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 개론] 번뇌를 지혜롭게 대하는 법

2019-12-03     장휘옥, 김사업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는 컴퓨터가 한 대 있습니다. 이 컴퓨터는 멈추는 일이 없이 늘 작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뭔가를 말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나의 내면에 있는 이 컴퓨터에 그대로 저장됩니다. 예를 들어 얼굴로 짜증을 내거나 짜증 섞인 말이나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은 틈을 두지 않고 모두 이 컴퓨터에 입력되어 저장되는 것입니다. 적당한 상황이 도래하면, 이 컴퓨터는 입력되어 있던 짜증을 나의 행동이나 말과 생각으로 다시 토해 냅니다. 짜증을 토해 내지 말라고 해도 이 컴퓨터는 저장된 짜증이 있고 짜증 낼 상황만 갖추어지면 아랑곳없이 짜증을 발산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짜증을 내고 싶지 않은데도 불쑥 짜증을 내고 맙니다. 지금 이 컴퓨터에 의해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남이 보든 말든, 자신이 의식하든 못 하든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다. 포도는 포도씨를 남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모든 행위는 그냥 사라지지 않고 나의 내면에 그 씨앗을 남긴다. 착한 행위는 착한 씨앗을, 악한 행위는 악한 씨앗을 남긴다. 거짓말을 하는 순간 그 씨앗은 나의 내면에 남는다. 한 번 거짓말하면 하나의 거짓말 씨앗이, 한 번 더 하면 또 하나의 씨앗이 추가된다. 이 글에서 ‘행위’라는 용어는 신체적 행동·말·생각을 포괄하는 뜻으로 사용한다. 즉 신·구·의 3업을 총칭한다. 반면 ‘행동’이라는 용어는 신체적 행동, 즉 신업(身業)만 가리킨다는 것을 유의해 주기 바란다. 포도가 남긴 씨앗에 적당한 온도나 양분 등의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싹이 트고 포도가 열린다. 마찬가지로 착한 행위가 남긴 씨앗에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나는 또다시 착한 행위를 하거나 좋은 과보를 받는다. 또한 악한 행위가 남긴 씨앗에 적당한 조건이 도래하면 나는 다시 악한 행위를 할 수 있고 괴로운 과보를 받는다.
우울할 때 담배를 한 대 피웠더니 기분이 나아졌다. 이 과정에서 일어났던 모든 행동과 느낌과 생각이 씨앗으로 남았다. 또다시 우울한 기분이 들면 나는 곧 담배를 찾게 된다. 우울한 기분이라는 조건이 형성되자 이전에 같은 상황에서 흡연하고서 남겨졌던 씨앗이 즉각 담배를 찾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담배를 서너 개비 연달아 피웠다면 그만큼의 씨앗이 또 남는다. 흡연의 씨앗이 이렇게 자꾸 쌓이다가 때가 되면 건강 악화라는 과보를 가져오게 된다. 행위는 씨앗을 어디에 남길까? 그 씨앗은 사후에도 남아서 보존될까, 씨앗의 소멸은 불가능한 것일까? 씨앗이 소멸되고 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해 세밀히 밝히고 있는 것이 대승불교의 유식(唯識)사상이다. 물론 이 부분은 유식사상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 부분에서 유식을 능가할 사상은 없을 것 같다. 유식사상은 공(空)사상과 함께 대승불교의 양대 핵심 교리다. 화엄, 천태, 밀교 등 다양한 대승불교 사상은 공과 유식을 두 기둥으로 삼아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도의 고승들은 깊은 삼매의 체험을 바탕으로 연기와 공을 새로운 각도에서 고찰하여, 사상과 실천 양면을 아우르는 뛰어난 대승적 체계를 완성했다. 이 체계가 바로 유식이다. 유식은 인도를 넘어 아시아 전체의 정신문화에 실로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신라 시대의 유명한 원효(617~686) 대사가 두 번에 걸쳐 중국으로 유학 가려 했던 것도 바로 이 유식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행위가 남기는 씨앗을 유식은 ‘종자’라고 부른다. 이 종자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마음에 남겨져 보존된다. 남겨진 종자는 견도(見道)라는 수행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소멸되지 않는다. 따라서 높은 수행단계에 이르지 않는 한, 아뢰야식에 남겨진 종자는 사후에도 소멸하지 않는다.
우리 개개인의 마음은 8가지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근본을 이루는 마음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마음을 불교에서는 ‘식(識)’이라고도 부른다. 아뢰야식은 우리 마음의 뿌리에 해당하며 일종의 무의식에 가깝다. 땅속에 있는 뿌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듯이, 아뢰야식은 그것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 깊은 곳에서 미세하게 작용한다. 아뢰야식은 한순간도 멈추는 일 없이 늘 활동한다. 아뢰야식에서 ‘아뢰야’란 산스끄리뜨 ‘알라야(ālaya)’를 발음 그대로 한자로 옮긴 음역어이다. 알라야에는 곳간, 집착 등의 의미가 있다. 세계 최고봉들이 즐비한 히말라야산맥, ‘히말라야’는 ‘히마(hima)’와 ‘알라야’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된 합성어다. 여기서 히마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雪)’, 알라야는 ‘곳간’을 의미하므로, 히말라야는 ‘눈의 곳간’, ‘눈이 쌓여 있는 곳’을 뜻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히말라야를 설산(雪山)이라고 불렀다. 일년 내내 눈을 머리에 인 산들이 늘어서 있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뢰야식은 행위가 남기는 종자를 하나도 유실됨이 없이 저장하고 보존하는, 곳간과 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곳간이란 의미를 갖는 아뢰야를 자신의 이름으로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뢰야식이 종자를 보존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아뢰야식은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을 하고, 윤회의 주체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는 종자 보존과 관련된 아뢰 야식의 측면만 다루기로 한다.

