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암자의 숨은 스님들] 기도는 선(禪)과 같은 것, 하루하루의 약속이다!

영원사 법원 스님

2019-11-06     이광이

지리산의 북사면, ‘속(內)지리’를 다니다가 천일 기도를 두 번 한 스님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리산은 남쪽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 방면을 ‘겉(外)지리’라고 한다. 남향이라 볕이 양명하여 시고로 절과 중이 많았던 곳이다. 반면 북사면은 볕이 덜 들고 더러 습하고 바람도 차다. 이른 봄 남북으로 성삼재를 넘어보면 그냥 안다. 이쪽이 남원 실상사, 함양 벽송사, 산청 대원사로 이어지는 속 지리다. 암자도 많지만, 당(巫堂)은 더 많았다. 그 당집의 흔적들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겉 지리는 ‘대중살이’의 맛이 있고, 속 지리
는 ‘독살이’의 맛이 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런지 겉 지리 쪽은 큰 절 본사가 2개나 있고, 속 지리 쪽은 암자 토굴이 많다. 1,000일이면 3년에서 석 달 빠진다. 그토록 갈구하는 것이 무엇이길래, 100일도 긴 시간인데 1,000일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기도를 올렸을까? 그리하여 영원사(靈源寺)로 간다. 함양 마천 삼정산, 주능선 동향 길에 토끼봉 명선봉 지나 연하천에서 별바위등으로 빠지는 지리산 중북부 능선이다. 절 들어가는 길에 가을이 깊다. 단풍이 제일 빠른 산벚나무는 벌써 나목(裸木)이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 싸리비를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다. 갈색으로 변한 참나무 잎들과 누런 은행잎들이 바람에 우수수 지고 있
다. 저런 풍경은 사람을 애잔하게 한다. 절에는 봄에도 가고 여름에도 가는 것이지만, 가을이 깊어질 때 혼자 산길을 걸어 찾아가는 것은 다르다. 그 자체로 하나의 기도처럼 보인다. 법당에 서서 올리는 기도와, 그 경건함에 있어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런 산속의 애잔하고 쓸쓸한 마음을 잘 간직하여 돌아오면, 세상의 어지간한 슬픔 정도는 견뎌내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그 힘은 암자를 향해 가을 산길을 느릿느릿 걸어 올라가는 그런 데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스님,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요? 기도가 기도지요. 진짜 기도는 바라는 것이 없어야 돼요.”

영원사 법원 스님. 구(求)하는 것이 아니고, 구하는 것이 아니어야 기도라는 것이다. 불교는 어딜가나 역설이다. 금강경의 어법, 그것이 그것이면 그것이 아니고, 그것이 그것이 아니어야 비로소 그것이라는 말씀. 헛것을 따라 애먼 데로 가지 말라는 뜻이다. 법원 스님은 2011년 해인사 비로전에서 천일기도를 했다. 그리고 법당에서 염불하며 향촉(香燭)을 올리는 노전(盧殿) 소임을 2년 살았다. 그 뒤 다시 천일기도에 들어갔는데 1년쯤지난 즈음에 발령이 나서 영원사 주지로 왔고, 여기서 천일기도를 회향했다고 한다. “기도는 선(禪)하고 같은 거예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요. 발심을 단단히 해서 한 바퀴를 마치려고 기간을 정해서 하는 거지, 사실 1,000일 자체에는 의미가 없어요. 천일기도 우리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 설산 스님은 건봉사에서 염불만일기도(27년 5개월)를 회향했잖아요? 기도는 뭘 성취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수행이고 삶인 거예요. 천일기도를 회향하고 그다음 날 다시 천일기도 입재하는 스님도 있잖아요? 안거 끝나고 산철에도 참선하듯이, 하루하루의 약속입니다. 저녁 잘 먹었다고 내일 아침은 안 먹나요?” “하루 종일 기도만 하십니까?”“보통 사분정근(四分精勤)하지요. 새벽예불, 사시예불, 2시예불, 저녁예불해서 하루 네 번 해요. 예불 마치면 다 법당을 나가지만, 기도하는 스님은 보통 한 번에 2시간 정도, 하루 8시간 기도를 합니다. 기도하고 공양하고 기도하고 공양하고 기도하고. 무슨 생각 하냐고요? 아무 생각도 없어요. 화두 들고 삼매에 드는 것과 같아요. 나도 선방에 다녀 봤는데 똑같은 겁니다. 아니 기도하
는 염불선이 좌선보다 훨씬 어려워요. 좌선은 앉아서 졸면 되는데, 서서 염불하다가 졸면 꽈당 넘어지거든….” 영원사는 삼국 시대 영원 스님이 창건해서 영원사인데 그 득도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스님은 지금의 영원사에 토굴을 파고는 8년간 정진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수도처를 옮기려고 산길을 내려간다. 그런데 길가에서 한 노인이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도 없는 산중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그 노인 왈, “8년간 낚시를 했는데 고기 한 마리를 못 낚았네. 하지만 2년만 더 있으면 큰 물고기를 낚으리라” 하였다. 스님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깨친 바 있어 다시 토굴로 돌아가 2년을 더 수도하고는 대오했다고 한다. 그리고 절을 지은 것이 영원사다. 그 노인은 문수보살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역시 끝에 붙어 사람들의 입을 따라 내려온다. 영원사는 앞으로 도솔암, 뒤로 상무주암을 산내 암자로 두고 있는 천혜의 수도처다. 한때 100칸이 넘는 전각 아홉 채가 늘어선 웅장한 가람으로 속 지리에서 제일 큰 절이었다고 한다. 영원사에는 고승들의 방명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실안록(組室案錄)’이 전해온다. 그것은 부용영관, 서산, 청매, 사명, 지안, 포광 스님 등 당대의 쟁쟁한 선사 109명이 이곳에서 수행했다는 기록이다. 영원사는 스님들의 법명을 적어 병풍으로 만들고는 소박한 조사실 안에 모셔 놓았다. 그 끝부분에 독립 운동가이자 강백으로, 영원사에 출가했던 ‘백초월 스님’도 나온다.

