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종이상자에 대한 명상

테마 에세이 - 살며 사랑하며 2

2020-03-31     불광미디어

한 달 전이었다. 어젯밤의 비와 거센 바람은 온데간데없이 날씨가 맑았다. 바람이 차가워 나는 몸을 움츠렸다.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버려진 종이상자 두 개가 젖은 채 아파트 담벼락에 기대있는 것을 보았다. 검은 우산도 아파트 담벼락에 꽂혀있었다. 큰 상자는 가로로 작은 상자는 세로로 기대어 놓여있었다. 젖은 종이상자 위의 검은 우산은 비 맞지 않게 보호하려는 누군가로 보였다. 젖은 종이상자는 마치 사람처럼 서로 맞붙어있었다. 젖은 상자는 기억 속의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15년 전, 나는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퇴근하면 늘 시간이 없기에 그날은 마음먹고 종각역으로 향했다. 책을 한 권 사고 싶어서 밥도 먹지 않고 서둘러 전철을 탔다. 내린 곳은 종각역. 12월이라 춥고 배가 고팠다. 뭐라도 먹고 영풍문고에 들러야지 생각하면서 서점 입구로 막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였다. 배 안에서는 천둥소리가 우르릉거리며 들려오기 시작했다. 분식집까지 열 발짝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멈춰야만 했다. 나는 왜 하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까. 
분식집과 비스듬히 마주 보는 땅바닥에 그녀와 아이들이 있었다. 갓난애는 업고, 세 살 정도 되었을까 싶은 여자애는 옆에 앉혀둔 채 구걸하는 걸인 엄마. 걸인을 한두 번 보았던가. 마음 내키는 대로 돈을 주고 지나가거나 무심하게 지나치던 내가 아니었던가. 무엇이 그녀와 아이들에게 내 시선을 빼앗기게 했던가. 아마도 일가족이 단순한 걸인으로 보이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종이상자를 두세겹 깔고 있는 폼이 그곳에서 잠을 청할 것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노숙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들인 듯 싶은 갓난애는 때 절은 포대기로 업고, 여자애는 엄마 옆에 꼭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고 엉거주춤 앉아있었다. 
나는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내 주머니에는 2,000원의 지폐와 교통카드를 겸한 카드가 들어있었다. 고개를 돌렸는데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나는 모녀 일가족의 앞으로 걸어갔다. 조그만 플라스틱 바구니에 2,000원을 넣었다. 아직도 쟁쟁하게 들린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바구니에는 동전들이 조금 들어있었지만, 그 돈으로 음식을 사 먹기는 어려워 보였다. 이제 돈을 주었으니, 나는 카드로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사 먹으면 되련만 분식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갈 수 없었다. 
바람이 쌩쌩 부는 지하도 한가운데 앉아 한 끼 밥을 구걸하는 모녀는 얼마나 배가 고플까 싶었다.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사서 아이에게 먹이고 싶은 어미를 생각하면 국수 가닥을 넘길 수가 없었다. 공부를 안 하려는 아이들을 말로 타이르고 으르며 가르치느라 기운이 없는데도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따뜻한 밥 한 끼가 간절해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아 냉기를 견디며 겨울을 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따뜻한 국수를 넘길 수 있을까. 생각하기 전에 내뻗은 손길이었다. 누군가의 칭찬이나 시선을 생각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나 역시 남매를 둔 어미이기에 아이들을 위해 밥 한 끼를 버는 그 마음이 내 일처럼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마도 추우면 종이상자를 요 삼아 신문지를 이불 삼아 등에 업은 아이는 더 동여매고, 딸아이는 꼭 끌어안고 겨울밤을 나리라. 마음이 아리고 쓰려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 차마 저녁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냥 그랬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이상자는 전날의 비로 후줄근하게 젖어있었고 무너질 듯 바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노숙하던 그녀와 아이들을 연상시키는 종이상자를 보며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마치 그들인 듯 일으켜 세워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들은 이 겨울 추위에 비바람을 피해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먹었을까. 상자 위에 펼쳐진 검은 우산은 비를 맞지 않게 누군가 내민 커다란 손처럼 보였다.     

황동옥
동화작가. 시와 소설을 비평하는 작업과 그림책 공부를 함께 하고 있다. 
시와 그림, 사람들과의 만남을 좋아한다. 햇살 좋은 날 공원을 산책하며 나무를 바라볼 때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