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살며 사랑하며] 오리털 파카

2019-12-04     김동률

이른 아침 헐레벌떡 나서는 내게 아내가 묻는다. 강의가 없는데 왜 이리 서두르느냐고. 맞다. 오늘은 강의가 없다. 그래도 기차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한다. 아내는 당연히 학교에 가는 줄 안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연구실로 가는 척하고 서울역으로 냅다 달린다.

매달 하루 당일치기로 고향에 다녀온 지 벌써 삼 년이 다 돼간다. 아내는 물론 가족 누구도 모른다. 고향에 꿀단지가 있거나 숨겨둔 여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향에는 어머니가 계신다. 팔십 평생을 해로했던 아버지가 삼 년 전 돌아가신 뒤 홀로 계신다.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하루하루가 예전 같지 않다. 집에는 늘 적막감만 감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반년쯤 지났을까? 나는 매달 하루 고향 집을 찾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특히 아내가 알까 봐 공을 들였다. 고부간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아내의 경우 교수인 나와 달리 평일 시간 내기가 녹록지 않다. 마음이 선한 아내가 같이 가지 못함으로 인해 행여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혼자만 다녀오기로 했다. 기껏해야 옆에서 과거 추억담을 소재로 한나절 말동무하고 점심을 같이하는 일정에 아내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작용했다.

그날 어머니의 컨디션이 좋으면 남지장사로 나들이 간다. 남지장사에는 조부모를 비롯한 선대 조상들이 모셔져 있다. 추억이 새록새록 하다. 초파일 할머니, 어머니 손을 잡고 다니던 절이다. 친하게 지내던 비구니 스님이 주석했던 뒤쪽 청련암은 이제 텅 비었다. 단청은 빛바래고 대웅전 처마 밑에는 거미줄만 가득하다. 매달 찾아가는 고향 집도 하루가 다르게 남루해 간다. 정원의 잔디밭에는 잡초가 차고 들어와 앉았다. 가지치기가 안 된 담장 위 덩굴장미는 흉물스럽게 뻗쳐 있다. 성탄 트리로 사용했던 마당 아기 전나무는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었다. 황금빛 은행나무는 이제 어른 몸통만큼이나 굵어졌다. 어릴 적 내 방 천장에는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었고 아침마다 교복을 입고 한껏 폼을 내며 비춰보던 거울은 여기저기 벗겨져 흉한 모습이다. 그 많은 변화 가운데 버티고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집과 함께 늙어가는 장롱 속 오리털 파카다. 솜털이 비집어 나올 만큼 낡은 옷이다. 어머니는 이 옷만큼은 무슨 신줏단지 모시듯 고이 간직하고 계신다. 옷의 역사는 삼십 년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옷에 대한 기억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지금이야 오리털은 물론 보온성이 더 좋다는 거위 털 옷까지 넘치는 세상이다. 하지만 삼십여 년 전에는 오리털로 만든 옷 자체가 없었다. 80년대 어느 겨울, 나는 우연히 동대문 시장을 지나가게 되었고 상점 주인으로부터 색다른 옷을 권유 받았다. 오리털 파카였다. 오리털로 옷을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은 그 시절, 주인은 보세품임을 유난히 강조했다. 서양 부자들이 입는 옷인데 운 좋게 몇 개 들어 왔다고 했다. 엄청 따뜻해 눈 속에 뒹굴어도 땀이 난다는 등 허풍까지 곁들여 입어 보라고 권한다. 입어 보니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따뜻했다. 그날 가진 돈이 많지 않았던 나는 계약금 조로 얼마간을 건네주고 팔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튿날 그동안 과외해서 꼬불쳐 놓은 돈을 몽땅 들고 가서 구입해 고향의 어머니에게 부쳐 드렸다. 빨간색 여성용이었던 것이다. 며칠 뒤 어머니가 들뜬 음성으로 전화했다. 세상에 이렇게 따듯한 옷은 처음 봤다는 놀람의 목소리였다. 그날 이후 해마다 겨울이 오면 어머니는 늘 아들이 사준 오리털을 입고 나들이 가셨다. 친구분들께 자랑하고 싶으신 것이다. 오리털 옷이 일반에 널리 보급되기 전 서너 해 동안 어머니는 겨울이 되면 오리털 파카만 입으셨다.

그러나 그 오리털 파카는 이제 너무 낡았고 집안에 오리털, 거위 털 옷들도 넘친다. 하지만 낡은 그 옛날 오리털 파카는 서랍장에 고이 모셔져 있다. 버리시라는 내 말에 어머니는 펄쩍 뛴다.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이 곤고한 시절, 과외 삯으로 사서 보내온 그날을 기억하고 싶으신 게다. 올해도 다 갔다. 세월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얼마 남지 않으면 더 빨리 돌아간다. 거리를 지나다가 빨간 오리털 점퍼만 보면 장롱 속 오리털 파카가 생각난다. 어머니는 이제 많이 늙으셨고 난생처음 본 오리털 옷에 신기해하던 그날의 청년도 어느새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이 되었다. 어머니와 헤어지고 탄 기차의 어두운 창에 비친 내 모습에 순간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가슴이 짠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 온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돌아설 때에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아득한 시절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나들이 가면서 흥얼거리던 노래다. 거리의 성탄 점멸등이 오늘따라 더욱 따뜻하게 느껴진다. 메리 크리스마스!

 

김동률
서강대 기술경영대학원(MOT) 교수. 고려대를 졸업하고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University of South Carolina) 저널리즘스쿨에서 매체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에 앞서 경향신문 견습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하여 10년간 취재 기자로 일했다. 연세대, 이화여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채널A, MBN, KTV에서 시사프로그램 앵커로 활약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KBS 경영평가위원, YTN 시청자 위원, MBC, SBS 시청자위원회 부위원장, 공정거래위원회 자문교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특별심의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밖에 정부부처 평가위원, 공기업 경영평가위원, 동아일보 독자위원, 영화진흥위원회 비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 『신문경영론 : MBA 저널리즘』이 있으며 역서로 『철학자들의 언론 강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