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한 물건] 빈 김치통과 와인 병

2020-01-03     백가흠

나는 가진 게 너무 많다, 생각했다. 내가 사는 집 안에는 항상 뭐가 많았다. 예전 살던 아파트는 사방 모든 벽에 책장이 서 있었다. 흔한 거실의 풍경은 책 때문에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물론 집에는 등 편하게 기댈 소파나 비어 있는 벽이 없었다. 못 버리는 책이 집안을 어지럽고 버겁게 만들었다. 읽지도 않는 책을 왜 그리 쌓아두고 사나,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마음만 그랬다. 어떤 날은 마음을 굳게 먹고 보지 않는 책을 버릴 셈으로 정리를 시작한다. 하지만 의지는 꺾이고 그새 마음이 누그러져 다시 베란다나 책장 틈틈이 책 놓을 공간을 마련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뭔가를 버린다는 것은 기억을 지우는 일이다. 물건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뭐든 잊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책 말고 애지중지하던 물건이 뭐가 있나 떠올려 봐도, 그리 뭐가 많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아니,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를 하지도 못 하는 나를 다시 발견한다. 수백 장의 음반들, 35mm 카메라 서너 개와 구형 폴라로이드카메라 몇 개, 공항에 들를 때마다 샀던 몰트위스키 몇 병, 몇 개의 낚싯대와 릴, 손목시계 몇 개, 안경 몇 개, 소설집 인세로 산 그림 석 점, 영국에서 사서 타고 다녔던 자전거, 야구글러브와 배트, 그리고 책상, 책상을 생각하자 방금 나열한 것들이 내가 애지중지하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하게 나는 말한 물건들이 없어도, 혹은 당장 없어져도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 곁에 있으니까 있는 것일 뿐. 사랑하는 감정 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물건이란 필요할 때 없으면 조금 불편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하다. 나는 왜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한 물건들과 사랑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냥 가지고만 있는 물건과 불화하는 느낌마저 든다.

 

나는 물욕이라곤, 없다고 믿을 때가 있었다. 왜냐하면 사놓고 입지 않은 옷이라든가, 한 번도 쓰지 않고 아끼기만 하는 펜이라든가. 책 같은 것을 굳이 지키기 위해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는 아끼는 물건이 없었다. 그러니 물건에 대한 미련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말했듯 그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작년 봄에 이사를 했다. 서울 근교를 떠나 대구로 오게 되었다. 이제 별일이 없다면 서울에서 살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떠나온 아파트에서 십 년을 살았다. 켜켜이 쌓인 시간을 그곳에 두고, 버리고 나왔다. 이사를 하며 나는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물건을 버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사 온 지 2년여가 지난 요즘, 이게 왜 여기 있을까 싶은 물건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이건 어떻게 나를 이곳까지 따라온 걸까. 이 물건들이 나를 사랑한 것이어서 따라 온 것이 아닐런가.요즘 내가 집착하는 물건은 가전제품들이다. 공기청정기, 청소기, 스타일러, 스팀다리미, 와인셀러, 무선 헤드폰 등등. 이제 덩치도 커지고 제법 값도 나가는 물건에 대한 탐욕이 늘어났다. 그런 욕심으로 나는 점점 망하는 길로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버리지 못하면 망가진다, 믿는데 생각처럼 단념이 잘 되지 않는다. 필요 없는데 필요하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꼴이다. 냉장고를 열면 미처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이 한가득 쌓여 있다. 언제 이것이 이곳에 들어왔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는 망각의 시간이 냉장고 안에서 썩고 있다. 가끔 집에 들르는 어머니는 때마다 그런 나를 타박한다. 음식 아까운 것은 둘째 치고 바빠서 끼니를 거르는 생활이 냉장고만 열면 뻔히 들키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엄마가 보낸 반찬을 버리지 맙시다’라는 글을 쓴 적도 있었다. 마음만 그렇지 여전히 나는 바뀐 것이 없다. 어머니의 반찬은 왜 버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 건가, 생각의 끝이 거기에 머물면 금세 슬퍼진다. 근래에 부모님이 집에 다녀가셨는데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김치냉장고 안이 싹 다 비워져 있었다. 그 풍경은 어떤 경이로운 마음까지 들기도 했는데, 어떤 해결불가한 일이 깔끔하게 정리된, 엄마의 경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지 못하고 계속 쌓아만 두어, 김치냉장고 안에서 숙성의 숙성을 거친 김치들이 일순 모두 사라진 자리에 애틋함만 남았다. 부모님이 고향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 휑한 냉장고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젠 사라지고 잊혀 복원할 수 없는 서로의 시간을 확인하는 것 같아 이상하리만치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뭐가 없어지고 버려졌는지조차 나는 알지 못한 채 켜켜이 쌓였던 시간의 기억이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김치를 비우고 다시 김치를 담가 보내기 위해 빈 김치통을 들고 고향으로 향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아련하다. “엄마, 이제 이런 거 좀 보내지 마요.” 퉁명스럽게 타박만 늘어놓는 철없는 중년의 아들을 바라보는 늙은 부모의 시선이 애잔하다. 살며 이런 일이 반복되어지는 것이 또 잊히는 것이 삶의 진정이라고 한다면 너무 슬픈 일이 아닌가.

