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탐방] 대구 동화사 내원암 장일 큰스님

"뿌린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2007-09-15     사기순

세상이 어수선하고 시끌벅적할수록 푸른 산처럼, 맑게 흐르는 물처럼 자연과 하나되어 사시는 스님을 만나고 싶어진다.
팔공산 동화사 내원암에 비구니스님들의 선방을 개설, 수좌들을 지도하며 평생을 보내신 장일(長一) 큰스님(전국비구니회 고문, 81세). "씨레기국 참 맛있다. 시장할 텐데 공양부터 하거래이"하시며 미소짓는 스님의 말씀은 촉촉한 봄비처럼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셨다.

- 안녕하세요. 스님, 듣던 대로 도량이 참 좋습니다. 스님께서 30년 동안 주석 하시면서 거의 일구다시피 하였지요?
"이남 이북해서 내원이 일고여덟군데 된다고 해요. 그 중에서도 동화사 내원을 공부인 들이 제일로 쳐주지요. 내원암 하나 만들기 위해 팔공산 줄기가 내려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좋은 도량입니다. 그런데 57년도인가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절이 말도 못하게 퇴락 되어 있었어요. 건물이 주저앉을까봐 건물 버텨놓은 기둥 밑을 살살 기어다닐 정도였습니다.
1626년에 창건되어 해월 스님, 제월 스님, 보월 스님 등 큰스님들이 수행한 도량이고, 근자에는 법주사 조실 이셨던 금오 스님, 혜암 스님(현재 해인총림 방장) 등 많은 큰스님이 나신 도량인데 그렇듯 쇠락해졌는데도 누구 하나 불사를 하지 않고… 그래 하나하나 건물을 다시 짓고, 도량을 일구기 시작하여 66년도에는 어느 정도 중창불사를 마무리지었지요. 저 돌멩이 하나에도 내 손 안 간 게 없어요."

- 내원암은 비구니스님들의 수행 처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선원 소개를 간단히 해주시지요.
"중창불사를 해나가면서 가장 먼저 내원에 비구니스님들의 선방을 개설했어요. 비구니스님들이 공부할만한 선방이 없어서 내원만큼은 공부하는 도량으로 만들어보자는 원력에서지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하안거 동안거 철철 마다 3, 40명씩 수좌들이 공부해오고 있어요.
처음에는 수좌들 공부 방해된다고 철조망으로 절 문도 막아 놓고 길도 놓지 않았어요. 그런데 도립공원이 되고 나무를 때지 말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길도 놓고, 철조망도 철거했지요. 하지만 지금까지도 결제 철에는 제아무리 인연 깊은 화주보살이 와도 불공은 물론이고 49재로 안 지내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도들이 찾아와 재를 지내달라고 하면 '내원은 스님들의 공부하는 수행도량입니다. 스님네들이 공부 안 하고 재만 지내주다 공부를 못하면 오히려 신도님 복을 감하게 되니 어쩌겠습니까?'하고 돌려보내곤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신도들이 오지 않더군요.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은 많지만 앞으로도 공부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지켜 나갈 것입니다."

- 내원암 스님들의 수행생활이 퍽 궁금합니다.
"스님들의 생활이라고 해서 특별히 별다른 게 있는 것은 아니에요.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그저 부처님 닮아 가는 수행하며 살지요. 우리 내원 스님들은 다 바지런하고 착실해요. 우리가 먹는 것 대부분 스님들이 직접 농사지은 것이에요. 일일부작(日日不作)이면 일일불식(日日不食)의 백장청규를 철저하게 지키면서 수행하려 다들 애쓰고 있어요."

- 스님, 출가 이야기를 좀 들었으면 합니다.
"내 출가할 때 이야기를 하자면 오늘 밤새도록 해도 다 못할 겁니다. 내 본적지는 대구 봉산동인데 살기는 황해도 산골에서 살았어요. 내가 돌이 채 되기 전에 황해도로 피난을 간 거예요. 오빠들이 독립운동을 해서 일본 순사가 맨날 잡으러 와서 야반도주한 거라. 일곱 살 꼬마 적에 오빠들 편지 심부름도 했고, 일본 순사한테 끌려가서 오빠들 있는 데 대라고 고문도 당하고… 참말로 일본 사람들이 못된 짓 많이 했어요.
어릴 때 오빠들과 소설책으로 나온 사명 대사 이야기를 보고는 시집 안 가고 절에 들어가 공부 열심히 해서 나라를 위해야겠다는 각오를 혼자 다짐하곤 했었지요. 그래 누가 보러 온다 하면 옷고름도 잘라놓고 머리카락도 헝클어놓고 우리 어머니 속 많이 썩였어요."

