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초대석] 미술관다운 미술관을 꿈꾸는 자유인, 국립현대미술관장 윤범모

2019-09-26     남형권

국립현대미술관에 2019년은 특별한 해다. 1969년 설립 이래 개관 50주년을 맞았고, 기존3관(과천관,덕수궁관, 서울관)에서 청주관 건립으로 본격적인 4관 체제가 시작된 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올 2월, 전시기획자 및 평론가로 미술계 안팎에서 활동해 온 윤범모 교수가 신임 관장으로 취임했다. 여러모로 큰 변화의 시기를 맞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윤범모 관장을 만났다.

누구에게나 문턱없는 미술관

안내를 받아 관장실에 도착했다. 정면에 길게 난 창너머로 인왕산 풍경이 펼쳐졌다. 동네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미소를 띤 편안한 차림의 윤범모 관장이 악수를 청한다.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그의 머리가 빛났다. 그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가 모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있다. “평소 모자를 즐겨 쓰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은 모자를 안쓰셨네요.” “허허, 제가 모자가 아주 많지요. 모자를 써볼까요.” 바로 방문을 열더니 검은 색 모자 하나를 쓰고 나온다. “어떻습니까, 이 모자 잘 어울리나요?” 활짝 웃으며 묻는 얼굴에 소년같은 장난기가 묻어난다.

자유분방함이 느껴지는 그가 꿈꾸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그가 운을뗐다. “미술관다운 미술관, 미술관답다는 말이 표현은 쉽지만 실제로 쉽지 않지요. 사람답다는 말에서도 사람이 함의하는 말이 넓잖아요. 문턱 없는 미술관, 내집같은 미술관을 꿈꾸고 있어요. 관람객들이 쉽게 다가올 수있는미술관이요. 물론, 전문가에겐 담론을 제공하고, 학술적 모티브를 제공해야겠죠. 그리고 국제 무대에서도 많은 역할을 할 수있는 미술관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국립현대미술관은 유일한 국립미술관이에요. 우리 미술의 정체성과 본질, 자존심을 지키는 보루가 되어야겠죠.”

대중을 위한 미술관과 전문가에게 담론과 학술적 모티브를 제공하는 미술관이라는 두가지 목표가 미술관을 실질적으로 운용해나가는데 있어 상충하진 않을지 의문이 들었다. “오히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죠. 전시를 기획하든, 출판이든, 미술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든 연구자의 자세로 해당 주제를 깊이 있게 천착하고 소화하여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읽는 글도 그렇잖아요, 뭐든지 육화되어 있으면 오히려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요.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받아 들일 때도 답답해하지 않죠. 그런 것이 감동을 주는거잖아요.”

윤범모 관장은 오랫동안 평론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책도 여러 권냈다.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글을 몇 개찾아 읽었는데 장황하지 않았다. 잘 읽혔고 재밌었다. 그 안에 힘이 있었다. “학생 기자 할 때 선배들에게 혼나며 배운 글이지요. 혹자는 제 평론을 보고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 다고도 하던데…(웃음). 사실 그리 악명 높은 사람은 아닌데 그렇게 비추어진 면이 있는것 같아요. 전 늘 우리 미술의 자존심을 지키자는 큰 준칙이 있었습니다. 대중의 눈높이가 관심사고, 우리 미술의 실상과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쉽게 읽을 수있는 글쓰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무애 (無碍), 자유와 파격

그의 미소도, 옷차림과 모자도, 글과 말도 공통점이 있다.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삶의 양식도 그러한지 물었다. “전 자유란 단어를 제일 좋아해요. 재야에서 늘 제멋대로 살다가 일시적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고 이렇게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틀안에 들어와 있네요. 이 안에서 보니 또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 많아요. 저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사상가로 원효 스님을 꼽습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 난다는 그분의 ‘무애’ 사상을 좋아해서 제 집도 감히 ‘무애당(無碍堂)’이라고 택호를 지었습니다. 목표가 원대해야 흉내라도 내는 듯합니다. 저는 격식 파괴가 예술이라고 봅니다. 고정관념에 대한 문제 제기가 예술의 철학이라고 생각해요. 삶도 ‘파격’이 아름다운 것같아요. 살아가면서도 그 틀안에서 늘 새롭게 보는 것이 일상생활을 풍요롭게 하지요. 그런 자세가 소중해요.”

