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인도 11 보드가야(Bodhgaya)

부처님이 나신 나라, 인도⑪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Bodhgaya)

2007-09-15     관리자

부처님 의 발자취가 어린 북인도의 여러 불적(佛跡) 가운데 특히 중요한 네 곳을 일컬어 흔히 사대 성지라 한다. 사대 성지는 부처님이 탄생한 룸비니,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전법(傳法)의 첫 인연이었던 사르나트, 그리고 열반에 든 쿠시나가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네 곳은 성지 중의 성지다.

이번 답사길 처럼 남인도를 돌아 북상하거나 아니면 캘커타를 기점으로 하는 경우에도, 위치로 볼 때 사대 성지 가운데 첫 경유지는 보드가야가 된다. 우선 기차로 가야(Gaya)역 까지 가서 버스나 다른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보드가야로 갈 수 있으며, 가야에서 보드가야까지는 삼십 리 길이다. 역에서 자전거 릭샤로 십 분 거리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수시로 버스가 있으며, 역 앞에서 오토 릭샤를 탈 수도 있다.

가야 시가지를 빠져나가는 길은 좁고 혼잡하다. 힌두교의 유서 깊은 도시 가야는 연중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늘 만원이다. 버스가 길 옆 지붕에 닿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길은 벗어나면, 전형적인 인도 시골의 풍광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길 왼편으로 나이란자나강이 흐르고 그 오른편에는 먼 발치에 상두산(象頭山)이 있다.

나이란자나 강변에 있는 보드가야 버스 정류장에 닿을 즈음이면 전정각산으로 눈이 간다.

대각사의 역사는 아쇼카 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처님 성도 후 약 250년이 지난 B.C 250년 경에 이곳을 찾은 아쇼카 왕이 보리수나무 옆에 가람을 세우고 부처님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금강좌(金剛坐)를 조성 하였다. 아쇼카 왕의 보드가야 방문은 산치(Sanchi) 대탑 동문에도 앙각되어 기념되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아쇼카왕 당시의 흔적을 전하는 유물은 없다. 경내에 서 있는 부서진 석주 몇점이 아쇼카 왕 석주로 말해지고 있으나,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대탑을 둘러 싸고 있는 아름다운 석재 난간 또한 흔히 아쇼카왕 석주라고 하지만, 이 난간의 몇몇 기둥들에서 발견되는 명문은 그것이 상당히 후대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아쇼카 시대의 난간이 지니는 일반적인 특징에 비추어 볼 때에도 현재의 난간은 이와 거리가 멀다.

현재의 난간은 우선 사용된 돌이 아쇼카 시대의 것에 비하여 연마가 덜 되어 있으며, 여러 가지 상들을 새긴 부조와 원형의 양각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거의 꾸밈이 없는 아쇼카 시대의 것과 완전히 다른 양식을 보이는 것이다. 짐작컨데 현재의 난간은 원래 아쇼카 왕에 의하여 세워진 것을 대체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대각사는 아쇼카 왕이 세웠던 사원 터 위에 다시 조성한 것이다. 현장의 기록으로 보아 이미 7세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와 규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된 기록이 있다. 한 때는 힌두교 사원으로 바뀌어 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역사도 있었다.

50여 미터에 달하는 대탑은 멀리서도 볼 수 있으며, 탑 뒤편으로 늘어선 보리수는 높은 탑의 원경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탑의 외벽에 조성된 수많은 감실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사방으로 문을 내고 피라밋 같은 형식으로 세워올린 이 탑은 현재 인도에 남아 있는 불교 사원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꼽힌다.

대탑 안에는 가부좌의 대불(大佛)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이 보리수에 등을 기대고 선정에 들었던 바로 그 자세로 동쪽, 즉 입구 쪽을 향하고 있다. 가끔 이 불상은 석굴암의 본존불과 어떤 관련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우선 신체 각 부위의 치수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고 있는 수인이 유사하며, 앉은 방향 또한 동편으로 같다는 이유로 이 불상이 석굴암 본존불의 원형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낳게 하지만, 단지 이러한 유사성만으로 두 불상 간의 어떤 직접적인 관련을 유추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보드가야 유적의 중심은 대탑의 서편에 있는 보리수다. 원래는 아슈밧타(asvatta)나무 또는 피팔(Pipal)나무라 불렀던 것을 부처님이 이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깨달음의 나무, 즉 보리수(Bodhi tree)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보드가야가 보드가야가 된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부처님 재세시에는 수백척의 높이에 달했다 하나, 그동안 너덧차례 벌채되는 수난 을 겪었으며, 수고(樹高) 십여 미터에 달하는 현재의 보리수는 원래 보리수의 현손(玄孫)격에 해당된다.

나뭇잎이 푸르고 윤기가 있으며,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지만, 부처님 열반일에만 갑자기 잎이 졌다가 다시 잎을 낸다고 하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보리수 밑에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자리를 기념하는 금강좌(金剛坐)가 있으며, 그 옆에 있는 불족적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경내에는 이 금강좌를 포함하여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이레 동안을 보리수 아래서 머문 후 입구 동쪽 언덕으로 자리를 옮겨 이레 동안 보리수만 뚫어지게 응시하며 선정에 들었다는 아니메샤로차나 스투파, 북쪽 난간 안에 동서로 놓인 연꽃대좌, 법문을 청하는 바라문에게 법구경을 설했다는 반얀(Banyan)나무, 범천(梵天 Brahma)과 제석천(帝釋天)이 헌공한 거처에서 선정에 든 가운데 몸에서 오색 광명을 발했다는 라트나그라하(Ratnagraha)사당, 남문 밖에 있는 무찰린다 용왕못, 깨달음을 얻은 후 마지막 이레를 머물렀던 라자야타나(Rajayatana)나무가 있다.

이외에도 보드가야 주변에는 여러 불적들이 있다. 특히 나이란자나 강 건너의 수자타(Sujata)집터, 전정각산(前正覺山), 유영굴(留影窟)등은 부처님 재세 시의 행적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이다.

지난 사오십 년 동안 지어진 아시아 각국의 사원들도 저마다 자기 나라 고유의 멋을 지니고 있다. 티벳사원의 법륜, 일본사원의 불상은 멀리서도 아름답다.

근래의 보드가야는 달라이라마가 있는 다람살라(Dharamshala)를 연상케 한다. 온갖 얼굴의 이방인 들이 북적대는 것이 그렇고, 그 가운데 티벳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은 것도 그렇다.

대각사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 또한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절하는 티벳 사람들이다. 이제 어쩌면 보드가야의 주인은 티벳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옥정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