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와 환경파괴로 인한 과보

특집 earth 얼쑤!

2020-04-27     유정길

 

|    ‘유한’한 자원 ‘무한’하다는 미망
지구의 역사 46억 년을 24시간으로 보면 밤 11시 58분에 유인원이 출현했고, 마지막 5초에 인류가 등장했다. 그 5초를 다시 24시간으로 계산하면 자정되기 2분 전이 산업혁명이 시작된 찰나의 시간이다. 그 시간은 산업사회가 만들어진 200년의 기간이다. 지금 인류가 쓰고 있는 에너지는 46억 년 동안 태양에너지가 축적해 놓은 것이다. 46억 년간 햇볕을 받아 탄소동화작용으로 식물과 나무가 커왔고, 그 식물을 먹고 이제까지 수백 억의 동물이 자랐다. 태양에너지가 풀이나 나무 등 식물처럼 고체 형태로 집약되어 땅속에 묻혀 석탄이 되었고, 식물을 먹은 동물이 죽어 땅속에 묻혀 석유가 되고 가스가 되었다. 그런데 산업사회는 이 46억 년의 축적물을 불과 찰나의 순간에 다 써버리는 경제를 발전이며 성장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우리는 앞으로 수백 년 넘게 살게 될 미래세대는 안중에도 없다.
오늘날 산업문명은 GDP(국내총생산), GNP(국민총생산)라는 척도를 들이대며 누가 더 많이 생산하는가를 경쟁한다. 그 기준으로 선진국과 후진국 서열을 매기며 ‘발전, 성장, 진보’의 척도를 생산(Product)량으로만 계산했다. 모든 나라가 미국과 같은 풍요로운 사회가 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누가 빨리 성취하는지를 경쟁해 왔고 한국은 이러한 경쟁에 성공한 나라이다. 
사고실험을 해보자. 세계인구 70억 중에 5%밖에 안 되는 미국이 세계자원의 20%를 소비한다. 또한 잘 사는 선진국의 20% 인구가 세계자원의 83%를 소비한다. 만일 나머지 80%의 가난한 나라 사람이 미국 같은 엄청난 소비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물어볼 필요도 없이 지구는 더욱 빠른 속도로 결딴날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재의 지구환경문제, 기후위기는 소수 잘사는 사람의 자원소비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반대로 지구는 80%의 가난한 사람 덕분에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난한 이들의 그 가난 덕분에 선진국의 자연 파괴적이고 낭비적인 소비가 유지되는 것이다
에너지가 새롭게 재생산되는 속도가 우리가 소비하는 속도를 넘을 정도로 빠르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또한 우리가 옮겨 살 수 있는 지구가 여러 개 있다면 걱정이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원을 생산하고 정화하고 복원하는 속도보다 사람들이 소비하고 버리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인류에게 발전, 성장, 진화라는 패러다임의 중요한 기반은 ‘자원은 무한하다’는 전제이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 분야의 토대가 바로 ‘자원무한주의’이다. 그러나 하나뿐인 지구(The Only One Earth)라는 말에서 명백한 것은 우리에게 자원은 ‘유한’하다는 사실이다. 
어느 쪽이 잘못인가? 당연히 자원무한주의는 인류의 미망이었다. 200년간 환상과 착각에 근거한 정치, 경제, 문화 시스템을 이제껏 유지해온 것이다. 바로 이 어리석음에서 사단이 시작된 것이다. ‘유한’한 자원을 무한하다고 착각하여 엄청난 속도로 소비, 폐기하는 것을 좋다고 생각하는 발전, 성장. 그러한 가치를 토대로 한 ‘행복 패러다임’이다. 이 미망은 당장 행복으로 보이지만 결국 자기 절멸의 낭떠러지로 인류를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    모든 생명이 더불어 행복할 수 없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땀 흘리는 농부, 채찍에 맞는 소, 쟁기에 짓이겨진 벌레, 그 벌레를 쪼아먹는 새를 보며 이 생명이 함께 행복할 수 없을까 고뇌하시며 출가하셨다. 불살생이 첫 번째의 계율이 될 정도로 불교는 생명들과 더불어 공존하며 사는 지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의존하는 연기법이 부처님의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연결된 세상에서 너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며, 아마존 생물들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내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결국 연결되어 있기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껏 인간의 지식은 분리하고 구분하는 방식으로 사물을 분석하고 이해했다. 심지어 너와 나를 분리하고 선과 악을 가르고, 우리 편과 내 편을 나누고, 있지도 않은 국경을 기준으로 국가 간 개인 간 투쟁과 경쟁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우리가 깨달은 것은 바이러스에겐 국경이 없으며, 우리는 이렇게 촘촘히 관계맺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 사람의 감염이 전 세계로 급격히 퍼지듯이 한 사람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환경위기는 해결해야 할 큰 문제이다. 미망에 빠진 인간에게 다양한 기후위기로, 바이러스로, 홍수와 가뭄, 미세먼지로 끊임없이 자각을 촉구하는 신호(Signal)를 보내온 게 아닐까? 지금의 발전이 진정한 발전이 아니고, 풍요를 지향하는 성공이 진정한 행복이 아님을 깨달으라는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하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자신과 지구를 이끌고 있다. 
