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코가 지치고 힘들 때, 코가 삐뚤어지도록 피톤치드를 마셔보자.

특집 | 열려라, Six-Sense[六根] | 피톤치드의 향연

2020-03-31     남형권

1    꿈결 같은 식물 세계로 초대하다
서울시 강서구 마곡동 ‘서울식물원’ 
어디선가 새들이 지저귄다. 새 떼의 재잘거림이 귓가에 가깝다. 물기를 머금은 잎들이 내뿜는 풀냄새가 코를 즉각 정화한다. 다채로운 식물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는 저마다 다른 음계를 가지고 식물원을 유영한다. 가빴던 호흡이 자연스럽게 차분해진다. 이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내가 코로 무엇을 들이쉬고 있는지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된다. 멕시코에서 온 붉은 포인세티아 꽃과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는 사이프러스가 빚어내는 청량함이 뭉근한 여운으로 코를 맴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마치 거대한 벌집처럼 보이는 천장으로 햇살이 쏟아진다. 부서지는 빛도 따뜻한 냄새가 있는듯하다. 마치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 이곳은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 만든 서울식물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소리 역시 곳곳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심 속에서 쉽게 식물들과 어울려 당신의 코를 해방하고 싶다면 이곳은 분명 최적의 장소다.

야외 주제정원도 있지만 아직은 쌀쌀하다. 열대 및 지중해 국가 12개 도시 식물을 전시한 온실을 중점적으로 돌았다. 온실 입구 오두막은 소년이 모험을 떠나기 전 작당 모의할 법한 설렘이 묻어있으면서도, 노인이 조용히 생애를 돌아볼 법한 은밀한 장소 같다. 생애 주기는 우리 숨의 주기 변화와도 맞닿아 있는지 모르겠다. 맘껏 숨을 들이쉬며 열심히 뛰어놀던 어린이가 세월이 흘러 가랑가랑 숨소리를 내는 할아버지가 되기까지. 이곳에 방문하면 코가 그 압축한 생애 여정을 걷는 느낌이다. ‘열대관’에서 ‘지중해관’, 식물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층 ‘스카이워크’까지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전 세계 식물들이 두루 펼쳐져 있는 만큼 코를 자극하는 방식이 다채롭고도 변화무쌍하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여정이다. 로즈마리와 라벤더와 같은 허브부터 보리수, 바오밥나무, 코코넛 야자, 올리브나무 등 각양각색 나무까지. 은은한 향에, 때로는 상쾌한 알싸함에 코는 부지런히 반응한다. 직경 3m까지 자라는 빅토리아 수련을 중심으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아마존 밀림도 압권이다. 폭포수가 떨어질 때 포말이 품은 습기는 피톤치드와 함께 자욱하게 코에 들어찬다. 이곳에서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신선한 변화는 감각의 결과일까. 감동의 결과일까.


2.    서울 한복판 대자연이 거는 ‘피톤치드’ 최면술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 봄의 새싹이 태동하기 직전에 방문한 홍릉수목원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이곳은 원래 ‘홍릉’, 즉 명성황후가 묻혔던 곳으로 우리나라 최초 수목원이며 국립산림과학원 부속 전문수목원이다. 시험림이기에 평일엔 숲 해설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탐방할 수 있고 주말엔 자유롭게 개방한다. 문배나무길, 황후의 길, 천년의 숲길, 천장마루길, 숲속 여행길 등 홍릉숲을 주제별로 거닐 수 있으며, 침엽수원과 활엽수원, 초본식물원, 관목원 등 제8수목원까지 구분되어 있다.
광활한 숲을 천천히 거닐어본다. 봄이 오기 전이라 주로 침엽수림을 중심으로 돌아봤다. 정문 침엽수림원(제2수목원)에서 장대한 메타세쿼이아 아래에 섰다. 곧게 뻗은 나무들, 그 밑에 버틴 장엄한 뿌리에서부터 올라오는 짙은 나무체취가 온몸에 전이된다. 서울 안에서 코가 이런 대자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니 놀랍다.

 

본관 뒤 잔디 정원과 이곳 최장수나무 반송을 지나 깊숙이 홍릉터가 있는 곳까지 향한다. 초입에 만난 너도밤나무가 가지를 무심히 드리운 채 반겨준다. 참나무 표피를 덮은 초록 이끼들이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 호흡을 가다듬고 온전히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 의식을 치른다. 끝을 모르고 울창한 숲 너머 참나무, 소나무, 오리나무, 벚나무까지 고즈넉한 바람과 함께 담담한 자연의 냄새를 실어와 그윽한 피톤치드를 선사한다. 
걷다가 보면 키 작은 나무들이 둘러싼 곳에 우물터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다. 명성황후 능에 행차했던 고종이 잠시 쉬어가며 목을 축이던 곳. 어정(御井)이다. 혼란한 시국에 왕비를 잃은 왕의 그리움까지도 보듬어주던 게 바로 이 숲이 아니었을까. 진실한 자연 속 숲 한가운데서 당신의 코가 완전히 해방하길 꿈꾼다면, 홍릉수목원은 가장 훌륭한 선택지가 될 것이다.


3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솔향에 취하다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2동 
    남산야외식물원

남산야외식물원은 이름도 접근도 친숙하다. 잘 정돈된 나무들과 길, 곳곳에 비치된 정자와 의자들. 이곳은 팔도 소나무 단지, 야생화원, 수생식물원, 유아 숲 체험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팔도 소나무 단지에 가면 전국 각지에서 직접 공수해 심은 소나무들을 모아놓아 흥미를 자아낸다. 남산야외식물원엔 소나무가 많다. 사계절 푸르른 소나무들 사이에서 들이마시는 피톤치드는 군더더기 없이 정직하고 매섭다. 들이쉬고 내쉰 횟수에 정확히 비례하듯 머리가 점점 맑아지고 개운해진다. 어느덧 해질녘.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자 소나무 껍질 사이사이마다 장렬한 오렌지색 빛이 조금씩 번져온다. 

 

나무판자로 조성한 길을 걷다 보면 한편에 대나무들이 나란히 모여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의 떨림을 따라 코도 자꾸만 그동안 쌓인 독소를 뱉어낸다. 저 아래 서울이라는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나무들이 둘러싼 이곳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거대하고 적막한 도시,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세계가 정녕 서울인지 헷갈릴 만큼 코는 자꾸만 자연의 향취를 더듬는다.    

 

우리 고장엔 어떤 수목원이 있을까?
화장품과 향수 등 인위적인 향 그리고 미세먼지… 
코를 지치게 하며 때로는 현혹하고 속이는 것들을 떠나 수목원을 찾아가 보자. 
맑은 공기와 피톤치드가 기다리고 있다. 

글. 남형권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