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나이 듦에 관하여] 노년, 모바일로 그리는 삶의 이야기

인생 제2막, 다시 사는 사람들 모바일 화가 정병길(모바일미술 신세대미술단원들)

2019-09-26     남형권

기술발전은 미술에도 큰 혁신을 가져왔다. 물감과 붓이 없어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를 활용해 손쉽게그림을 그릴 수있다. 하지만 나이든 사람들이 모바일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어쩐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지난 8월 24일부터 9월 15일까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강강술래 늘봄공원점에서 ‘2019 모바일미술 신세대미술단창립전’이 열렸다. 전시장에서 모바일미술신세대미술단장 정병길 화가와 단원들을 만났다. 모두가 60세를 훌쩍 넘긴 나이다.

 

퇴직 후에 찾은 새로운 삶, 모바일 화가

모바일 화가, 스마트 화가로 불리는 정병길 씨는 올해 66세다. 30년간 농협에서 일하고 2010년 퇴직한 후본격적으로 모바일 미술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선명한 초록색 캡모자에 백팩을 메고 온 모습이 마치 금방이라도 배낭여행을 떠날 것 같은 대학생 같다. 그는 지난 2018년에 고산자 김정호 선생처럼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모바일로 스케치한 뒤 『모바일스케치, 마라도부터 백두산까지』라는 책을 냈다. 정화백은 자기 삶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다는 점이 모바일 미술의 큰 매력이라고 말한다. 그가 쓴 모자에 한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는데 가만히 보니 알던 로고와 조금 다르다. 그 위에 빨간 점 하나가 추가 되어 있다. 그가 입은 셔츠엔 조금 특이한 앞주머니가 달려 있다. “모자 로고에 점하나를 그려 넣었고요. 셔츠에도 직접 주머니를 달았습니다. 저만의 스타일이죠. 그림도 저마다 각자의 개성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웃음).”

“신은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은 종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은 수많은 길을 만들었다. 나는 모바일로 마라도부터 시작하여 나의 길을 또 하나 만들어간다.”
정병길, 『모바일 스케치,마라도부터 백두산까지』중

오랫동안 회사생활을 했던 그는 퇴직 후 어떻게 스마트 화가, 모바일 미술 전도사가 되었을까? “그림, 참낭만적이지 않나요? 그림에 대한 애정을 꾸준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취미로 했고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그림을 그리며 배우러 다녔어요. 그림은 물론 쓰기도 좋아해서 퇴직 후 수필집을 냈어요. 제 책을 SNS로 홍보하고 싶어 SNS 코칭 전문가인맥아더스쿨 정은상 교장을 찾아간 게 모바일 미술을 시작한 첫 인연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림 그릴 수 있는 앱을 소개해 주더라고요. 그때부터 모바일 미술에 흠뻑 빠졌습니다. 꾸준히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이제 전시도 열고, 강좌도 진행하게 되었어요. 노년에 누군가는 어떻게 부동산을 늘릴까 고민할 텐데 저는 그림에 몰두했어요.”

자유롭게 그림에 담아내는 나만의 이야기

그는 모바일 미술의 장점이 간편한 데 있다고 강조한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잖아요. 요즘 태블릿PC도 많이들 쓰고요. 예전에 제주도에 가서 그림을 그리려고 캔버스, 이젤, 유화 물감을 잔뜩 싸서 비행기를 탄 적있어요. 공항 검색 대에서 유화 물감이 인화성 때문에 통과할 수 없더라고요. 그에 비해 모바일 미술은 얼마나 편리해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만 가방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면 되잖아요. 전통만을 고수하는 혹자들은 모바일 미술을 못마땅해하거나 무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요. 자기가 쉽고 재미있게 그릴 수 있으면 좋잖아요. 올해 8월에 현대 미술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호크니>를 봤 어요. 그분도 노인인데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더라고요. 또 장미쉘 바스키아 같은 낙서 예술가도 있잖아요. 편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놀듯이 그리는 생활 속의 모바일 미술이 저를 포함한 많은 분에게 더욱 풍요로운 삶을 안겨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현재 그는 목운초등학교와 장충중학교, 광진문화원, 서초문화원 등에 출강한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지도하는 모바일 미술 강사다. “저는 주제도, 방식도 자유롭게 그리기를 권장합니다. 특히 나이 든 분들은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리시는 분들이 많은데 현대 미술의 경우 표현이 다양하잖아요. 각자의 능력으로 재미있고 독창적인 그림을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 속 그림, 기억 나시죠? 정교하게 잘 그려진 왕자라기 보다는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그림이어서 많은 사람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생각해요. 위대하고 거창한 미술도 좋지만, 마치 노래방 가서 편하게 노래를 부르듯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미술 세상이 열렸으면 좋겠어요. 모바일 미술이 좀더활성화되면 가능하지않을까요?”

(나이 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소통할수 있다면 무한한 기쁨이지요.)


노년, 또 다른 도전으로 행복을 찾는 시간

정병길 화가와 자리에 함께한 노년의 단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바일 미술을 예찬했다. 대부분 정화백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경로당에서 열린 모바일 미술 강의를 통해 처음 눈을 떴다고 한다. 나정찬 씨(68세, 남)는 “모바일 미술이 행복의 문을 열어젖히는 경험이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노년의 삶에 작은 시도와 노력만으로도 행복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모바일 미술을 통해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선입견을 버리게 됐어요. 나이 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다면 무한한 기쁨이지요.” 이후정 씨(67세, 남)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탠다. “4차산업혁명의시대에 우리처럼 나이든 사람들이 모바일 미술을 통해 한걸음씩 나아갈 수 있는 게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 간단하고 재밌는 그림 그리기부터 쉽고 재밌게 배 우는거죠. 또 미술을 통해 심리치료도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도 상실감이 큰 노년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이번 전시에는 3대가 출품한 사례도 있다. 강양원 씨(73세, 여)는 자신의 그림이 전시됐다는 게 부끄러운 듯 조용히 미소 짓는다. 그녀의 딸과 손녀까지 모바일 미술을 배워 각자의 개성이 담긴 세 작품이 나란히 걸렸다. 모바일 미술로 가족 간,세대간소통이 더 활발해졌다고 한다. 박명순 씨(78세, 여)는 경로당에서 기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하다. “모바일미술 강의와 같은 여러 문화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면서 아파트 내에서 항상 소외되고 외면당했던 경로당 처지가 많이 변했어요. 전시를 여니 젊은이들이 모바일 그림에 관심을 보이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 고 경로당에도 찾아와요. 아이들도 부담 없이 놀다가고요. 요즘은 부쩍 생이 끝날 때까지 젊은이들에게 잘 보이고 모범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노사연의 노래 중 ‘바램’에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란 가사가 있어요. 전 요즘 나이드는 게 슬프지 않아요. 꾸준히 취미와 일을 개척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정병길 화백, 그리고 자리에 함께한 단원들. 이들은 모바일 미술이라는 새로운 기술과 감각으로 자신의 일상을 예술로 그려가고 있다. 산책 중에, 등산하다가, 집에서 쉬면서 그때그때 자기 만의 그림을 완성하고 공유한다. 이들에게 노년은 오랜 세월 살아온 저마다의 삶과 연륜을 묻어 둔 채 그저 묵묵히 죽음만을 기다리는 때가 아니다. 손 안에 쥔 모바일을 통해 소중한 순간들을 그림으로 승화시켜나가는, 인생의 또다른 봄날이다. 오늘은 또 무엇을 스케치할까, 그들 손에 그려질 새로운 하루가 궁금하다.
 

글.남형권 사진.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