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매일, 기도하고 기도하라] 불교 기도의 시작과 역사적 전개

초기 불전에서 대승 경전까지

2020-01-21     자현스님

강자의 보호에 대한 추구와 기도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나약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으로 파편화된 인 간이 이길 수 있는 동물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취약점은 인류로 하여금 집단 생활의 필연성을 대두시키고, 문명의 발달로까지 연결 짓도록 하는 가장 근원적인 동인이 된다.

유기체의 삶에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또 문명이 견고하지 않던 시절 인간은 돌발적인 다수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요청되는 것이 ‘소극적으로는 모든 삿됨을 물리치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신(神)에의 의지 즉, 강자에 의한 보호’이다. 원시 문화의 제전에서 확인되는 가면과 과장된 춤사위, 또 보디페인팅(혹 문신)이나 주술적인 부분들은 모두 삿됨의 극복과 신의 가호를 요청하는 행위와 몸짓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이란, 원시 인류의 강자에 대한 추구가 집합된 산물이다. 이런 절대 강자의 보호를 통해서, 인간은 위험을 피하고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신을 믿는 종교의 시작이다.
만일 신이 절대적인 존재로 모든 인간을 맞춤식으로 케어해 준다면 기도는 필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신에 대한 관점은 대부분 당시에 존재하던 군주의 형식을 모사하곤 한다. 때문에 신은 군림하는 존재로 이해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이렇다 보니 신에게 개인의 문제를 호소할 방법이 요청되고, 이것이 바로 간절함을 내포하는 기도이다. 즉 기도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일종의 메신저인 셈이다.

신 대신 진리와 명상을 선택한 불교

불교는 신을 절대시하는 종교가 아닌 명상과 수행의 종교다. 이 때문에 불교에도 신은 존재하지만, 중심적인 신앙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초기불교에서 신은 붓다를 존중하고 수호하는 호법신의 역할을 할 뿐이다. 또 붓다는 명상을 통한 인간의 각성을 촉구했기 때문에 신에게 의지하는 구조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아함이나 율장에서 확인되는 붓다의 생애나, 제자들의 가장 진솔한 기록인 장로게와 장로니게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있다.
그러나 초기 자료들에는 붓다를 돌면서 예경하거나 탑을 경배하는 내용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불교는 신을 숭배하는 대신 진리를 최고의 가치로 존중한다. 또 진리를 체득한 분을 이상인격(理想人格)으로 규정한다. 이런 점에서 진리나 진리를 깨쳐 깨달은 분에 대한 깊은 존중 구조가 확인되는 것이다. 즉 대상은 다르지만, 초기불교에도 기원의 대상은 존재했던 셈이다.
실제로 붓다는 스스로를 진리의 발명자가 아닌 발견자로 규정하고, 진리의 항상함을 역설한다. 이는 후일 탑에 유한적인 사리 대신 <연기게송>과 같은 경전이 들어가는 배경이 된다. 즉 불교에는 신을 대신해서 진리와 진리의 체득자에 대한 숭배가 존재하는 것이다.

불교의 종교화와 기도의 시작

부처님의 생애는 붓다의 열반 후 100년 정도부터 점차 체계화되며 정리된다. 이는 교조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숭배가 본격화되며 종교화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제아무리 명상에 입각한 수행 집단이라도 의지처가 없는 것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여기에 진리와 진리의 체득자에 대한 존숭 구조가 초기부터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같은 측면이 점차 체계화되었음을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다.
붓다에 대한 그리움과 존숭은 곧 불교의 기도로 연결된다. 이는 두 가지로 발전하는데, 첫째는 사리탑을 돌고 성지를 참배하는 유형적인 것이며, 둘째는 붓다를 생각하는 정신적인 부분이다. 이중 전자는 점차 예불과 의식으로 체계화되고, 후자는 붓다를 생각하는 염불(念佛)이 된다.
인도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산치나 바르후트 대탑의 구조에는 탑을 예배하는 탑돌이 길인 요도(徼道)가 있다. 또 아잔타나 엘로라 같은 석굴 사원의 구조는 불탑을 중심으로 하는 모종의 예불 가능성을 환기한다. 즉 유형적인 기도의 형태가 존재하는 것이다.
또 기원 전후 서북 인도의 간다라에서 불상이 만들어지면서는 불상을 바라보며 붓다를 상기하는 불상관(佛像觀)이 발전한다. 『반주삼매경』이나 『관무량수경』 등이 이와 같은 불상관과 관련된 경전이다. 염불이란, 붓다를 생각하는 것으로 불상관과 관련이 깊다. 그러나 염불은 중국에서는 정토종의 제2조인 도작(道綽, 562~645)에 의해 재해석되며, 칭명염불 즉 존상의 명호를 부르는 방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불교 기도의 성취 구조와 원리

불교의 예배와 기도 대상은 신이 아닌 불·보살이다. 유신 종교에 있어서 신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기도를 통한 감응 즉, 은총이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는 절대신과는 논리적인 층위가 다른 진리의 완성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어떻게 기도가 성립할 수 있을까?
붓다는 진리의 체득자이자 완성자이다. 이런 점에서 기도를 통해 붓다를 생각하고 염원하는 것은 모든 삿되고 악함을 물리치며, 온갖 길상을 발생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밝음을 가까이하면 어둠은 스스로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붓다는 완전체이기 때문에 주관성이 약하다. 진리에는 친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자와 컴퍼스가 굽은 것을 직접 펴지는 못하지만, 세상이 발라지도록 하는 것은 자와 컴퍼스의 역할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이 때문에 대승불교에서는 보다 실천적이며 의지적인 자비의 존재로 보살을 요청하게 된다. 보살은 진리의 추구자인 동시에 자비의 실천자이다. 그
러므로 대승의 기도에는 붓다보다도 관세음이나 지장보살과 같은 보살을 찾는 경우가 더 많게 된다. 즉 붓다가 이상이자 표준이라면, 보살은 실질적인 구
원자인 셈이다.

붓다에 대한 기도는 진리에 다가가려는 중생의 노력이다. 이로 인해 파사현정(破邪顯正)하게 되는 것이 곧 기도의 가호와 가피가 된다. 보살을 찾는 기도는 실질적인 문제의 해결을 간절하게 요청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직접적인 구제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보살 기도의 성취와 가피가 된다.
 

만일(萬日) 기도와 현대 사회의 기도

조선불교의 특징은 선불교 중심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큰 사찰에는 선원과 더불어 선으로 연결되는 기본 교육 기관인 강원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외에도 일부 사찰에는 염불원에 해당하는 만일도 있다.
만일은 염불기도를 10,000일(27.4년) 동안 봉행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기간에 스님들은 순번을 정해, 24시간 돌아가며 염불기도에 매진한다. 기도 기간이 27년을 넘기 때문에 회향을 못 보고 임종하는 분들도 발생하는데, 그래도 기도는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며 계속 진행된다. 진리와 불·보살님을 향한 간절한 기원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불교의 일상 의례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매일 사찰에서는 새벽과 저녁에 기도가 진행되고, 사시마지라고 해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기도를 하게 된다. 이외에도 낮 2시에 추가로 기도를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하루 4번 한다고 해서 4분정근이라고 한다. 기도는 나약한 인간의 행복 추구에 대한 기원을 담은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라고 할 수있다. 불교는 기도에서 유신론적 종교와는 다른 진리를 중심으로 하는 해법을 제시했다. 즉 신의 은총이 아닌 스스로가 맑아지는 방식을 통해 불·보살의 가피가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진리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 기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