아버지는 몇 해 전부터 새로운 취미를 하나 시작했는데, 그것은 식초를 만드는 일이다. 술을 전혀 하지 않는 아버지는 갖가지 재료, 보통은 술을 담그는 재료로 식초를 만든다. 처음에는 감으로 시작했는데, 사과, 현미, 매실 등 갖가지 열매를 가지고 식초를 빚는다. 발효 시간이나 비율을 잘못 맞추면 식초는 곧 술이 되어버린다. 망하지 않기 위해 발효의 과정을 아버지는 식물을 가꾸듯 정성스럽게 만들어간다.
그런데 좋은 식초를 만들어도 그것을 담을 병이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술이나 와인 같은 것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 집에 들른 이후 아버지는 내 와인 병을 탐내기 시작했다. 와인 냉장고에 꽉꽉 들어찬 와인 자체에는 관심이 전혀 없고 라벨이나 모양이 예쁜 병을 아버지는 탐냈다.
“이걸 다 마시고 달라고 하긴 그렇고, 병은 갖고 싶고 그렇다잉.” 아버지가 와인을 꺼내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도 빈 병을 소중한 물건으로 다루는 아버지의 품성이 좀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미처 치우지 못한 빈 병 몇 병을 빈 김치통 안에 정성스럽게 담았다.
“술은 많이 마시지는 말고, 혹시 먹게 되면 병을 좀 잘 챙겨 둬라.”
아버지는 장난감을 선물받은 아이처럼 좋아하며 내게 말했다. 청탁을 받고 내게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물건은 무엇인가,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엄마의 빈 김치통과 아버지의 와인 병이 지금의 내겐 가장
소중하고 값지게 여겨지는 것이 아닌가. 마음이 쓸쓸하면서도 포근한 감정이 일어서 부모님에게 전화를 했다. 이번에 엄마가 한 김장김치가 너무 맛있다고 음식 솜씨를 칭찬도 하고, 아버지에겐 식초가 잘 익어가고 있는지, 너무 발효되어서 술이 되면 내게 보내 달라고 농담도 전하는 아침이다.

 

백가흠
1974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광어」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우리 시대의 극단적인 정신세계와 불편한 현실을 아이러니와 판타지로 녹여내는 개성적인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 『조대리의 트렁크』, 『힌트는 도련님』, 『사십사』와 장편 소설 『나프탈렌』, 『향』, 『마담뺑덕』, 여행 소설 『그리스는 달랐다』가 있다. 현재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