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불교를 예증하는 화용산 관룡사

바라밀 국토를 찾아서

2007-09-15     관리자

흔히 우리는 '한국불교 1,600년'이라고 한다. 이는 고구려 소수림 왕 2년(서기 372년)에 전진(前秦)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때로부터 기산(起算)해서 그렇게 따지지만 일부에서는 불교의 남방전파설을 주장하며 불교의 전파시기를 약 백년 남짓 이르게 잡기도 한다.

즉 고대의 가야를 통해 불교가 전래 되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가야는 불교적인 통치이념에 의해 발생한 국가로 수로와의 왕비가 돌탑과 결정를 싣고, 스님이었던 오라비를 대동하고 들어옴으로 해서 이 땅에 비로소 불교를 전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지리산 칠불암의 창건설화는 이런 가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수로왕비의 오라비가 칠불암에서 수도하는데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모두 그곳으로 출가하여 해탈했으므로 절을 지어 칠불암이라고 명명했다거나 수로왕과 왕비가 그곳까지 찾아가 일곱 왕자를 먼 발치에서라도 보려고 하자 왕비의 오라비가 연못을 파서 왕과 왕비로 하여금 그곳에 비친 왕자들의 모습을 보게 해서 지금도 그 연못이 남아 있다는 것이 칠불암 창건설와의 대략적인 줄거리인데 이 이야기느 훗날 만들어 낸 얘기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 하나만 의지해 불교의 남방전파설을 주장하는 것은 다소 빈약한 면이 있다. 그래서 옛 가야의 터전 어딘가에 남아 있을 가야불교의 유적을 더듬어 본다.
누구나 이런 심정으로 찾아나선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유추하고 발견할 숭 이쓴 곳이 창녕의 관룡사다.

관룡사에는 가야 불교의 유적이 남아 있다거나 설화가 전래되는 것은 아니지만 절의 창건연대를 기원후 349년으로 표기하고 있는 사기(寺記, 도지방유형문화재 183호)가 남아 있어 고구려의 불교 전래 시기인 372년 보다 20여 년 빠름을 알 수 있다. 이 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창건 시기가 학술적으로 고증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연도가 역시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그냥 무시하지 못할 의미가 숨어있다.

칠불암이 가야의 중심에서는 외따로 떨어진 지리산 서쪽 골짜기 안의 이야기라면 창녕의 관룡사는 바로 여섯 가야 가운데 가장 강성했다고 하는 대가야의 영역에 남아 있는 곳이다.

인근에서 믾은 수의 가야 고분군이 발견 되기도 하고 신라 진흥왕 22년(561년)에 세운 척경비(순수비)가 남아 있어 이곳이 가야의 중요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두 근거있는 추정이라 머리에 새기며 창녕을 찾았다. 서울서 가자면 고속도로도 철도도 모두 비껴있는 곳이라 외지게만 생각되는데 구마고속도로가 뚫리고 부곡면에 온천이 개발되면서 80년대 이후 주목받는 관광지로 바뀌고 있다. 거기다 최근에는 5만 평 산정(山頂)의 억새밭을 태우며 창녕의 안녕을 기원하는 화왕산 갈대축제의 장관이 소개되면서 지역마다의 특산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화왕산이 뒤로 떡 버티고 서있는 아늑한 동네 창녕에서 마산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한 십릿길을 가면 왼편으로 버스 한 대 겨우 다닐 만한 소로가 다리 밑으로 나 있다. 이길을 따라 7킬로미터 올라가면 옥천이라는 산간마을이 나오는데 고려 때 이곳에 옥천사라는 절이 있었기에 아직도 마을 이름이 옥천(玉川)이다. 옥천사는 지금 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는데 거대한 석축과 탑의 부재인 듯한 석조물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어 애잔한 느낌을 받는다. 이곳은 여말의 혁명적인 사상가인 신돈이 삭발위승한 절이다. 그의 처참한 실패처럼 그의 출가처도 처참하게 망가진 것이다. 신돈의 어머니는 당시 옥천사 여종이었다고 한다. 신돈은 출가를 했어도 이 어머니의 출신성분이 늘 따라다녀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었다고....그래서 그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전국을 떠돌아 다녀야 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되었고 드디어는 문수보살의 화신으로까지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정치와 종교의 실권을 장악하고 문란한 토지제도를 개혁해서 농민을 비롯한 민초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귀족계급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서경 천도를 주장하다가 오히려 귀족들의 반발로 무산되고 수원으로 귀양가서 참형을 당하게 된다.

이 쓸쓸한 옥천사터에서 2킬로미터 더 올라가야 관룡사가 나온다. 새로 포장한 찻길을 비껴서 개울 옆으로 난 오솔길에는 유명한 관룡사 석장승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이 장승들은 나주의 불회사나 운흥사, 남원 실상사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사찰장승으로 절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절입구에 마주 서있는 거리가 일 미터 남짓할 뿐이어서 아마도 이렇게 할아버지, 할머니 장승으로 서 있는 여러 장승 가운데 가장 사이가 좋은 분들이 아니가 생각해 봤다.

