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의] 5.긍극의 이상세계로 나아가는 길

반야심경 강의5

2007-09-15     김용정

사리자(舍利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한 상이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고,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다."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관자재보살과 사리자 두 분 뿐이라고 앞서 이미 밝혔다. 관자재 보살이 다시 사리자에게 모든 법의 공한 상을 밝히고 있는데 이에 대해 인도사상 전반을 살펴보면서 설명을 해나갈 것이다.

인도는 수천 년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언어가 다양하게 발전,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이 법이라는 말 역시 진리라는 뜻과 아울러 존재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제법이라는 말은 모든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다시 해석해보면 모든 존재의 공한 상이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인도사상을 살펴보면, 인도는 아리아 민족이 대이동을 하면서 펀잡 지방에 정착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아리아 민족은 본래 인도에 정착하고 있던 드라비다 족을 무력으로 통치하기가 힘들자 그들이 차지했던 성직을 대신해서 바라문 계급이라는 성직을 만들어서 드라비다족을 통치하게 된다. 이러한 아리아 민족이 토착신앙을 종합하여 형성시킨 철학이 바로 베다 사상과 우파니샤드 사상이다. 그러나 사실 이 베다와 우파니샤드 철학은 너무 넓고 복잡하여 몇 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상식적으로나마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불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기원전 1500년 경 아리아 사람들이 펀잡 지방에 정착하고 나서 제일 먼저 형성한 것이 리그베다이다. 베다는 물의 신, 불의 신, 달의 신, 땅의 신 등 여러 신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다신교적 종교이다. 한마디로 자연적 존재들에 신의 명칭을 붙여서 우주와 인간의 길흉화복을 설명하는 철학이 바로 리그베다 철학이다.

베다시대가 지금부터 약3500년 전부터 형성된 것인데 그때의 신앙형태와 현대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없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새벽에 어머니들이 우물가에 가서 정안수를 떠놓고 손을 비비면서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기 가족의 안녕을 빌고 모든 원하는 일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형태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 같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살이라는 것이 실존적으로 생로병사의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영원히 살고 싶고 건강하여 불로장생하기를 바라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살이다. 또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기에 무엇엔가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종교를 형성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베다 역시 그런데서부터 출발을 한 것이다. 그래서 베다를 찬가라고 한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찬가를 부르면 자기의 어려운 일이 다 해결되고 소원성취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찬가를 부르고 신의 이름을 불러도 소원대로 되지 않자, 자연히 의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베다 사상은 리그베다에서 형태를 조금씩 바꾸어 쌈마베다, 야주르베다, 야타르베다 등으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아타르바베다에 이르면 찬가로만 해서는 소원 성취를 못 이루므로 주문을 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베다에 나오는 것은 거의 다 주문에 가까운 것들이다. 이것은 반야심경에서도 찾아진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독송하는데 이 독송 자체를 만약 찬가의 형태로 보면 찬가가 되는 것이고, 주문으로 생각하면 주문으로서의 만트라의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만트라는 진언이라는 말인데 일종의 주문으로서 그 자체에는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어떤 초월적인 신통력과 같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끝부분에 진언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결코 통속적인 주문은 아니다, 반야심경은 불교의 최고의 공(空)의 논리적인 체계를 가진 압축된 지혜의 소우주이다.

최근 서양의 언어 철학은 언어의 구조를 생명의 구조에서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어를 가지고 말하면 알파벳 M이나 A나 N은 개별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 글자들을 합해서 man이라고 정하면 사람이라는 의미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몇 개의 단어를 모아서 주어 술어의 문장 형식을 갖추면 새로운 의미가 나타난다. 따라서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의 조직을 잘하면 잘 할수록 보다 광범위한 정보를 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컴퓨터에 사용되는 반도체인 기억소자(칩)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손톱만한 크기의 상자 속에 수백권의 백과사전의 모든 정보를 삽입 시킬 수 있는 첨단과학도 알고 보면 말의 조직을 그만큼 잘 함으로써 보다 많은 정보(지식)를 얻어내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소자나 컴퓨터는 그것이 아무리 첨단의 정보조직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생명력이나 신비력, 창조력이 나오지는 않는다.

반야심경은 인간과 우주의 모든 정보를 함축하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생명력과 창조력, 신비력을 갖고 있어 누구든지 일념으로 반야심경의 한 구절만 독송해도 진리를 깨달아 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초월적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주체적으로 절대적인 마음의 통일에 전력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구도적 원력을 세워 실천할 때 가능한 것이다. 반야심경의 만트라적 성격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세간적인 주문의 성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53년에 왓슨과 클릭이라는 과학자는 생물의 근원인 DNA분자를 발견하였다. 모든 생명체는 바로 이러한 분자들과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명은 그 자체가 전체적인 유기체로서 부분의 집합이 아니지만 분석해보면 분명히 분자의 집합체인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 원리도 앞의 언어 철학의 경우에서와 같이 분자들이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무생물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분자들이 일정한 질서로 결집이 되면 하나의 생명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생명은 처음부터 그 자신 유기적으로 자체조화에 의하여 그렇게 전체자로서 조직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언어철학은 생명을 분석적으로 이해하여 그것을 언어이론에 원용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명현상이나 언어의 이론이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고 더구나 반야심경과 일치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비유적으로 반야심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우회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 과학의 이론을 통하여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유용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여러 곳에 사용하는 레이저 광선만 하더라도 원자들이 따로따로 흩어져 있을 때에는 별다른 힘이 발생하지 않는데 원자들을 교묘하게 집합 시키면 초강력 에너지가 나온다. 태풍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필리핀 쪽에서 태풍이 발생하면 우리나라까지 영향을 주는데 그 방대한 힘은 분자들이 일제히 집단화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차원에서 반야심경은 물론 모든 불교경전들은 고도로 언어들을 교묘하게 짜맞춘 우주적 생명체로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경전들은 새로운 생명력과 창조력을 발현하는 생명의 보고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정교하게 조직한 언어체계라 하더라도 그럿이 갖는 해석상의 다의성과 애매성 때문에 오히려 진리의 직관에 방해가 괼 수도 있다. 그리고 또한 언어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를 지시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언어에 매이게 되면 오히려 진실재에 돌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브로 선종에서 언어도단이니 불립문자니 하는 것은 여기에 연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불교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하여 경전을 통한 가르침과 참선을 통한 선정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계속-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옥정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