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나이 듦에 관하여] 무대 위에서 다시 피어난 삶

인생 제2막, 다시 사는 사람들 우리마포복지관 시니어 극단 <오늘>

2019-09-26     남형권

나이가 들면 점점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생의 황혼기에도 당당히 수많은 관객 앞에선 사람들이 있다. 목이 쉴 때까지 수 없이 대사를 연습해도 행복하다고 말하며, 너덜너덜해진 대본을손에 꼭 쥔 채 순수한 열정에 가득찬 사람들. 연극을 통해 다시금 생의 날개를 활짝 편 서울시 마포구 우리마포복지관 시니어 극단 <오늘>을 만났다.

우리마포복지관 대강당은 월요일이면 사람들 목소리로 가득 찬다. 60대 이상의 단원들로만 구성된 시니어 극단 <오늘>이 정기 연습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를 앞둔 월요일 우리마포복지관을 찾았다. 강당에 들어가니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한창 연습 중이다.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환한 미소로 반기며 명절 전이라 평소보다 결석률이 높다고 아쉬워한다. 오늘은 4년째 우리마포복지관에서 연극을 지도하고 있는 전임 선생님과 배우 다섯이 모였다. 방해가 된 건 아닐까. 연습을 마저 하시라 했다. 이내 무대 위에 올라 너나 할 것 없이 대사를 외치며 바삐 움직인다. 대사 타이밍, 발걸음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선생님이 단원들의 발성과 발음, 대사의 어조와 속도, 시선까지 세심하게 지적한다. 분장을 안했고, 조명만 켜지지 않았을 뿐, 한편의 연극을 본 느낌이다.

벨벳처럼 빛나는 백발을 가진 10년 차 배우 임순자 씨 (77세, 여). 원래는 부끄러움이 많은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말한다. 쉽게 믿기지 않는다. 방금 무대 위에서의 능청스러운 사투리 연기를 봤기 때문이다. “전 평생을 주부로 살았어요. 아이들이 모두 결혼하고 남편이 퇴직한 후 60대에 연극을 시작했죠. 다른 시니어 극단에서 3년, 이곳에서는 7년째입니다. 총 햇수는 10년이 넘었네요. 처음에는 무척 쑥스러웠지만 이젠 연극이 생활에 없으면 안 될 활력소가 되었어요. 초등학생 역할부터 어머니 역할까지 안 해본 게 없어요. 각양각색 캐릭터로 살다 보니 경험 폭이 넓어지고, 성격도 더 적극적으로 변한 것 같아요.” 주변에 있던 다른 배우들이 임순자 씨가 이 구역의 ‘대본 암기왕’이라며 치켜세운다. “이상하게도 다른 건 잘 안 외워지는데 대본은 몇 번만 봐도 자연스럽게 들어와요. 오랜 시간 연극을 한 만큼 요령이 생긴 덕도 있겠죠. 집에만 있던 제가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제 인생에서 엄청난 변화지요. 저는 너무행복합니다(웃음).”



베레모를 쓴 4년 차 배우 조희영 씨(80세, 남)가 “연극이 최고!”라고 외치며 공감한다. “우린 아마추어잖아요. 연극을 취미로 하니까 더 재밌게 할 수 있죠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스트레스도 풀 수 있어요.” 그는 국사학과 교수로 일하다가 퇴직했다고 한다. 지금도 틈틈이 다른 복지관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역사학자의 길을 걸었지만 젊었을 때 영화 배우가 꿈이었어요. 전쟁 영화에 죽어가는 수많은 군인 중 한 명으로 출연한 적도 있죠. 주변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안 나오는데 어디 나오냐고 묻고…(웃음). 지금 이렇게 무대에서 관객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니 좋네요. 전 연극 외에도 취미가 많습니다. 마술도 하고 아코디언도 연주하지요.” 유난히 목소리가 큰 그다. 그러고 보니 아까 무대 위에서도 그랬다.