“기도는 이뤄지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바뀌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영원사는 1948년 여순항쟁 때 불타 폐허가 된 것을 1971년 대일(大日) 스님이 복원했다. 대일스님은 혜암, 법전 스님 등과 함께 상무주암에서 결사의 원을 세워 정진했다. 10년 기도 중 7년이 지나던 어느 날 몸이 몹시 아파 누워 있는데, 수곽에 산삼 한 뿌리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닌가.
“꿈이었지. 먹으면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꾹 참았다고 하시데요. 어른 스님들 말이 꿈속에서도 그것을 덥석 받아먹으면 안 된다고 해요. 산삼을 먹으면 너무 몸이 좋아지고 양기가 강해서 결국 중노릇 못 하고 하산한다는 거야. 스님은 안 먹고 있는데, 어느 보살이 나타나서 그러더라는 거요. 영원사를 다시 세우고 나를 원래 자리로 데려다 달라고. 그래서 은사스님이 불사를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복원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참 꿈같은 얘기네요.”
“영원사를 불 질러 소개(疏開)할 당시 극락보전에 모셔진 삼존불을 마을 대처승 절로 피신했나 봐요. 스님이 가 보니까 삼존불 중 한 분이 꿈에 본 보살과 똑같더라는 거지. 그래서 그 불상을 모셔왔어요. 여기 법당에 계신 대세지보살님이요.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은 추후에 모셔오려고 했는데 나중에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어요.”

그 대세지보살상 복장에서 1661년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나왔다. 358년 전인데, 보통 보물은 400년이 되어야 지정된다고 한다. 거기에 주불과 양 협시불 등 삼존불이 온전했으면 국보급이라는 스님 말씀. 주불 아미타불은 인사동에서 고가에 거래됐다는 소문만 들리고, 관음보살상은 삼불암에 있다고 한다. 이 삼존불을 영원사에 다시 모셔오는 것이 스님의 큰 숙제다.

“요즘은 무슨 기도하십니까?

“이산가족 상봉 기도를 합니다. 삼존불 삼형제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지요.”

“그렇게 하면 이뤄집니까?”

“기도는 이뤄지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기도하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요. 하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또 하나는 욕망을 성취하는 것인데, 기도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간절히 기도를 하다 보면, 마음이 텅 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때 고통과 욕망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뭔가 달라진 거죠? 뭐가 변했을까요? 내가 바뀐 겁니다. 고통과 욕망의 늪에서 헤매다가 내가 바뀌면서 그 늪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지요. 누가 들어주는 게 아니에요. 내가 바뀌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스님은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허물을 짓는 일인데, 기도를 잡고 있는 시간, 그 1,000일만큼은 지계(持戒)하고 사니까!

 

이광이
60년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 따라 대흥사를 자주 다녔다. 서강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와 더욱 친해졌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냈고, 도법 스님, 윤구병 선생과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책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글. 이광이
사진. 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