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여성을 말하다] 불교 내 성평등 제고를 위한 몇 가지 제언

2019-12-04     이혜숙

금번 기획 특집 ‘불교, 여성을 말하다’라는 타이틀을 보니, 필자는 엉뚱하게도 ‘불교, 남성을 말하다’라는 기획 주제가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굳이 여성과 남성을 나눠서 생각하게 되는 경우,
언제·어디서·누가·왜 그러는 것인가. 이런 방식으로 따져서 생각하기 전에 우선 불자라면 누구나 알 것 같은 『유마경』의 법문 일부분을 아래에 인용하고 그 가르침에 대한 우리들 각자의 이해와 믿음이 어떠한지를 돌아보기로 한다.

(법문을 잘하는 천녀에게) 사리불이 말했다. “그대는 왜 여인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천녀가 대답했다. “저는 지난 12년 동안 (변치 않는) 여인의 상(相)을 찾아보았지만 찾아낼 수가 없었는데, 무엇을 바꾼단 말입니까? 비유하자면 마치 마술사가 마술로 허깨비 여인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허깨비에게 ‘왜 여인의 몸을 바꾸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사람의 물음이 옳은 것일까요?” …(중략)… 천녀는 즉시에 신통력으로 사리불을 천녀와 같이 바꾸고, 천녀 자신은 사리불과 같은 모습으로 몸을 바꾸고 물었다. “왜 여인의 몸을 바꾸지 않으십니까?” … “사리불이여, 만약 당신께서 그 여인의 몸을 바꿀 수가 있게 되면, 모든 여인들도 몸을 바꿀 수가 있게 됩니다. 사리불께서 여인이 아니지만 여인의 몸을 나타내고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여인들도 이와 같아서 여인의 몸을 나타내고 있지만 여인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일체제법은 ‘남자도 아니며 여자도 아니다’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천녀는 곧 신통력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사리불의 몸은 본래와 같이 되었다. 천녀는 사리불에게 물었다. “여인의 몸의 특성[女身色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사리불이 답하였다. “여인의 몸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닙니다.” (『유마힐소설경』 제7품, 66-67쪽)

‘여성·남성이란 본래 없는 것이다’는 위의 법문을 우리가 불자로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불교계는 어떻게 받아들여 왔는가. 법문을 개념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법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어떠하며 실생활에서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세상 모든 것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고 몸[色]을 포함한 오온(五蘊)이 공하다는 것이 불교의 근간이므로, 불자라면 무엇보다도 그 가르침을 믿어야 하고 일상생활이 그 가르침대로 수행(遂行)되어야 할 것이다. 말로는 누구나 쉽게 외워서 전할 수 있는 교리 해석이지만, 실생활에서 우리가 과연 그대로 살고 있는지를 수시로 성찰해야 한다. 일찍이 불교 승가에서 이른바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등으로 성(性) 과 출가자·재가자를 구별하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교단 운영상 편의를 위한 일종의 분류 기호일 뿐이다. 승가는 본래 평등한 수행 공동체라고 하므로, 그 하위집단(Sub-Group)의 명칭으로써 차별을 불러일으킬 리가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평등한 가르침과 달리, 실제의 승가에서는 구성원들 사이의 관습적인 상호작용과 역할 관계에 따라 집단별 명분(名分)이 담긴 고정 관념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불교계에도 남성인 불자와 여성인 불자의 정체성과 성 역할(Gender)이 마치 고정된 ‘그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그것’이 불교에 부합하는지를 점검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과제다.