10년 전에 했던 욕 한마디의 위력
행위가 종자로 남겨졌다가 어떻게 또다시 같은 성질의 행위나 과보로 나타는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40대 회사원 A씨는 건강을 위해 조깅을 시작했다. 첫날은 30분에 3킬로미터를 달렸다. 매일 빠짐없이 조깅한 결과, 한 달 후 그는 같은 시간에 4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었다. 그런데 달리는 행동이 그것으로 끝날 뿐 아무런 영향력도 남기지 않는다면 아무도 건강 증진을 위해 조깅을 하지 않을뿐더러, A씨는 한 달 후가 되어도 달리는 속력이 전혀 빨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달릴 때마다 뭔가의 영향력이 남았기 때문에 A씨는 심폐기능과 근력 등이 좋아져 속력이 빨라진 것이다. 달릴 때마다 남는 어떤 영향력 내지 씨앗, 유식은 그것을 종자라고 부르며, 아뢰야식에 보존된다고 본다. 조깅뿐만 아니라 몸으로 하는 우리들의 모든 행동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종자를 행위자에게 정확히 남긴다. 한 번의 행동은 한 번만
큼의 종자를, 두 번의 행동은 그만큼의 종자를 행위자 본인의 아뢰야식에 남긴다. 한석봉의 명필, 그 어머니의 떡 써는 솜씨는 그 종자들이 쌓이고 쌓인 결과다.
어느 주부와 관련된 이야기다. 지금은 조신하지만 여고 시절에는 불량기가 좀 있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욕 섞인 말을 더러 했었는데 결혼하고부터는 욕이라고는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시어머니와 단둘이 앉아 마늘을 까고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은근히 친정 흉을 보는 것이 아닌가. 이 주부는 못 들은 척하고 참다가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들어서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욕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10년 전 여고 시절 친구들과 깔깔대며 했던 바로 그 욕이었다.
10년 전 무심코 했던 욕 한마디가 종자로 남아 없어지지 않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던 것이다. 몸으로 하는 행동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말도 의식하든 하지 않든 본인에게 종자를 남긴다. 말이 남긴 종자는 이렇게 10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가 봄이 되면 씨앗에서 싹이 돋아나듯이 때가 되면 형체를 갖추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영어 단어 외울 때를 생각해 보자. 한 번 외울 때가 더 잘 외워지던가? 열 번 외울 때가 더 잘 외워지던가? 물론 열 번 외울 때다. 외운다는 것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생각이 자신의 종자를 남기지 않는다면 아무리 외워도 외워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외국어를 익히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늘 타는 버스가 몇 번인지 기억할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생각이 남긴 종자도 신체적 행동이나 말이 남기는 종자처럼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남아 있다가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생각으로 떠오른다. 또한 생각도 한 만큼 그 종자가 남는다. 때문에 욕심을 낼수록 만족이 아니라 욕심만 커져 있으며, 미워하기 시작하면 증오는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게 된다. 신체적 행동과 말뿐만 아니라, 무심코 하는 생각도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세 가지 중의 어느 하나다. 신체적 행동이거나, 말 또는 생각이다. 즉 신업(身業)이거나 구업(口業) 또는 의업(意業)이다. 앞에서 살펴본 세 가지 예, 즉 조깅과 욕설, 영어 단어 외우기는 이 세 행위 각각에 해당하는 예였다. 이미 확인한 대로 이 세 행위, 다시 말해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다. 아무리 거부해도 반드시 그 종자를 아뢰야식에 남기고 사라진다. 마치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듯이, 종자는 행위의 뒤를 따른다. 이처럼 누구도 행위가 남기는 종자를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종자는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가 때가 되면 그에 상응한 결과를 가져온다. 얼굴에는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속으로는 상대를 욕하면서 대화할 때, 상대는 속지만 자신의 아뢰야식을 속일 수는 없다. 욕 종자는 아뢰야식에 고스란히 남는다. 이 종자로 인해 기회가 되면 나는 또다시 악담을 하게 되고 괴로움의 과보도 받는다.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과 그 대처법
여기에서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내면의 컴퓨터 문제로 돌아가 보자. 각자에게는 항상 작동하고 있는 내면의 컴퓨터가 한 대씩 있다고 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뭔가를 말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나의 내면에 있는 이 컴퓨터에 그대로 저장되었다가, 적당한 상황이 도래하면 이 컴퓨터는 저장되어 있던 그것을 나의 행동이나 말과 생각으로 다시 토해낸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이 내면의 컴퓨터는 바로 아뢰야식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지금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는 연기(緣起)이다. 연기란 ‘조건이 갖추어지면 생겨났다가, 조건이 소멸하면 함께 소멸한다’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조건이 갖추어졌기에 생겨났으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조건을 불교에서는 인연(因緣)이라고 한다. 