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성학] 화병은 한국 여성병이라는데

지혜의 뜰, 삶의 여성학

2007-09-15     관리자

초 등학교 다닐 때 였다. 우리 이웃에 울산댁이라고 부르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옛날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해 주셨기 때문에 모두 그 할머니를 좋아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야기 도중에 종종 가슴이 아프다면서 한참씩 이야기를 잇지 못할 때가 있었다. '속이 틀어 올라와 가슴이 아프다'고 하시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치면서 괴로워 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울산댁 할머니가 속앓이를 하는 것은 젊어서부터 울산댁 영감님이 작은 댁을 들여 놓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여자들이 화가 가슴에 차면 저렇게 속앓이를 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할머니의 등을 쓰다듬어 주시면서 안쓰러워 하셨다. 한국여성들은 이같은 속앓이 병을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딸로 대물림을 해가면서 마치 돌림병 앓듯 앓아 가면서 살아 왔다.

미국에 이민간 한인교포 여성들도 화병을 앟??있다는데, 도대체 화병이 뭐길래 비행기 타고 미국으로 남미로 아프리카로 간 여성들까지 이 병에서 시달리며 산다는 말인가!

우리나라 여성들이 수시로 수없이 앓고 있으면서도 병으로 여기지도 못하던 속앓이가 화병이란 이름으로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정신질환의 하나로 버젓이 공인을 받고 만천하에 알려졌다니 한편으로 다행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입맛이 씁쓸해 짐을 느꼈다. 미 정신과 협회 진단 기준에 화병은 '문화결합 증후군'의 하나이며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으로 불안증,우울증,신체화증상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신과 의사들은 이 병은 주로 여성에게 나타나는데 그 원인은 남편의 외도 등 강력한 스트레스이며 이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고 '참고 지낼 때'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슴에 불을 댕기는 듯한 답답한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오래되면 한(恨)이 쌓이게 된다고 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면 여왕과 원화를 배출했던 신라시대의 여성들이나 고려의 여성들에게는 한 맺힌 여성들의 흔적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조 시대에 들어오면 삼강오륜의 굴레가 여성의 삶을 억압하기 시작하면서 너무나 힘에 겨운 중압감을 이기려고 몸부림 치는 과정에서 인간성이 왜곡되고 화병을 앓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같은 사회 구조에서는 자신이 딸로 여자로 태어난 자체부터가 한스러워지게 마련이다.

어떤 할머니는 여자로 살아온 세월에 얼마나 한을 품었으면 내생에는 꼭 남자로 태어나야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염불을 부지런히 하셨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 남자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수의로 입혀 달라고 유언을 하셨다. 조선시대 이래 전통윤리의 핵심은 남존여비 사상이다. 삼종지도, 여필종부, 칠거지악, 그외 여성에게 강요되는 부덕들을 보면 여성들은 감정없는 막대나 아무 생각도 판단도 없는 바보가 되는 길이 잘 사는 길이라고 제시되어 있다.

그 사회가 요구하는 '부덕을 갖춘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불완전하고 무능력하고 의존적이며 항상 수동적인 인간으로 행동해야 평가 받을 수 있었다. 여성들은 다 남의 집에 출가한다. 시집이라는 낯선 곳에서 보고 듣기는 하지만 말하는 입은 없는 듯이 '그림자'처럼 살며 참고 견디어 내며 착하고 덕을 갗춘 며느리가 되고자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하늘같은 남편과 더 높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층층시하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인간됨과 자기 표현에 자물쇠를 잠구어 놓은 규범과 문화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홀로 외롭게 상처입고 무너지고 피흘리며 살아가야 한다. 어머니들이 딸을 키우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자로 키운다는 점에서는 똑 같다.

여대생들의 불만은 어머니들이 "남의 집에 가서 살텐데 그렇게 게을러서, 맛있고 좋은 반찬만 먹을려고 하고 그렇게 참을성이 없어서 시집가면 어떻게 살거냐"하는 걱정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가정에서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 "네가 참아야기"라는 식으로 명령하고 얼르고 한다며 여자로 태어난 것이 속상하다는 말을 한다.

아직도 여학생들은 용돈과 음식과 부엌일감에서 차별과 억압을 경험하고 있는데 이들은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화가 난다면서도 자신의 분노를 적절히 표현하지 못하고 뒤에서 불평하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삶의 방식에 길들여 지고 있다. 그러다가 보니 상담실에 찾아오는 여성들 중에는 자기의 존재를 하찮게 생각하고 "나 같은 거야 뭐"라며 자기비하에 빠져든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내가..."라는 표현보다는 "우리 아빠가...또는 우리아들이, 우리친구가"라는 식으로 자기 의견이 한 가지도 없이 남의 의견만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례가 많다. 나를 잃은 생활을 오래 하다가 보면 자신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모르게 되고 자기 의견을 표현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울증의 근본원인들 중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옛날 여성들은 그랬다고 하자. 시대도 변했고 세상이 좋아져서 여자들이 살판이 났다고들 하는 지금은 화병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들이 없어져야 옳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들은 여전히 화병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고 상담기관에서도 심신이 탈진한 생기없는 여성들을 만나 여성들의 아픈 사연을 듣고 있다.

여성들에게 가혹했던 우리의 가족문화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아니면 겉으로 화려하게 변하고 정작 속은 고리타분한 생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 우리 스스로가 변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나라 결혼의 안팎은 어떤가? 결혼식 자체는 얼마나 변했는지 모른다. 결혼식 vidio를 보면 변화의 극치를 달린다. 그런데 그렇게 최신식으로 근사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치른 신부가 혼수문제로 자살을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결혼식장에 나온 양가 어머니 중에 얼굴이 새까맣게 탄 사람은 신부쪽 어머니이고 얼굴이 훤한 쪽은 신랑측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왜 신부 어머니의 얼굴이 여위고 타들어 가는지는 우리 모두가 다 안다.

우리는 눈감고 아옹하는 게임을 하면서 서로 상처를 주면서 아프다고 몸부림 칠 때가 많다.

여성들이 왜 아들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아들의 어머니가 되려고 별 짓을 다 했던 우리 조상들은 정말 어리석은 여성들이었을까? 아들병에 걸린 엄마들과 내생에는 꼭 남자가 되고 싶은 할머니들이 정신병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들일까?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드는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딸에게,며느리에게,주부에게,아내에게, 그리고 여성에게 무겁게 눌러 놓은 문화적이고 사회구조적인 돌을 들어내면 햇빛을 보지 못하고 누렇게 떠있던 부분들이 다시 생기를 얻고 살아 날 거 아닌가! 병 주고 약 주고 눈감고 아웅하는 게임은 우리가 모두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옥정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