그는 그동안 여러 글을 통해 ‘무애(無碍)’를 우리나라 미론으로 주장해 왔다. “1920년대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 미를 ‘슬픔의 미’ 라고 처음 주창했어요. 이른바 ‘비애미론(悲哀美 論)’이죠. 어떤 한민족의 미적 특색을 우리나라처럼 많이 이야기해 온 민족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또 이야기는 많은데 정론이 없어요. 제각각이죠. 그중 하나가 자연주의인데 일본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일본이 좀더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자연미를 좋아한다면 우리나라는 규격화된 것을 깨부수지요. 사찰 목조 건축에서도 덤벙주초(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주춧돌로 사용한 돌),그렝이질(주춧돌이 생긴 대로 기둥을 일일이 따내는과정) 같은 것은 안목이 무척 높은 단계입니다. 화엄사 구층암 기둥은 원목을 다듬지 않고 나무 원형 그대로 활용하기도 했지요. 일본에서는 이런 예를 찾기 어렵습니다.

형식안에 들어가 형식을 만든 다음에 자기가 만든 형식을 깨부수는 단계, 이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과학자가 자신의 논리를 만드는 것보다 자신의 논리를 깨는 게 어렵다고 하잖아요.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틀을 깨고, 틀을 만들고, 또 제2의 틀을깨고, 이런 무애 정신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해요. 무애, 그리고 파격. 그가 쓴 책에서 젊었을적 윤범모 관장의 사진을 본 적있다. 멋스러운 장발의 청년이 반짝이는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대부분이 그렇듯 저 역시 청년기에 많은 방황을 했어요. 방황기가 길었지요.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며 우리 나라 미술 자존심을 지키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미(美)자 붙은 일은 참 여러 가지를 해보았던 것같아요. 학교에도 있었으나 현장에서 오래 일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지금의 저를 지탱하는 큰 힘 중 하나는 현장경험이었던 것같아요. 20대에는 처음 불교 사상이라는 큰 광맥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불교서적도 많이 읽었고, 탄허 스님께 『육조단경』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와 중국 등지의 사찰 답사도 많이 갔어요. 미술을 공부하면서 토함산 석굴암이 우리나라 최고라고들해서 격파해야 겠다고 생각해 살다시피 했습니다. 문헌 자료 입증이 곤란해 논문을 쓰지 못하고 심증만 가지고 토함산 석굴암을 문학적으로 풀어 시집도 냈었지요.”

사찰답사라니 반갑다. 그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부처님 말이나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부처님 가르침을 하나만 꼽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너무 좋은 말이 많으니….전 불교의 선방 일화들이 너무 좋아서 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도 많이 이야기해주었지요. 동자승이 법당 앞에서 오줌을 누다가 노스님께 혼나자 ‘우주 법계가 다 부처님 세계라고 했는데 난 어디에 오줌을 누어야 해요?’라며 되묻는 이야기. 참 파격이잖아요. 학교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좋은 그림을 그릴수 있냐고 고민 상담을 하면 이런 일화를 인용해서 이야기해주기도 했었어요. 오히려 교육적인 효과도 좋았던 것 같아요.”

새로운 감동과 상상력을 불어넣는 미술관

그의 입에서는 자주 파격이 나왔다. 파격은 새롭다. 우리나라에서 아직 본격적으로 조명되지 못한 조소작가 김복진을 발굴해 연구하고, 김복진 저서를 낸것도 그다. 김복진, 대부분 사람에게는 아마도 낯선 이름이다. 우리가 흔히 주류라고 알던 미술가가 아니다. “우리 근대 미술 역사에서 김복진의 존재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잊힌 존재 라는 게 안타까웠어요. 최초의 근대 조소 작가라고 할수 있어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카프(KAPF)가문학계에서 참 높게 평가되는데 이를 조직하고 이끈 인물 중하나가 김복진이에요. 작가로서 김복진은 참 불행했어요. 작품이 한국 전쟁 때 거의 다 사라졌죠. 그나마 불상 조각들이 좀 남았어요.저는 해마다 김복진의 기일에 후배들과 그의 무덤을 찾습니다.”

지난 5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 <근대미술가의 재발 견1:절필시대>에서는 화가 정종여의 ‘의곡사 괘불도(등록문화재 제624호)’가 정식 미술관으로서는 최초로 전시됐다.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불교 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큽니다. 정종여는 미술계 거장으로 불리는 운보 김기창과 쌍벽을 이룰 만한 작가인데도 월북 작가여서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기 어려웠어요. 연구자들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대작을 여러 점 찾을수있었죠. ‘의곡사 괘불도’는 전통적인 불화와 조금 달라요. 강렬한 채색이 돋보이는 특색 있는 작품입니다. 해인사에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윤범모 관장은 자신이 발굴한 작가나 작품에 관해 한사코 겸허한 태도를 보였다. “미술연구자로서 자료 발굴하고 작가를 재조명하는 일은 기본이지요. 앞으로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많은 분께 감동을 드릴 수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전 미술관이 상상력 충전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월간 「불광」의 독자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있는지 물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수처작주(隨處作主)입니다. 어느 곳에 가든 주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늘 주체가 되어 살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이건 제가 저한테 늘 하는 말이기도합니다.”

 

글. 남형권
사진. 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