지금 짜증이 일어나는 것은 연기에 의한 것이다. 연기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짜증이 일어날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짜증은 일어나는 것이다. 그 조건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에게 짜증의 종자가 있었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에게만큼은 짜증을 낼 만한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문제는 짜증을 내면 낼수록 본인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은 나빠지고 주위 사람과의 관계 악화 초래는 물론 그들에게도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현재의 상태에서는 속에서 일어나는 짜증을 아예 고개를 들지 못하게 틀어막을 수는 없다. 이것은 연기를 무시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입력된 대로 짜증을 내는 컴퓨터가 있다고 하자. 이 컴퓨터는 어떤 일이나 대상 자체가 짜증 나는 것이기 때문에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입력된 짜증이 호출되면 짜증을 내게 되어 있을 뿐이다. 나에게서 일어나는 짜증도 이 컴퓨터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일 자체가 짜증나는 일인 것이 아니라 내가 남긴 짜증 종자가 이 상황에서 호출되고 있기 때문에 짜증이 나려고 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 보라. 문을 닫고 법당 안에서 목탁을 딱딱딱 쳤다. 바깥에는 불교 신자인 할머니와 유치원생 손자가 있었다. 문을 열고 물었다. “방금 전의 소리가 무슨 소리였어요?” 할머니는 목탁 소리라 대답했고, 손자는 나무 두드리는 소리라 했다. 동일한 소리가 목탁 소리로도 들리고 나무 두드리는 소리로도 들린 것이다. 혹자는 두 소리가 결국 같은 소리가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목탁 소리와 나무 두드리는 소리는 판이하게 다르다. 전자는 종교적 의미가 들어있는 소리이지만 후자는 그냥 나무 부딪치는 소리일 뿐이다. 같은 소리가 왜 이렇게 다르게 들릴까? 할머니는 절에 다니면서 목탁에 대해 배우고 그 소리를 들어 목탁의 종자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손자는 그것이 나무 두드리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는 종자만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종자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그 소리가 울렸기 때문에 같은 소리가 다르게 들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할머니가 억지로 그것을 목탁 소리로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듣는 순간 너무도 자연스럽게 목탁 소리로 들린 것이다. 손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저 소리는 목탁 소리인가, 아니면 나무 두드리는 소리인가? 조건에 따라 목탁 소리로도 들리고 나무 두드리는 소리로도 들릴 뿐, 그 소리 자체가 특정의 어떤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 소리는 공(空)인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해 너무도 자연스럽게 짜증이 나려고 한다. 과연 그 일 자체가 짜증 나는 일일까? 위의 이야기에서 밝혀진 대로, 그 자체로서 짜증나는 일이란 없다. 단지 내가 짜증의 종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호출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짜증이 나려고 하고 있을 뿐이다. 짜증의 종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같은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짜증이 나지 않는다. 내가 과거에 짜증의 종자를 남겼고 때가 되어 이제 그 종자에서 짜증이 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거나 성을 낼 일은 아니다. 그것은 연기의 이치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단지 짜증이 일어나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일 자체가 짜증 나는 일은 아님을 자각하면서, ‘과거에 남겨진 종자대로 또 말썽을 피우려고 하는군’ 하며 일어나는 짜증을 놓아 버리고 일체 끼어들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

위의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컴퓨터가 짜증을 내려 할 때, 나는 그것이 입력된 대로만 작동하여 일어나는 짜증인 줄 알고 전혀 관여하지 않고 지나칠 것이다. 내게서 일어나려는 짜증도 그와 같이 대하는 것이다. 연기의 이치에 따라, 짜증은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짜증을 대하면 짜증은 힘을 잃는다. 타인도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짜증을 낸다는 것을 안다면, 짜증 내는 타인에 대해 좀 더 너그럽게 되지 않을까? 이상의 언급에서 ‘짜증’이 들어가는 자리에 ‘화’나 ‘쓸데없는 걱정’ 등 여타의 번뇌가 들어가도 유효하다.

● 이번 12월호를 마지막으로 <다시 쓰는 불교 개론> 연재를 마감합니다.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지난 연재글은 단행본으로 엮여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등이 있다.

 

장휘옥ㆍ김사업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1,0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에서 수행・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