“조희영 배우님은 청력이 좋지 않아요, 그래서 목소리가 좀 큽니다.” 극단 <오늘>의 반장인 이영근씨 (72세, 남)가 말한다. “연극의 장점은 아주 많아요. 자신감과 활력을 주죠. 치매 예방도 되고요. 평소 못 했던 말을 무대 위에서 대사를 통해 시원스럽게 해소할 수도 있고요. 우리는 프로 배우가 아닙니다. 그래서 연기할 때마다 자꾸만 가지고 있던 습관들이 나와요. 전문가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비로소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어요. 또 나이든 사람들이 고집도 세고 자기중심적인 경우도 많은데요. 연극은 협조하지 않으면 할 수 없거든요. 그런 면에서 변화가 생기죠.” 그는 기업 컨설팅과 강연 일을 했었다고 한다. 연사로 많은 사람 앞에 서 봤을 그에게는 연극이 좀 더 쉽게 다가 오지 않았을까.“ 강연 경험 덕분인지 처음 연극을 시작할 때부터 무대에서 떨리지는 않더라고요. 하지만 강연과 연기는 다르잖아요. 연기는 감정적으로 느끼며 해야 하니까요. 여전히 전 무대에서 연기할 때 서먹합니다. 익숙해졌다 싶다가도 쳇바퀴처럼 돌아가죠.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요.”

반장 이영근 씨 옆에 앉아 있던 김진향(74세, 여) 씨는 인터뷰 내내 조용했지만 조금 전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일본인 역할을 맡아 열정적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용노동부에서 근로감독관으로 일하다가 정년퇴직했다. “일할 때 부처에서 연극을 한번 했던 적이 있어요. 더 해보고 싶었는데 업무가 많아 오래 못 했어요. 퇴직하고 나서야 하고 싶었던 연극을 이렇게 본격적으로 하고있네요.”

멋진 선글라스를 끼고 중앙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이승주(83세, 여) 씨는 극단 <오늘>의 신입이다. 하지만 다른 시니어 극단의 1기 단원이었고, 연극을 오랫동안 해왔다. “노무현 대통령 때 노인 복지 정책 덕분에 이렇게 연극을 시작할 수 있게 됐죠. 처음부터 한 해도 쉬지 않고 연극을 해왔어요. 전 엄격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통금 시간도 있었고 진로도 정해져 있었죠. 부모님이 여자는 사범대학에 가야 한다고 해서 갔는데 졸업을 1년 앞두고 결혼을 하게 됐어요. 아이를 낳고 결국 여러 사정으로 인해 선생님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다 선생님이 됐는데 너무 부러웠고 난 무얼하고 있나 생각하며 속상했어요. 그런데 이제 연극을 통해 자신감을 찾게 됐어요. 이 나이에 무대에서 연기한다는 자부심이 있고요. 주변 사람들한테, 관객들한테 인정받을 때 정말 뿌듯합니다. 노인 복지에 관한 정부의 이런 정책이 너무 자랑스럽고도 고맙습니다. 무대에서 마음껏 놀라고 멍석을 깔아준 거잖아요.”

아까부터 배우들의 열띤 ‘연극 예찬’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던 이가 있다. 바로 우리마포복지관에서 4년째 시니어 극단 <오늘>을 지도하고 있는 선생님 김순이 씨다. 그녀는 현직 연극 배우이며 다양한 연기 지도 경력을 가지고 있다. “제대로 된 연극을 가르쳐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시니어 극단에 오신 분들은 모두 배우에 대한 꿈과 열망을 가지고 오신 분들이에요. 연극은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제일 중요한 건 협동과 조화라고 생각해요.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어느 한 분도 극단에서 재미없게 노시는 분 없게끔 노력하고 있어요.”

우리마포복지관 극단 <오늘>은 올해 제3회 서울시니어연극제에서 다문화 가정 문제를 다룬 작품 <우리 함께 살아요>로 대상을 수상했다. 각자의 긴 세월을 살아온 단원들, 인생의 후반부에 살아갈 큰 힘을 연극에서 얻었다고 입을 모은다. 지금도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사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즐거움이야말로 이들이 연극을 통해 얻는 최고의 선물 아닐까.


글.남형권 사진.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