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에세이] 선승의 통곡, ‘시간의 사슬 끊기’

2020-02-19     김택근

랜디 포시 미국 카네기 멜론대 교수는 시한부 삶을 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강의』란 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가치와 살아가는 즐거움에 대한 얘기는 나름 울림이 있다. 그는 췌장암 진단을 받고도 절망하지 않았 다. 오히려 죽음의 신에 태연하게 맞섰다. 그리고 실제로 남은 시간 동안 잘 살았다.
그랬던 랜디 포시도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는 시계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식료품을 사고 셀프 계산대에서 신용카드를 두 번 긁었다. 실수를 했으니 당연히 16달러 55센트짜리 영수증 하나는 취소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15분이 걸렸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환불받기 위해 시간을 써버릴 것인가.”
결국 16달러 대신 15분을 선택했다.
그는 말한다. “시간은 당신이 가진 전부다. 그리고 당신은 언젠가,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도 어차피 죽음 앞에 서 있는 시한부 인생이다. 죽음과의 거리를,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을 마무리할 것인가.절집에 서는 유독 시간이 맥을 추지 못한다. 시간을 토막 내고, 가고 오는 시간마다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구도의 수행승에게는 촌각을 다투라고 이른다. 시간은 수행승이 가진 전부이다. 선방의 죽비에는 째깍거리는 시계침이 들어 있다.
“우물쭈물 날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나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깜깜해서 아득했다. 광음을 헛되이 보낼 수가 없어서 뱃속은 불이 났고 마음은 바빠서 부산하게 도를 찾아 물었다 (임제 선사) .”
“헛된 몸을 얼마나 살리려고 이 한 생을 닦지 않는가. 몸은 반드시 마침이 있는데 죽어서 다시 받는 몸은 어찌할 것인가. 급하고도 급한 일이로다
(원효 대사) .”
경허 스님은 “옛사람이 참선할 때 하루해가 가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어이 방일하느냐”라고 경책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하루를 흘려보냄이 안타까워 울었을 것인가. 법전 스님도 수행 중에 자주 통곡을 했다. 참선을 시작하면 절구통처럼 꿈쩍도 하지 않아 ‘절구통 수좌’로도 불렸지 만, 사실은 끊임없이 시간의 습격을 받았던 것이 다. 스님의 고백이 절절하다.
화두를 잡고 있었지만 가슴에 응어리 같은 것이 맺혀서 풀어지지 않았다. 공부가 시원치 않았다. 스님은 홀로 대승사 묘적암 암자에 들었다.
도를 이루지 못하면 생을 끝내겠다고 마음먹었 다. 절박했다. 흐르는 시간이 아까웠다. 닷 되 분량의 밥을 한꺼번에 해놓고 찬밥에 김치 몇 쪽으로 끼니를 때웠다. 옷을 입은 채 하루 두세 시간만 눈을 붙였다. 좌복에 앉아 새벽을 맞았다. 그렇게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건만 변화가 없었다.
수행자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지옥의 고통이 아니었다. 가사 옷 걸치고 도를 이루지 못함이었다.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법전이란 존재는 세상 어디에 있을 것인가. 오늘 호흡이 끊어진다면 이 몸뚱이는 어디로 흩어질 것인가.’ 울음이 나왔다. 스님은 홀로 통곡했다.
다시 눈물이 스며든 좌복 위에 앉았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남긴 순두부를 먹으려 하니 곰팡이가 새까맣게 피어 있었다. 방바닥엔 눈이 내린 듯 먼지가 쌓여 있었다. 해가 뜨자 그먼지 위로 자신의 발자국만 선명했다. 그것은 마침내 시간이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고 공손해졌 음이었다. 시간이 함부로 흐르지 않음이었다. 법전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게송을 불렀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온몸이 환희로 차올랐다. 시간의 사슬을 끊는 순간이었다.
시간의 끝에 죽음이 있다. 아니 죽음이 우리 들의 시간을 끌어당기고 있다. 남은 생을 어림해 보면 갑자기 초조해진다. 그리고 울고 싶을 때도 있다. 남은 시간에서 눈물을 닦아내려면 내 안의 무엇을 버려야 할까. 완전히 닦아서 더 닦을 것이 없는 도인은 시간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 한가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경지 아니겠는가. 사찰에 들어서면 시간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다. 아마도 깨달은 스님들의 시간이 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숱한 통곡 속을 돌아 나온 맑은 시간 앞에 두 손을 모은다.

 

김택근

시인, 작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오랜 기간 기자로 활동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