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붓다] 껍질의 경계에서 공을 만나다

2020-02-05     마인드디자인(이현지)

우리는 ‘밖으로 드러난 현상과 그 안에 존재하는 본질’에 의지해 세계를 인식한다. 눈에 보이는 단단한 껍데기인 현상이 있고, 그 속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인간은 ‘바깥의 것’으로 세상을 보고 듣고 맡고 느끼고, ‘안의 것’으로 사물의 기능, 사람의 본성, 자연의 속성 등을 파악한다. 이러한 인식체계는 세계가 고정된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을 만든다.
이 믿음은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 짓게 한다.
“형태의 현상과 본질을 구분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우리의 단단한 신념에 균열을 가하는 전시 <peel-그 경계를 상상하다> 전 (展) 에 다녀왔다.

글.
마인드디자인(이현지)
사진.
021갤러리 제공

021갤러리 [peel-그 경계를 상상하다] 전

 

껍질은 무엇인가, 무엇일 수 있는가

바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안으로 들어와 있는 ‘뫼비우스 띠’.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으니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전시는 껍질의 안과 겉이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현상과 본질이라는 인식 차원뿐 아니라, 참과 거짓, 흑과 백이라는 논리적 판단에 관해서도 안과 밖의 구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시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전시에 참여한 박동삼, 이병호, 이환희 작가는 형상의 속성을 지워 실루엣만 남기거나, 껍질 이면의 실체를 드러 내거나, 두텁게 마티에르를 올리는 작업을 선보이며 “껍질은 무엇인가, 무엇일 수 있는가, 무엇이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답한다.

디테일을 버린 실루엣이 말하는 것

성별도 생김새도 알 수 없다.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박동삼 작가의 작품에서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웅크려 누워 있는 어떤 이의 실루엣뿐이다. 그 어떤 이가 가슴이 아파 오열하고 있는 것인지, 그저 마음 편안히 쉬고 있는 것인지 작품은 설명하지 않는다. 관객만이 안다. 작품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디테일을 버리고 속성을 잃은 껍질은 사물의 안과 밖을, 관객의 안과 밖을 이어준다.
박동삼 작가는 사물의 디테일과 속성을 벗어낸 조형 작품을 만든다. 모든 사물은 각자의 실루 엣, 즉 윤곽을 가지고 있다. 시각에 즉시 들어오는 윤곽은 인식의 결정적인 매개체다. 실루엣만을 살려내 껍질이 스스로 말하도록 한다. 시각적 디테일과 물질적 속성을 버리고 껍질을 드러내기 위해 한지와 투명 테이프를 활용한다. 그의 작품에서 ‘그 안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고유한 본질’ 은 설 자리를 잃고 작품의 안과 밖을 부유한다.

박동삼 | Untitled 한지 | 72×112cm | 2019

 

텅 비어 있음을 포착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껍질들뿐인데, 어떻게 ‘나’ 라는 사람 안에 단단한 실체와 같은 ‘본질’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병호 작가는 이 보이는 껍질 너머의 실체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텅 비어 있음’이다. <Seated Figure>는 실리콘으로 인체를 만들고 공기 압축기로 인체에 수축과 팽창을 가하는 작품이다. 작품은 이상적으로 균형 잡힌 모습과 뼈가 앙상히 드러나는 모습을 교차해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인간 내면의 본질이라는 것이 결국은 텅 비어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병호 작가는 절단된 인체 조각들을 재조 합하는 작업도 내보였다. 그는 기존에 있던 석고 조각들을 나무와 폴리우레탄으로 덧대어 새로운 포즈의 조각으로 탈바꿈시켰다. 부러지고 깨져그 의미를 잃은, 버려져야 할 인체가 재조합돼 전시된 모습은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로서의 신체에 관해 묻는다. 몸으로 형상화된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구분은 어쩌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없는 경계 없는 껍질이 아닐까.

