답을 신중하게 듣고 난 뒤 승가난제는 칭찬의 말을 건넸다. “너의 근기가 매우 뛰어나구나.” 아이는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듣기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100년을 살아도 부처님의 법기(法機)를 알지 못하는 것은, 단 하루를 살면서 불법의 근본을 분명히 아는 사람보다 못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한마디에 아이의 비범함을 알아챈 승가난제는 둥근 거울의 의미를 물었다. 아이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크고 둥근 거울과 같아서 안과 밖으로 티끌조차 숨기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의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둥근 거울과 같아 누구나 무엇이나 밝게 비춰주는 것이라는 아이의 설명은 승가난제를 망설이게 하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의 법을 계승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바른 법[正法]에 대한 견해를 갖춘 상태였다. 곧장 아이의 부모에게 출가를 허락받고 구족계와  ‘가야사다(伽耶舍多)’라는 법명을 내려주었다.

|    #4 무엇이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인가?
오후 정진을 마친 어느 날, 승가난제는 무심하게 전각 끝에 매달린 풍경 하나를 보았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 옆에 있던 가야사다에게 물었다.
“지금 바람이 부는 것인가? 풍경이 울리는 것인가?”
“바람이 부는 것도 풍경이 울리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저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일 뿐입니다.”
제자 가야사다의 대답은 스승 승가난제를 기쁘게 했다. 스승이 다시 물었다. 
“그렇구나. 바람도 풍경도 아니라면 너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이냐[風鈴鳴 心復誰乎]?”
제자는 스승의 다음 질문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일체 모든 것이 지극히 고요하니 어찌 삼매가 아니겠습니까[俱寂靜故 非三昧也]?”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삼매”라는 말에 스승은 매우 흡족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너는 진실한 수행자로 부처님들이 말씀하신 이치를 깨달아 참된 법의 요체를 잘 설명하고, 불법의 의미 또한 확연히 알고 있구나. 법을 이을 제자로 그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라고 하며 게송으로 법을 부촉했다.

마음의 근본은 본래 분별함이 없으나[心地本無生]
그 바탕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지[因地從緣起].
조건과 바탕이 서로 방해하지 않듯이[緣種不相妨]
꽃과 열매도 그와 같음이라[花果亦復爾].

<해설 >


바람과 풍경소리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여 여러 문헌에 등장하고 유래는 『육조단경』 인듯하다. 특히 승가난제 존자와 가야사다 존자의 문답은 『직지심경』보다 『조당집』, 『전등록』, 『오등회원』 등에서 자세히 전한다.
『육조단경』에 소개된 ‘바람과 깃발 이야기(풍번문답, 風幡問答)’는 대략 이러하다.
혜능선사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행자로 머물러 있던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서 당대 유명했던 인종(印宗, 627~713)법사의 『열반경』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마침 바람이 불어 법당 마당에 걸어 두었던 찰간의 깃발이 나부꼈다. 한 스님은 “바람이 부는 것이다”하고, 한 스님은 “찰간에 매달린 깃발이 나부낀다”라고 옥신각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혜능선사는 설왕설래하는 스님들에게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나부낀 것도 아닙니다. 스님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라고 한마디를 토해낸다. 
승가난제와 가야사다의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부분은 ‘바람과 풍경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다. 전각 끝에 매달린 풍경을 바라보던 스승의 질문에 제자는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라고 한다. 『육조단경』의 ‘풍번문답’에 등장하는 답변과 다르지 않다. ‘풍번문답’과 같은 형태로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가 끝이 나면 『직지심경(直指心經)』에서 승가난제와 가야사다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스승의 제일 중요한 의무는 제자의 인식세계를 전환하는 일이다. 제자가 스승을 만나기 전 교육, 경험, 정보 등으로 확립한 인식의 경계와 수준을 스승은 끊임없이 살피고 살핀다. 때로는 느릿하게 때로는 무심하게 제자의 대기(大機)가 작용하도록 기다린다. 그러다 제자의 근기(根機)가 수용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싶으면 스승은 여지없이 매섭고 날카로운 호랑이와 같은 견해[牛步虎視]로 인식의 한계를 깨뜨려 자유자재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그제야 제자는 완전히 독립적 존재, 오롯하게 고요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봄이 오고 초목이 푸르러지는 경지[兀然無事坐 春來草自靑]로 나아간다.
여기에서 승가난제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가야사다의 대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점검해야 할 때임을 알고 다시 질문한다. “바람도 풍경도 아니라면 너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제자는 이미 스승의 다음 질문을 예상했으며, 나아가 대상(바람, 풍경, 소리)을 인식하는 주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조금이라도 가늠하기 위해서는 “일체 모든 것이 지극히 고요하니 어찌 삼매가 아니겠습니까?”라는 문장을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직지(直指)』의 원문과 해석
은 대략 “모든 것이 고요하기 때문에 삼매가 아닙니다(俱寂靜故 非三昧也)”라고 되어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스승과 제자의 날카로운 칼날이 난무하는 전쟁터가 순식간에 칠흑같이 어두운 지하 5층에 10년간 버려진 자루 없는 칼이 되어버린다. 다음의 선종서를 참고하면 이해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 『조당집(祖堂集)』 952년 편찬
일체 모든 것이 고요하니 
어찌 삼매가 아니겠습니까[寂靜故 豈非三昧]?
2)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1004년 편찬
모든 것이 고요하기 때문입니다[俱寂靜故].
3) 『오등회원(五燈會元)』 1253년 편찬
일체 모두가 고요하기 때문입니다[俱寂靜故].
4) 『직지심경(直指心經)』 1372년 편찬
모든 것이 고요하기 때문에 
삼매가 아닙니다[俱寂靜故 非三昧也].

이 가운데 가장 먼저 편찬된 『조당집(祖堂集)』 원문을 참고하면 의미가 명확하다. 
“일체 모든 것이 고요하니 어찌 삼매가 아니겠습니까[俱寂靜故 豈非三昧]?”
삼매의 경지에서는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풍경이 흔들거리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인가? 오직 “삼매(三昧)의 경지에 이른 고요한 마음”만이 갖가지 소리와 경계의 대상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뿐이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인 시각, 청각 등 감각기관은 더더욱 아니다. 
‘삼매(Samādhi 三昧)’란 “일체 모든 존재의 미세한 움직임, 가느다란 소리마저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존재의 본연의 상태를 투철하게 알고 있는 경지”를 말한다. 제자는 지극히 고요한 삼매의 경지를 체득한 후이기에 주저할 것이 없다. 혜능선사가 그러했듯이 가야사다도 이 한마디로 인식의 한계를 벗어났음을 증명해 보였고 스승과 함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범준 스님
운문사 강원 졸업. 사찰 및 불교대학 등에서 출재가 불자들을 대상으로 불교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봉은사 전임 강사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