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 자연과 경전

2020-01-06     홍신선

햇수로는 벌써 다섯 해째에 접어든다. 명색 귀촌을 한다고 나는 5년 전 이 산골 마을에 내려왔다. 그것도 선대 조고(祖考)들 묘하에다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오래전 나는 신도시 개발로 고향의 가산 일체를 수용당했다. 그 탓에 선대들을 이장해야 했고 나 역시 이곳으로 우거(寓居)를 옮겨온 것이다. 내 이런 행태를 지켜본 지인들 반응은 각각이었다.
“그 궁벽한 곳에서 혼자 버틸 수 있을 거 같애?” 하는 염려 아닌 염려를 하는 축이 있는가 하면, “공기 좋고 물 맑은 데서 산다는 건 누구나의 로망인데…….”라고 적이 선망에 찬 소리를 건네는 치들도 있었다.
막상 이 산골에 와 만난 현실은 어떠했을까. 그간 내가 이들 앞에 둘러댄 말은 이런 것이었다. 대학 선생 오래 한 탓에 혼자 노는 일에는 누구보다 이골이나 있다, 또 청정한 물과 공기라니, 그건 현실과 동떨어진 막연한 통념 아니냐고 했던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현지에서 만난 실상은 이 두 가지가 모두 아니었다.
이 마을에 와 살며 나는 많은 인연을 지었다. 마을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지인을 새롭게 사귄 건 아니었다. 대신 이제는 오갈 데 없이 내 식솔의 반열에 오른 개와 고양이, 그리고 화목류나 잔디 같은 뭇 대중들과 연을 맺은 것이다. 특히 고양이와는 사연이 좀 있다. 갓 귀촌했을 때 길고양이 한 마리가 아는 척을 했다. 먹을 것을 몇 차례 마련해주자 그놈은 야옹거리며 집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더니 어느 날은 죽은 꾀꼬리 한 마리를 문 앞에다 물어다 놓는 게 아닌가. 언젠가는 쥐들도 보란 듯 잡아다 놓았다. 알고 보니 이는 고양이가 제 나름 바칠 수 있는 최상의 공물(供物)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양이는 무리를 지어 살지 않았다. 철저하게 각 개체들은 혼자만의 생활을 꾸렸다. 이들은 다산(多産)이면서도 성장기가 지나면 어김없이 각자 흩어져 살 마련이던 것이다. 곧 각자의 영역을 만들어 외홀로 사는 것이다. 문제는 서로의 영역을 두고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곤 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발정이라도 나면 수놈들은 암컷을 두고 생사를 걸고 싸웠다. 상대가 죽어야 그 싸움은 끝이 났다. 결국 수컷 고양이의 평균 생존 기간은 불과 한두 해였다. 싸움에 져 상처가 깊으면 이들은 으늑한 곳을 찾아 누구도 모르게 숨을 거둔다.
죽는 게 어디 들고양이뿐이겠는가. 겨울날 먹을 것이 없어진 고라니는 새벽녘 산 아래 찻길에 가 주저앉는다. 그리고 오가는 차에 치여 눈을 감는다. 일종의 자살 행각인 셈이다. 동네 개들도 어느 날 보이지 않으면 그는 이미 이 세상을 등진 터이다. 꽃나무도 이런저런 잡초도 모두 나고 죽는다. 그러고 보면 죽고 사는 게, 나고 죽는 일이 예서는 일상의 하나이지 않은가. 내가 이 마을에 와 만난 자연의 속내는 그런 것이었다. 말하자면 자연계는 생로병사, 죽살이의 축약판이었다. 여기 나고 죽는 일 앞에서 인간은 고양이나 고라니, 푸나무들과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우리네 삶도 동식물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그런 생각에 묻히다 보면 결국 인간도 나를 낮춰 겸손해야 할 마련이 아닌가 싶었다. 나를 낮추고 개나 고양이, 푸나무들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도 사람과 다를 게 없는 삶이, 아니 삶의 비의(秘意)가 차고 넘쳤다. 그래서 이 산골 마을의 자연이 때때로 독해할 경전(經典) 같다는 생각도 한다. 그간 인간사 경험들에 비추어 나는 이들 경전을 읽고 독해하고 싶다. 그 옛날 소동파가 그랬다던가. “바람 소리 물소리 모두가 부처님 설법 아닌 게 있는가.” 이런 언술이 왜 나왔는지 나는 이곳에 와 살아보니 알 것 같았다. 산골 마을이지만 여기도 소규모 공장이 들어와 있다. 이 지역 곳곳이 그렇다. 그러다 보니 맑은 공기 맑은 물은 아예 기대를 접어야 한다. 그래도 바람소리 물소리가 때때로 귀를 두드려 준다. 나는 그 설법을 듣는 망외의 분복을 누리고 산다.

홍신선
시인, 전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전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원장. 월간 「시문학」 시 추천으로 등단(1965년). 시집 『서벽당집』, 『겨울섬』,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우연을 점 찍다』. 『삶의 옹이』, 『직박구리의 봄노래』, 연작시집 『마음경』 등 다수가 있다. 현대문학상, 불교문학상, 한국시협상, 김달진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노작문학상, 문덕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글.
홍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