이병호 | Seated Figure 실리콘 고무 | 에어 컴프레셔 | 53×106×57cm | 2019
이병호 | Statue X 폴리우레탄, 석고, 나무 | 200×83×92cm | 2019

두터운 마티에르로 튀어 오르는 껍질의 경계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이환희 작가의 작품은 조각 같다. 작가는 두터운 마티에르로 부조 같은 회화 작업을 한다. 조각과 회화의 아슬아슬한 경계 에서 서 있는 그의 작품은 관객에게 시각적 정보와 촉각적 느낌을 함께 전해준다. 이미지의 정체, 조형적 형태, 장르의 구분 등은 이환희 작가 작품 안에서는 그 경계를 잃는다. 녹아 풀어진 껍질 속에서 작품은 하나의 경험으로 얽혀 존재한다. 나아가 작가의 과감하고 힘 있는 표현은 관객을 더욱 자유롭게 껍질의 안과 밖을 넘나들게 만든다.

이환희 | Reverse Sweep Oil on Canvas | 21×49.5cm | 2017

 

이환희 | Gala 캔버스에 유채, 연필, 알키드193×255cm | 2017

 

껍질의 경계는 공 (空) 하다

<peel-그 경계를 상상하다> 전은 현상과 본질에 대한 기반을 흔든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 이다. 이런 깨달음은 불법과 맞닿아 있다. 불교에서 물 자체는 불변하는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인 (因) 과 연 (緣) 에 의해 생겨난 상 (象) 으로 존재한다.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는 다른 하나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겨났다 이내 사라진다.
불변하는 고정된 성품이 없으므로 세계는 공 (空)하다.
사물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없이 하나’라는 이해는 공 (空) , 즉 비어 있음을 뜻한다.
<peel-그 경계를 상상하다> 전은 관객에게 묻는 다. 당신이 세계를 보는 틀이 불변하는 진리냐고, 안과 밖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껍질처럼 세계를 분별하고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으니 집착하여 붙잡을 것도 없다. <peel-그 경계를 상상하다> 전에서 안과 밖, 참과 거짓, 있음과 없음그 경계에서 상상을 펼쳐낸 작품들을 보며 삶을 돌아보며 나를 비워보는 것은 어떨까.

이달의 볼 만한 전시

 

시간을 보다 Seeing Time 展
서울대학교미술관 | 서울
2019.12.26. ~ 2020.03.12. | 문의: 02-880-9504
우리의 삶과 세상의 모습을 담고 있는 시간. 17인의 작가들이 시간을 보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전시다. 찰나의 순간들이 어떻게 예술 작품으로 형상화되었는지 <시간을 보다> 展을 통해 살펴보자.

 

 

홍지윤 展
서드뮤지엄 | 서울
2019.12.21.~2020.02.22. | 문의: 02-232-9112
동양화의 감각적인 화려함을 보여주는 홍지윤 작가의 개인전.
생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꽃이 주된 이미지로 활용된다. 작가는 말하는 ‘성찰하게 하는 조용한 화려함’이 어떻게 구현됐을지 상상하며 전시장을 방문해보자.

 

 

 

베트남 국립역사박물관 소장품 展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2019.03.27. ~ 2020.11.01. | 문의: 02-2077-9000
다양한 아시아 문화를 선보이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베트남 국립역사박물관 소장품을 전시한다. 구석기 시대 발굴품부터 19세기 청동·도자·불교 조각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의 유구한 역사와 다채로운 문화를 만나볼 수 있다.

 

 

 

마인드디자인

한국불교를 한국전통문화로 널리 알릴 수 있도록 고민하는 청년사회적기업으로, 현재 불교계 3대 축제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서울국제불교박람회·붓다아트페스티벌을 6년째 기획·운영하고 있다. 사찰브랜딩, 전시·이벤트, 디자인·상품개발 (마인드리추얼) , 전통미술공예품유통플랫폼 (일상여백) 등 불교문화를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며 ‘전통문화 일상화’라는 소셜미션을 이뤄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