그런데 한편으로 불교의 경율론(經律論)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평등한 성역할(Gender)을 주장하는 일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우리에게 당장 더 중요한 것은 현실 불교계의 성평등 수준을 제대로 분석하고 ‘불교적으로 합당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속적인 점검과 아울러 전환적인 실행력이 필요한 이 과업의 책임자로서, 필자는 누구보다도 바로 여성 불자 ‐ 비구니·우바이 등 ‐ 개개인에 주목한다. 성 역할의 평등성을 논할 때, 사회적·제도적 보완책을 제시하고 권력 주체들의 인식 전환을 촉구하는 것이 흔한 일이면서 필요한 방향이지만, 여기서는 성 역할 평등성에 대한 불자의 자각부터 강조하려 한다.
오늘날 한국의 여성 불자는 불교에 입문하기 전부터 공적·사적인 교육 과정들을 통해서 평등한 성 역할을 대체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불교의 상의상관하는 연기법(緣起法)·오온개공(五蘊皆空) 등의 법문을 학습하고 수행(修行)한다면, 성 역할도 고정된 것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여러 가지 현상들[諸法] 가운데 하나임을 통찰하게 될 것이다. 그 통찰의 결과에 따라서 여성 불자 스스로가 인간 평등, 양성 평등을 위한 구체적인 전략과 추진력을 가지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불교 공동체 안에서 무엇이 차별인지를 제대로 알고, 차별로 왜곡된 현상을 바로잡는 실천 수행력이 증진된다면, 불교계 바깥의 사회생활 관계에서도 크게 기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부끄럽지만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반성하자면, 지난 수십 년동안 참여했던 불교 신행 단체들 안에서 성 역할 고정관념이나 성평등 인식의 수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 말은, 필자가 심층 조사를 하였거나 공식적인 성평등 척도를 사용해서 평가한 결론이 아니고, 단체 운영이나 회합이 있을 때 겉으로 드러난 모습들을 지적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신행 단체들에서 함께한 도반들의 학력, 사회생활 경력, 직업 등이 소위 지식인층임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인 성차별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예컨대 우리 단체의 집행부에는 여성이 절대 부족하였고, 대중 행사에서 필요한 공양 도우미는 남성이 절대 부족하였다. 서로가 회원으로 가까워지기 전에는 오히려 사회적 체면을 차리는 듯이 바람직성 태도가 보이지만, 해묵은 도반들 사이에서는 성차별적 언행에도 주의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서로가 친숙하다고 방심을 하기 때문에, 감춰져 있던 성차별적 의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여타 불교단체들이 나 사찰의 경우는 어떤 상황인지를 필자가 자세하게 모르기는 하지만, 불교적으로 합당할 것 같은 성역할 평등성을 재고하기 위해서 다음의 몇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조계종단 산하 사찰 운영위원회에서부터 남녀 위원의 구성비를 5:5로 안배하는 일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사찰에 소속한 여성 불자의 공공성 책임감이 먼저 정립되어야 한다. 불교 신행이 자기와 가족친지의 복락(福樂)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요익(饒益)을 위해서 회향되도록, 사찰 운영이나 불
교계 단체 활동에서 봉사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둘째, ‘남성 불자’라는 호칭은 우리에게 낯설고 ‘여성 불자’가 흔히 거론되어 왔지만, 그 둘은 서로를 말미암은 상대적 명칭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성 불자가 종래의 ‘여성 불자’라는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평등한 성품을 여법(如法)하게 신뢰해야만 한다. 자기가 자신의 본래평등을 믿
지 못하면, 어느 누가 그 평등성을 보장하겠는가.
셋째, 여성 불자들의 성 역할 평등성이 확장되어감에 따라서 더 다양한 영역에서 더 많은 책무들이 주어질 것이다. 그때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평소의 크고 작은 사회생활 관계에서부터 유능하고 효과적인 역할 훈련이 필요하다. 사찰이나 불교 단체에 참여하는 활동의 경험이 바로 그러한
역량 훈련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이혜숙
금강대 불교문화학부 초빙교수.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이화여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 석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 종교계의 정치적 이념 성향 연구를 위한 제언」, 「시민사회 공론장 확립을 위한 불교계 역할」, 「불교계 사회복지사 특화 교육을 위한 기초 연구」 등의 논문을 집필했다.

 

글.
이혜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