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몽에 헤매는 자의 변

풍경소리

2007-09-15     관리자


나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부처님의 자비의 가르침과 예수의 사랑의 계율을 정신생활의 지침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종교의 낱말에 ''(인용부호)를 친 까닭은, 일요일에 예배당이나 성당에 가서 신부나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든가,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드러 내어 가지고 다니면서 "예수 믿으시오!"를 외치는 식의 종교라면 그런 종교를 갖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꼭 절을 찾아가서 합장을 한다든가, 아파트의 문에 무슨 종교, 무슨 교회 또는 무슨 절의 신도라는 표시를 붙여놓고 남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겉모습을 짓는 것이 불교 '신도(信徒)'라면 나는 신도가 아니다.
나는 다만 나의 삶에서 성경을 읽고 불경을 읽으면서, 석가모니와 예수의 삶과 정신과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그에 가까운 삶을 따르고 싶어할 뿐이다. 3대에 걸쳤던 긴 군부독재의 암흑기에 나는 민주주의와 인간권리, 그리고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는 나의 글과 책 때문에 여러 번 형무소 살이를 경험했다. 그때마다 조서(調書)의 종교란에 기입해야 하고, 조사관의 "종교가 뭐냐?"의 물음에 답변해야 했다. 나는 종교란에 언제나 '예수님,부처님'이라고 써 넣었다. 그러면 조사관은 으레 '예수교'면 '예수교', '불교'면 '불교'지 '예수님,부처님'이 뭐냐고 힐난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름의 기성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겉으로 행동으로 드러내거나 표시를 함이 없이, 다만 위대한 두 성인의 정신과 계율을 따르고자 한다는 뜻에서의 '부처님, 예수님 종교'의 '신도'라는 설명을 되풀이 해 왔다. 그들은 무신론자인 나의 '강변'으로 여길 뿐이었지만 나는 나대로 그 주장으로 일관했고 또 여태껏 그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나는 현세(現世)이외의 어떤 삶(來世)을 전제로 하거나 그것을 기대해서 '예수교'를 믿는다거나 '불교'를 믿는 식의 종교생활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세, 즉 이 '속세'를 살면서, 그 속세를 예수교건 불교건 이상(천당 또는 극락)으로 상상하고 그리는 그런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각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할 뿐이다. 그런 믿음(신앙)의 삶을 인도해 주는 가르침의 원천을 예수와 부처님에게서 찾는 것이다. 나는 마르크스처럼 종교가 반드시 계급적 지배 이념으로서의 아편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그런 역할을 다분히 해 온 역사적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 또 프로이드처럼 종교는 심기가 허약한 사람들의 환상 또는 환각적 믿음이라고 멸시하지도 않는다.
역사 상에는 훌륭한 정신과 영(靈)의 소유자들의 감동적인 종교적 삶을 입증해주는 수없이많은 실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나의 미숙한 차원에서 지금과 같은 종교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인간이 나고, 병들고 굶주리고 살아가는 고통과 아픔에 시달리고, 그리고 만나고 헤어지는 슬픔 끝에 반드시 해골이 돼야 하는 두려움... 때문에, 한번 나면 즐겁기만 하고 병들지 않고, 언제나 배부르고, 사랑하는 사람과는 영원히 기쁨을 누리고, 원하는 일은 다 이루고,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그런 염원을 '천당'이거나 '극락'(또는 그반대)으로 관념화 하였을 것이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들의 이같은 열망과 희구를 실존하는 것으로 이론화하기 위해서 '신(神)'의 존재가 상정되었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두고 "신이 인간을 만들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다"라고 말했던가? 나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신이 인간을 만들었건 인간이 신을 만들었건 인간의 본질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가야 할 또는 갈 수 있는 '천당'이나 '극락'이 있건 없건,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인간이 태어난 생명을 누리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살 수 밖에 없는) 삶의 현실(現世)을 가장 슬기롭게 지나갈 수 있는 길잡이가 예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한도 내에서 나는 '예수의 신자'이고 '부처의 신도'인 것이다. 소위 배타적인 '예수교인'이 아니고 '불교신도'도 아닌 대신 위대한 두 분을 동시에 한꺼번에 나의 속에 귀히 모시는 것이다.
이같은 나의 삶의 믿음 탓인지 우리 사회의 이른바 '종교'(종교계,성직자,종교생활,성당,사찰)에 대해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나 많다. 한국식 '종교'로는 허용될 지 모르지만 '예수'의 정신과 '부처'의 계율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보이는 일들이 상식화 되어 버린 것 같다.
교회와 사찰의 '거대화'현상도 그 한가지다. 몇해 전, 이 나라에서 가장 부폐타락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이었던 군부독재가 30년씩 지배 하고 있을 때 세계 170개 국강의 기독교의 최대교회 10개 중 1,2,5위가 한국의 교회임이 공개되었다. 그 해당되는 교회와 신도들은 이것을 자랑으로 여겼을 지 모르지만 세상은 비웃었던 것이다.
한국이라는 사회와 그 속에 사는 인간(정치를 포함)들이 예수님의 계율에 역행할수록 교회는 '번창'한다는 방정식이 입증됐던 것이다. 교회가 혹시 '장사'가 되지는 않았는가?
불교는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지금 내가 이사와서 살고 있는 교외의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값진 땅에는 어디나 거의 예외없이 로마 성전 같은 예배당들이 경쟁하듯이 솟아오르고 있다. '하나님의 집'은 저렇게 화려하고, 크고, 웅장하고, 돈으로 발라대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 앞을 지나가면서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을 견딜 수 없다. 사찰은 어떤지?
부처님의 상(像)은 하늘을 찌를 듯이 수백 척 높이로 크고 웅장할수록 큰 공덕을 내리는 것인지? 불상을 세우기 위해서 들어간 재물의 크기와 공덕(또는 신앙심)의 크기는 정비례하는 것인지? 크기를 자랑하고, 그에 들어간 돈의 숫자를 자랑하는 석불 앞에 설 때마다 나는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곤 한다. 우리 종교(신도)는 '안'보다 '겉'을 꾸미는데 너무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본다.
종교의 미신화도 문제이다. 얼마나 많은 미신적 종교가 선량한 인간들의 현세의 삶을 어지럽게 만들고 불행에 빠뜨리고 있는지 한심스럽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종교는 결코 과학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종교가 비과학적이서는 곤란하고 더욱이 반(反)과학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은 하나가 아닐까? 모든 존재나 법칙이 초월자의 창조라면 하나의 초월자의 창조들 사이에는 서로 부정(否定)이나 배척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세를 경시하는 종교일반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 육체가 밟고 살아야하는 땅은 지옥이고, 하늘 어디엔가 천당이나 극락이 있다는 생각부터가 못마땅하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무엄하게도 오늘도 '예수교신자'나 '불교신도'가 못 된 채 '부처님, 예수님교' 신도로 살아가고 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옥정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