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창간 45주년, 다시 보는 월간 「불광」 | 다시 듣는 큰스님 말씀 2 성철스님

2019-11-07     남형권

 

성철 스님

1912년 경상남도 산청 출생. 유년기부터 유서(儒書) 등 각종 경서를 독파하고,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문학·논리학 저서를 탐독했다. 1936년 동산(東山)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한 후 파계사에서 8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했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했으며 취임한 날부터 100여 일 동안 불교 중심 사상인 중도 사상을 체계화한 백일법문(百日法門)을 설했다. 1981년 조계종 제7대 종정으로 추대되었고 추대식에 참여하는 대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발표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큰 스님으로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남 모르게 남을 도웁시다’ 등 중요한 가르침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에게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란 인도말로 붓다(Buddha)라고 하는데 ‘깨친 사람’이란 뜻입니다. 불교란 일체 만법의 본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의 가르침으로, 결국 깨달음에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 그러면 우리에게 일체 만법의 근본을 깨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시고 일체 만유를 다 둘러보시고 감탄하시며 이르기를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 덕상이 있건마는 분별 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이 말씀이 우리 불교의 근본 시작이면서 끝인데,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이 한 말씀은 인류 사상 최대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사람이 절대자가 될 수 있나 없나 하는 데 대해서 많이들 논의해 왔지만, 부처님같이 명백하게 인간이면 누구든지 절대적인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히 선포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인도에
서 범아일여(凡我一如) 같은 사상이 있기는 하지만 불교와는 다릅니다.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부처님이 스스로 바로 깨쳐서 우주 만법의 근본을 바로 알고 보니, 모든 중생이 모두 부처님과 똑같은 무한하고 절
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능력만 발휘하면 스스로가 절대자이고 부처이지 절대자가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인간 속에 무한한 근본 능력이 있음을 부처님이 처음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중생들이 무한하고 절대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늘 중생 노릇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별 망상에 가려서 깨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깨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땅 밑에 금이 많이 있는 줄 알고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금이 없다면 아무리 땅 밑을 파도 금이 나오지 않는 것이니 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서 어느 누가 금을 찾겠다고 땅을 파는 헛일을 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보아도 헛일입니다. 광맥이 없는 곳을 파는 헛일을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니 말씀에는 우리 중생에게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사람 사람 가슴속에 다
있다 했으니, 이것을 계발하라고 소개한 것이 불교의 생명선인 것입니다. 세계의 학자들도 부처님이 인간성에 대한 절대적인 능력을 인정한 것은 인류 역사상 대발견이라고 인정하고 칭송하는 바입니다.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 덕상이 있건마는
분별 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

동서고금을 통해 철학자나 과학자나 종교가나 어느 학자 어느 사람이든지 간에, 사람이란 살아 있는 동시에 살아가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행복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산다는 데 있어서 고생되는 조건이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여러 학자들이 사람의 고생 내용을 각 방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해 보면, 사람이란 실제로 고(苦)의 존재이지 낙(樂)이란 극히 일부분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
이 고해로다.’ 삼계, 중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가 불타는 집과 같다는 것이니, 그렇게 고생이 많다는 말이며 사생(四生),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것이 고의 바다라는 것이니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나서 살아 있는 동안에 고생만 하다가 결국은 죽고마는 것이니, 그동안 살다가 혹 좋은 일도 더러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순간적이어서 인생 전체로 볼 때는 고는 많고 낙은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자살할 수도 없고, 그냥 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살지 않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좀 고생을 덜 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느냐 하는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역사적으로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만 이 고생하는 중생 가운데서 좀 더 행복하게 살 수가 있겠느냐 하여 그 방법을 모색해 왔습니다.

“내 마음속에 절대·무한의 세계가 다 갖추어 있는 것이지
내 마음 밖에, 이 현실 밖에 따로 있지 아니하다.”

행복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일시적인 행복과 영원한 행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이것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상대·유한으로 되어 있어서 모순에 모순으로서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 해도 끝이 있고 맙니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이상 일시적인 행복에만 만족할 수는 없으니
당장 한 시간 후에 죽더라도 지금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오래 살면서 편안하게 살수 있느냐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영원한 행복의 추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원한 행복을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이룰 수가 없으니 절대·무한의 세계를 구상하고 따라서 거기 가서 영원한 행복을 받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종교의 근본 뜻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이 현실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을 성취할 가능성이 없으니 그것이 실현될 현실을 떠난 다른 세계를 모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교의 천당설(天堂說)입니다. (…) 그러나 불교는 그와는 다릅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를 벗어난 절대·무한의 세계를 어느 곳에서 찾느냐 하면 자기의 마음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절대·무한의 세계가 다 갖추어 있는 것이지 내 마음 밖에, 이 현실 밖에 따로 있지 아니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불교를 믿으려면 자기에게 그러한 절대·무한의 세계가 갖추어 있다는 것,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근본조건입니다.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계발하여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이나 옛 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발달로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음이 차츰차츰 실증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교는 처음과 끝이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을 완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는데, 그 인간이 상대적 존재냐 절대적 존재냐 하면 절대적 존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 1988년 2-3월호, ‘불교의 근본 사상’ 발췌·정리

글. 성철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