관룡사에 오르면 입구에 작은 석문이 있다. 계단을 올라서면 양편으로 돌담을 두르고 있는 이 석문은 조선시대 어느 때 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신라시대의 8대 사찰이었던 관룡사의 격에 전혀 맞지 않게 규모가 작고 아담하기 때문이다. 저 아래 장승이 일주문 격이라면 이것은 아마도 금강문 정도에 해당할까? 이 문을 지나 또 오르다 보면 '火旺山 觀龍寺'라고 쓴 편액을 달고 제대로 서 있는 다른 문을 만난다. 절에는 참으로 많은 문이 있다. 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에 지나쳐야 하는 이 많은 문들은 속세에서 출세간으로 향하는 경건한 마음가짐을 재차 여미게 하는 지점으로서 의미가 있다. 한발한발 발걸음을 떼어놓지 않고 산을 오를 수 없듯이 이 문들을 통과하지 않고 절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 문을 지나고 나니 절마당이다. 1749년 중창했다는 대웅전(보물 212호)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거기 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비로자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정면 절마당의 우측 모퉁이에는 한 칸짜리 작은 규모의 약사전(보물 146호)이 있고 이 안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519호)이 석조팔각연화대좌 위에 모셔져 있다. 앞에는 고려시대 때 만든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도유형문화재 11호)이 세워져 있는데 석탑은 작은 규모로 옹색한 느낌마저 들어 단칸집인 약사전에 크기를 맞추려는 의도로 보였다.

안에 모셔진 여래좌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당시 지방화한 석조예술의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 약사전은 작은 규모임에도 또 하나의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보이는 귀중한 자료로 손꼽는다. 특이하게도 작은 규모임에도 대들보가 세 개나 된다. 주심포계 맞배지붕으로 바닥에는 전석을 깔았던 흔적이 보이고 기둥 간격에 비해 거대한 지붕의 규모는 절묘하게 비례를 맞추어 안정감을 갖게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과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무위사 해탈문, 장곡사 상대웅전, 송광사 국사전, 강릉 객사문 등과 더불어 고려시대 목조건축의특징을 간직한 건축물로 눈여겨 볼만하다.

관룡사에서 뒤쪽 산길을 따라 20분 남짓 더 가면 용선대가 나온다. 용선대에는 이 지방에서는 토함산 석굴암 부처님에 비견하는 석조좌불(보물295호)이 모셔져 있다. 산꼭대기에 좌정한 이 부처님은 무슨 이유에선지 훤히 트인 남쪽의 옥천골을 내려다 보는 것이 나니라 동쪽 산맥 너머를 응시하고 있다. 연화대좌에 앉아 지긋이 먼 곳을 응시하며 날마다 새벽별을 보고 계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사람들은 석굴암 부처님과 가장 닮은 부처님이라고 자랑하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도 보인다. 석굴암 부처님에 비해 조금은 둔착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안정감 있고 어느 부처님도 따르지 못할 위엄을 갖추고 계신다.

전체 높이는 3미터 정도 될까...

저 멀리 옥천골 입구에서부터 산정에 가뭇가뭇 보이도록 이 부처님은 그야말로 깎아지른 산꼭대기에 앉아 계신다. 맨몸으로 친견하러 가는 발걸음도 수월치 않은 곳인데 이곳에 이 거대한 부처님을 모신 선인들의 수고로움이야 달리 뭐라 표현해야 할까? 물론 지금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청복(淸福)이지만 당시로서는 무모함이었을 것이다.

왜 이런 무모한 (?) 불사를 벌였던 것일까? 근기가 떨어진 머리로 산에서 내려오며 곰곰 생각해보니 '용선대'라는 말이 떠올랐다. 또 인근에 영축산이란 산이름으로 불리는 산이 두어 군데 된다는 점도또 떠올랐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이었다! 보살과 많은 중생들이 거친 파도 격랑을 헤집고 나아가 드디어 피안에 이른다는 내용의 그림이 '반야용선도'라면 이 부처님은 천년동안 여기에 앉아 계시며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서 숨쉬는 온갖 중생과 더불어 반야용선의 설법회상을 만드셨던 것이다. 영축산 꼭대기에서 벌어진 영산회상을 반야용선에 비유해서 나타내고 계신 것이다.

구름이 짙게 덮인 사이사이로 서광이 흩뿌려 내리는 환상적인 모습이 이 부처님을 친견하는 동안 수없이 반복되었다. 영산회상에 내렸다는 꽃비가 저렇게 환희로울까? 한 무리의 우바이 우바새가 다녀가며 약식 법회를 보는 중에도 바람과 꽃비는 계속되었다. 그들이 부르는 반야심경 독경소리마저 천상음처럼 아름다웠다.

창녕읍내 읍사무소와 경찰서가 마주해 있는 길을 따라 오라가면 그 유명한 창녕 진흥왕척경비(국보33호)가 나온다. 작은 공원으로 꾸며진 이 곳에는 이밖에도 창녕객사와 석탑 한 기가 있기도 해 한번쯤 들러볼 만하다. 창녕진흥와척경비는 다른 곳(황초령, 마운령, 북한산)의 비에 비해 가장 이른 시기에 세워졌는데 다른 비문에서 보이는 '순수관경(巡狩觀境)'이란 글자가 보이지 않아 '순수비'가 아닌 '척경비'로 불린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에 의해 발견되어 원래 세워졌던 화왕산 기슭에서 이곳으로 옮겨 세워졌다.

진흥왕비가 있는 곳에서 약 10분 남짓 시장골목을 걸어내려 오면 주변에 인가가 둘러 서있는 곳에 술정리동삼층석탑(국보34호)이 있다. 국보로 지정된 석탑인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주변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데 그 흔한 울타리 조차 둘러있지 않고 돌틈에 과자봉지 따위가 끼워져 있기도 하다. 이 석탑은 불국사 석가탑에 견줄 만큼 그 기교가 뛰어나고 놀랍게도 저잣거리에 서 있는 석탑치고는 보존상태도 흠잡을 데가 없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옥정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