환경위기가 주는 깨달음의 메시지는 뭘까.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적게 사는 것, 빠른 것보다 때로는 멈추거나 천천히 사는 것, 누군가를 짓밟고 위로 올라가는 성공이 아니라 사람끼리 손잡고 협력하여 옆으로 성공하는 게 진정한 행복이라고 지구는 소리치고 있다. 성장이 아니라 성숙의 사회가 되는 것이, 늦었지만 그러한 방향의 큰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제는 외면해선 안 된다. 
9년 전인 2011년에 나온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컨테이젼(Contagion)>은 오늘의 코로나전염 상황을 예견한 영화라는 평가를 할 정도로 인류에게 전염병을 옮기는 바이러스와의 사투를 그린 영화이다. 이 영화의 끝에 바이러스가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설명 없이 담담히 상황을 보여준다. 한 다국적 기업이 개발을 위해 숲을 벌목하며 파괴한다. 서식지가 사라지자 거기 살던 박쥐가 인근 농가로 내려와 돼지 축사에 살게 된다. 박쥐가 먹던 먹이를 떨어뜨린 것을 그곳의 새끼돼지가 먹고 그 새끼돼지는 식당으로 팔려가 도축된다. 그 고기를 요리하다가 주방장은 씻지 않고 앞치마에 그냥 손을 쓱쓱 닦은 뒤에 여자 주인공과 악수하고 사진을 찍는다. 바로 이 순간이 바이러스 발생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최근 50년간 신종 감염병의 급격한 증가는 병원체의 자연적 진화도 원인이지만, 대체로 생태환경파괴와 도시화, 여행교역, 토지 개발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결국 인간의 행위가 문제일 뿐이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이제까지 너무도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람끼리 만나고, 악수하고 포옹하고, 밥 먹고, 만나는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 대단한 일임을, 또한 그러한 일상이 가능하게 한 사람과 자연 하나하나가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됐다. 
이번 코로나19 확대를 막기 위해 법회와 예배가 중단되고, 모든 모임과 회의가 취소됐으며 사회적 거리두기가 권장되고, 시장거래와 경제가 거의 중단될 정도의 상황을 우리는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앞으로 10년 안에 기후위기로 인해 이 같은 상황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른다. 어쩌면 이번 바이러스의 상황은 그때 닥칠 기후비상사태를 위한 예행연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이다. 
최근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는 말보다 기후위기(Crisis)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미 그 심각성이 도를 넘고 있다는 절박한 경고다. 이미 EU를 비롯하여 유럽 국가들은 2020년부터 2030년까지 지구 온도의 상승 폭을 1.5도가 넘지 않도록 기후비상사태 선언(Climate Emergency Declaration)을 했다. 지금 각국이 긴급 대책을 세우며 이 선언을 종용하고 있다. 
46억 년간 지구에 깃든 생명이 만든 자원을 한순간에 쓰는 화석연료 중심의 경제 시스템과 이를 기반으로 한 정치사회 시스템은 바뀌어야 한다. 더욱이 이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항공과 선박 등 교통 중심의 해외교역은 최대한 줄여야 하고, 가까운 지역 간의 협력을 통해 자립하는 순환사회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이제 돈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것임을, 물질의 풍요만이 아니라 사람과 관계를 심화시키고 협력하는 마을공동체, 서로를 돕는 호혜시장과 공유경제, 협동조합경제가 인류가 지향할 오래된 미래임을 깨닫는다. ‘개벽’이라고 할 수준의 ‘거대한 사회적 전환’이 중요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는 말이 떠오른다. 지구에 사는 존재의 생명을 지키는 ‘개벽’ 수준의 ‘거대한 사회적 전환’이 늦지 않았길 염원한다.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이자 녹색불교연구소 소장이다. 정토회 에코붓다 이사, 귀농운동본부 귀농정책연구소 소장, 국민농업포럼 공동대표, 환경운동연합, 한살림, 아름다운 재단등에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조계종 환경위원, 백년대계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과거 한국JTS 아프가니스탄 카불지원팀장을 지내는 등 환경, 생명평화, 개발구호, 
남북평화, 공동체운동과 협동조합, 마을만들기 등 대안 사회운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