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초대석] 검사 옷 벗고 호미를 들다

2020-02-19     남형권

농사짓는 변호사 오원근

 

얼굴을 생각한다. 전직 검사 얼굴, 변호사 얼굴, 농부 얼굴, 작가 얼굴, 수행자 얼굴. 이 얼굴들은 각자 다른 얼굴이 아니다. 오원근이라는 한 사람 얼굴이다.

오원근 변호사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쪽벽 책장에 법전을 중심으로 불교 서적, 시집 등다양한 책이 꽂혀있다. 그는 요즘 매일 아침 출근해 5분씩 시집을 낭독하는 시간이 무척 행복하 다고 말한다. 이전엔 『금강경』 해설서 『금강경오 가해』 (불광출판사) 를 매일 5분씩 수년에 걸쳐 반복해 읽기도 했다고 반긴다. 시간을 쪼개어 쓴다는 그는 바빠 보였다. 앞에 놓인 두꺼운 서류 뭉치와그 주변에 굴러다니는 사무용 골무들이 바쁜 변호사 일상을 대변해준다. 옷걸이에는 넥타이가 여러 개 걸려있고 그가 앉아있던 의자 옆엔 구두네 켤레가 나란히 놓여있다. 벽에 걸린 ‘정해진 법은 없다’라는 『금강경』 속 ‘無有定法 (무유정법) ’ 을 쓴 서예 작품이 눈에 띈다. 의자에 앉기 전 입구 쪽을 돌아보니 유리창에 여러 개 지도가 백두 대간을 따라 이어져 붙어있는데, 2~3년 안에 종주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틈틈이 지도를 따라 산에 오른다고 한다. 사무실을 채운 수많은 단서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듯하다.

검사 그만두고 100일 출가 결심

국민참여재판 1호 검사인 그가 10여 년 재직했던 검찰을 떠나 귀농해 주중엔 변호사로 일하고 주말엔 오롯이 농사일에 전념하는 삶을 택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저는 자유와 자연스러움을 좋아합니다. 인권, 정의, 민주주의보다는 실적, 승진에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내심 고향에 있는 검찰청에 내려가 일하다가 퇴직해 전관 예우 받으며 변호사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다니고 있었죠. 하지만 흠모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가 몸담고 있던 검찰이 행한 모욕주기식 수사로 인해 돌아가시고 나니 안정적인 수입 이나 전관예우를 바라며 남아있는 게 너무 비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내면에 있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정말 원하는 삶을 살아보자 결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열심히 살피는 불교 공부가 큰 도움이 됐고요.”

 

법조인으로서 그가 생각하는 ‘정의’ 역시 자연스러움이다. 법이라는 이름을 빌려도 자연스 럽지 못하다면 정의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아버지 행패를 견디다 못해 돌로 내리쳤다가 살인미 수에 그친 딸에게 검사가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 일이 있었다. 그는 용기있는 결정이라고 생각했 다. 그 생각과 같은 법률신문 칼럼을 자신이 맡았던 비슷한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자유,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입에 담을 때유난히 그의 눈은 빛났다.
“전 늘 자유를 갈망해왔어요. 어린 시절 스스 로 억압을 많이 했거든요. 소작농이신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고 주사가 심하셨어요. 어둡고 불안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상황 에서도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홀로 노력하셨고 요. 제 안에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커졌는데 다스릴 수가 없었어요. 또 힘들게 헌신한 어머니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이 학창시절 내내절 억압했죠. 그래서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20대 중반에 절에서 운영하는 고시원에 들어가 사법시험 공부를 했는데요. 평소 힘든 환경에 있다가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곳에 가니 편안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책에 어머니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겁니다. 저를 위한 공부라기 보다 어머니를 위한 공부, 의무감에 따른 공부였기 때문이었죠. 매일 산길을 거닐며 그저 놓여있는 자연을 들여다보고 또 자연스럽게 놓는 연습을 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머니 팔자구나.
어머니 삶이구나. 그때부터 책에서 어머니 얼굴이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공부가 시작됐어요.”

 

그래도 그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검사를 그만두고 정토수련원에서 100일 출가를 감행, 행자생활을할 때 스님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토로했다.
“스님께서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사람이 어떻게 검사를 하고 변호사를 하겠냐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잘났다는 생각 때문에, 그 기준을 아버지가못 맞춰주니까 아버지를 미워하는 거다. 그 기준을 내려놓으시라.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를 힘들게할 뿐만 아니라 주변 다른 식구들도 힘들게 한다.’ 그때 제가 스스로 기준을 정해놓고 못 미치면, 안맞으면 그 사람을 미워하는구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그래서 생겼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는 100일 출가를 마친 뒤 곧장 아버지를 찾아뵙고 3배를 올리며 참회했다.

스피커를 고소하고 쓰레기를 거두는 삶

불교를 가까이하며 억압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 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 그는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인 ‘민주주의’와 ‘환경’ 문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 내며 행동하고 있다.
“검사를 그만두고 청주로 내려와 지내며 자연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새벽에 홀로 청주를 가로지르고 있는 무심천을 따라 산책하길 즐겼어요. 저는 조용히 거닐며 풀벌레 우는 소리도 듣고 물소리도 듣고 자연에 집중하고 싶은데 청주시에서 여기저기 설치한 스피커로 시정방송을 계속 내보내 방해가 되더라고요.

