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나는 불교] 부처의 이름으로 칼과 도끼를 든 자들 / 김천

영화 아프리카의 부처

2019-09-25     김천

내가 선의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늘 옳을까? 우리는 자신이 믿는 정의와 선이 상대에게도 반드시 동일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다큐멘터리 <아프리카의부처 (2018)>는 자비와 선행으로 포장된 불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출신의 감독 니콜 샤퍼는 기사를 쓰기 위해 말라위의 고아원을 둘러 보던 중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서구인의 아프리카 식민 역사의 유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부처>는 대만 불광산 출신의 후이리 스님이 세운 말라위 아미타불보육센터 (ACC)가 무대이다. 센터에는 약 300명의 아이들이 보살핌을 받고 있고, 주인공 에녹알루는 6살 때 맡겨져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아이들은 새벽에 일어나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고, 중국어 수업을 받고 중국의 문화와역사를 배운다.

후이리 스님은 가난한 나라에서 아이들을 먹이고 불교를 믿게 하고 공부를 시킨다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않다. 사리분별을 할만큼 자란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자기 부족의 언어에 미숙하며 말라위의 문화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고아원에서 나와 그 사회로 돌아가 정착할 수 있을지를 고뇌한다. 가족이 믿는 신과 불교의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불교는 행위의 결과보다는 동기를 살피라고 가르친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선은 모호하고 우리는 늘 그 선 앞에서 고심해야만한다. 깊은 사유가 없는 행위는 지혜를 잃게 되고 오직 결과에 대한 집착에만 끌려갈뿐이다.

후이리 스님이 아프리카 곳곳에 고아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돌보는 동기는 무엇일까? 아이들 앞에서 스님은 거침없이 말한다. “여러분은 아미타불 보육센터의 일원이기 때문에 불교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때에만 후원자들의 후원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자비한 동기인가. 아이들은 가족에 의해, 또는 스님이 마을을 돌며 가난한 아이들을 포획하듯 고아원으로 데려온다. 어떤 아이는 울면서 집에 가겠다고 하지만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스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키워주며 공부를 시켜주는 좋은 일을 행하고 있으며 아이들의 저항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자비는 사랑이 아니다. 아낌없이 베풀어주고 살피는 자심(慈心)은 사랑과 비슷할 뿐, 내앞에 선 이가 나와 동등하고 그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더라도 무상과 고통의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등한 모습임을 자각하여 가슴 깊이 가여워하는 비심(悲心)은 쉽지 않다. 스님과 고아원 직원들이 뱉어내는 “아프리카는 가난하고 더 럽다”는 말에는 결코 자비가 없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아프리카보다 낫기 때문에 베푼다는 마음에는 교만과 아집과 우월감만 있을 뿐 가여워 흘릴 눈물은 없는 것이다.

에녹 알루는 고아원에서 어려서부터 쿵푸를 배웠다. 쿵푸스타 이연걸이 우상이고 배우가 되는것을 꿈으로 삼던 때도 있었다. 고아원에서 아이들에게 쿵푸를 가르치는 것은 두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중화 문화의 우수성을 전하려는 것이고,  더 실제적인 이유는 해외의 후원자들 앞에서 공연하여 더 많은 후원을 얻기 위해서다. 에녹 알루도 고통스런 묘기를 익혀 세계를 돌며 후원자들의 갈채를 받았다. 어떤 아이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몸에 상처를 입고 고통의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후이리 스님은 “공연의 내용보다, 어떻게 하면 후원자들에게 감동을 줄 것인지가 중점”이라고 몰아붙인다. 아이들은 무대에서 공연하고 연기하고 후원해 줄 것을 애걸한다. 뉴욕 공연에서 흑인 아이들이 중국어로 말하고 쿵푸 시범을 보이는 신기한 모습에 감동하여 화교들은 거액의 후원금을 내놓았다.

중국은 아프리카에 대규모 자본 진출을 하고 있다. 광물 자원 공급권을 거의 독점할 태세이고, 각국의 정치 세력을 지원하며 철도를 놓고, 해군 기지를 건설 중이다. 20세기까지 서구 식민주의가 했던 동일한 행로를 걸어가고 있다. 후이리 스님은 중국 자본을 등에 업고 아프리카 모든 나라에 고아원을 짓는 것이 꿈이다. 그의 말대로 “중화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퍼뜨리는 일”이 자신의 원력이기 때문이다.

아침 예불에 늦으면 아이들은 법당 밖에 꿇어 앉아 질책을 들어야 한다. 무릎 꿇기를 거부한 아이에게 쿵푸 선생과 일행은 칼과 도끼를 들고 위협하고, 아이의 동료들과 싸움을 벌인다. 아이들은 외친다. “이것은우리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오직 불교를 전하기 위해서다.” 결국 19살에 말라위에 와서 십여 년동안 쿵푸를 가르쳤던 선생은 추방당했다. 알루는 “쿵푸를 수련하는 이는 행동의 결과를 분석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선생의 가르침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 는다.

대학 진학을 위해 대만 유학을 강권하는 고아원의 뜻과 달리 알루는 말라위에 정착을 결심했다. 아무리 많이 배운다 해도 자기 부족의 말조차 제대로 할 수없는 처지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향 집에는 늙고 가난한 할머니와 염소 한 마리 없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나는 너를 공부 시켜줄 수없다”며 슬퍼한다. 결국 알루는 고아원으로 돌아가 대만으로 떠났다. 5년동안 그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식민 지배의 역사 앞에서 더러는 ‘식민 통치 덕에 산업이 발달하고 먹고 살게 됐다’는 주장을 한다. 너희가 못나서 침탈을 받았다는 강변도 있다. 아프리카는 지난 수 세기 그런 과정을 겪었고, 이제는 중국 자본에 의해 다시 반복의 역사를 걷고 있다. 과거에는 신의 이름으로 지금은 부처의 이름으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말라위의 고아원에 우리나라 식민시절의 모습과 전쟁 이후 신의 가호로 세워졌던 구호 사업 들이 겹쳐 보인다. 오늘도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의 이방에서 신의 사랑을 전한다고 믿는 이들과 캄보디아와 라오스 가난한 땅에 부처님의 자비를 전한다는 이들의 모습도 비춰진다. 저들을 위한다는 일이 과연 진실일까? 우리의 교만이 빚는 환상은 아닐까, 이 영화는 묻는다. 매일 예불을 드리는 에녹 알루의 진짜 종교는 무슬림이다. 잿빛옷을 입고있다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것은 아니다. 자비심이 없이는 단 한 사람의 마음에도 신심을 심을 수 없는 것이다.

● 이 영화는 2019년제16회EBS 국제다큐화제 출품작이다.

●● EBS 국제다큐화제 홈페이지에서 유료로 볼수있다.

 

김천

동국대 인도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방송작가,프로듀서로 일했으며 신문객원기자로 종교 관련 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여러편의 독립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지금도 인간의 정신과 종교, 명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