자연이 가진 소리를 들으러 왔는데 트로트를 들어야 했고요. 처음 헌법소원을 냈는데 각하가 됐어요. 헌법소원 심판은 그 사유가 있다는 사실을안 날부터 90일 이내에, 사유가 발생한 날부터 1 년 안에 청구해야 한다며 이 시기가 지났다고 하더라고요. 다시 청주시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고 결국 조정을 통해 하루에 16시간 하던 방송을 6시간 하기로 합의가 됐죠.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냥 놔두면 그런 흐름이 사회적으로 이어진다고 봐요. 자라나는 아이들을 생각해 서라도 문제를 제기하고 고쳐야 할 건 고쳐야죠.”
지역 신문에 환경 문제에 관해 꾸준히 칼럼을 기고하고 있는 그는 민주주의, 그리고 환경이 결국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개인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타인이 가진 권리를 배려하며 서로 조화를 이뤄 인간답게 살자는 거잖아요. 환경도 그래요. 인간 외에 다른 생물체들도 억압받지 않고 자기 생명을 지키며 살 수 있어야죠. 환경 오염은 결국 인간에게 돌아옵니다. 언제부터인가 물을 사 먹고, 마스 크도 쓰고 다니잖아요? 전 휴지 대신 늘 손수건을 쓰고 있어요. 집에서 나오는 음식물쓰레기를 저는 찌꺼기라고 부르는데요. 밭에 퇴비로 쓰고 있죠.”

선입관을 가지지 않기 위한 서로 다른 구두들
백두대간 종주 계획이 담긴 지도

흙을 밟고 만나는 성찰의 시간

그는 화학비료로 키운, 당장 겉보기에 크고 좋아 보이는 작물을 거부한다. 환경을 생각하고 온전히 자연 흐름을 따르며 그 양분과 기운을 얻기 위해 시간이 더 오래 걸려도, 매끄럽지 않아도 자연과 가까운 생태농을 고집한다. 아무 준비 없이 귀농해 땅에 씨앗을 심는다고 농사가 되지는 않았을 터, 더구나 생태농이라니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을 듯하다. 빳빳한 셔츠를 입고 서류 더미에 파묻혀 살던 검사가 흙을 밟으며 땀 흘리는 농부가 되기까지 힘들고 어렵지는 않았을까.
“소작농 아들로 자랐어요. 부모님 농사일을 옆에서 많이 봤죠. 또 사법시험 준비할 때 주로 산사에 들어가 공부하며 자연을 늘 접하다 보니 흙을 좋아하게 되고, 바람을 좋아하게 되고, 자연 스러움을 좋아하게 됐어요. 인간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자연스러운 게 농사라고 생각했어요. 2002 년 전주에서 검사로 근무할 때 처음으로 주말농장 형식으로 농사일을 시작했어요. 서울중앙지 검에 근무할 때는 그토록 가고 싶던 생태귀농학 교에 다녔습니다. 휴가를 내고 윤구병 선생님이 만든 변산공동체에 가서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는 생태농업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고요.”

흙을 덮고 농사한 지 5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땅에 거름기가 생기고 힘이 생겼다며 웃는다.
어찌 보면 그가 흘린 진한 땀과 오랜 시간이 땅을 변화시켰듯 갑자기 삶이 변화된다는 생각도 착 각일지 모른다. 귀농한 농부이자 자유로운 변호 사가 되기까지 사실 그가 지나온 삶 곳곳엔 늘 자연이 있었고 또 자연에서 힘을 얻었다.
“노스님 혼자 계신 봉곡암에 들어가 공부했을 때 숲속에서 물끄러미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 하다가 어느새 제 몸을 잊고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자연과 하나가 된 느낌이랄까 요. 언젠가는 저수지 앞에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어미 개와 새끼가 저를 물끄러미 보고 있더라고요. 왠지 서로 통하는 느낌이었죠. (웃음) 동생이 살던 반지하 방에서 2차 사법시험을 공부할 때는 너무 스트레스를 받다가 문득 창문을 봤는데 지나가는 사람 발들 사이로 시멘트 땅 갈라진 틈에 풀 한 포기가 눈에 들어왔어요. 저도 모르게 30분 정도를 그저 멍하니 바라봤는데 신기하게도 그 스트레스가 사라지더군요.”
자연에서, 일상에서 자주 느끼고 깨닫는 그는 일상에서 꾸준히 작은 수행을 실천하고 있다.
“매일 아침 30분 이상 호흡명상을 하고 있어 요. 자기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려고 늘 노력합니 다. 또 여기 제 옆에 구두 네 켤레 보이시나요? 더편안한 구두를 자주 신고 싶어도, 반드시 매일 다른 구두를 신고 있어요. 선입관을 가지지 않으려는 마음을 늘 되새기기 위해 노력하는 작은 행동 입니다.”

글.남형권 사진.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