- 스물세 살 때 출가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시로서는 좀 늦게 출가하신 편 아니신가요?
"절에 가서 3년 기도 끝에 얻은 딸이라서 우리 어머니가 나한테 집착이 많아 출가를 말려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데, 해인사 부처님과 허연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해인사로 가자고 재촉하는 꿈을 연거푸 꾸었어요. 이상타 싶어 그 당시 도사로 유명했던 분을 찾아갔었지요. 그런데 그분도 '아가, 너는 출가해야 좋겠다. 전생에 네 도반을 찾아가거라'하시면서 찾아갈 사람까지 일러주시더군요.
이월 초하룻날 어머니와 올케가 방아 찧으러 간 사이에 노잣돈 훔쳐 보따리 안에 꽁꽁 넣고 신발 한 짝은 물에 빠져 죽은 척하느라고 동네 저수지 둑에 얌전히 벗어두고서 길을 떠났지요. 해인사를 향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다 일단 대구에서 내려 어머니께서 다니셨던 서봉사를 찾아갔었지요. 서봉사에서 그 도사(?)가 일러준 사람을 찾으니 '황해도에서 온 아이가 어떻게 그 사람들을 다 아느냐'고 깜짝 놀라며 중 되러 왔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내 은사스님(伍田스님)께 데려다 주었지요."

- 이 세상 모든 일이 인연 아닌 게 없다고 하지만 은사스님과의 인연이 매우 각별해 보입니다. 혹 은사스님과의 일화 중에서 지금도 기억에 새로운 것이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스님께서 나한테 맨 처음 하시는 말씀이, '니 보리 동냥해 가지고 갱죽 끓여 먹어가며 수행할 자신 있나?' 하시는 데 내가 보리를 잘 아나 갱죽을 아나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니 그런 것도 모르면서 무슨 중이 된다고 그러냐. 그만 집으로 가라'하시는데, 간절히 애원했더니 받아주시며 앞장서서 부인사로 인도하시더군요. 그런데 가는 길에 배가 너무 고픈 거예요. 마침 길가에서 고구마를 팔길래 샀는데, 스님께서 뒤도 안 돌아보고 '니 도저히 안 되겠다. 그렇게 주전부리를 좋아해서는 중노릇 못한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 당장에 고구마를 다 버리고 스님 뒤를 쫓아갔지요."

- 만남 장면만 보더라도 그 다음에 얼마나 큰 고생〔苦行〕을 하셨을 지는 상상이 가는데요. 어떠셨습니까?
"말도 말아요. 당시의 부인사는 절 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퇴락해 있었어요. 절 안에는 쥐가 끓어 이리저리 찍찍거리고, 마당에는 뱀이 실실 기어다니는 형국이라, '니 절에서 밥할래, 논에 가서 모내기할래'하시는데 적막강산에 혼자 남아 밥하는 것보다 논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 일을 자청했는데, 웬 거머리란 거머리는 나한테 다 붙는지. 찰거머리가 손으로 잡아떼도 잘 안 떨어지고… 공부보다는 나무하고 밥하고 논일 밭일하는데 더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처음에는 기가 막히더군요. 내가 이 고생하려고 출가했나, 이 일 하려고 우리 어머니 속 그렇게 썩여가며 집 떠나왔나 생각하며 한참을 울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고생이 다 공부예요. 공부가 가갸거겨 글자에 있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 다 있는 거예요. 처음 중되기 전에 그렇게 심한 행자생활을 시키는 것은 다 근기를 성숙시키는 과정인 겁니다. 그야말로 '그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고 어떻게 평생 구도의 길을 갈 수 있겠느냐?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중 된다는 생각을 포기해라' 하시는 것 같은 스님의 말 없는 법문을 들으면서 힘들고 고달픈 생활을 이겨냈지요."

- 요즘 젊은 수좌들을 보시면 격세지감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어쩔 때는 참으로 걱정스러워요. 저렇게 공부 안 하고 신도들 시주공덕을 헛것으로 돌리면 어쩌누 싶은 게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어요. 스님들이 공부 안 하면 내생에 더 큰 과보를 받습니다. 시줏돈 함부로 쓰고, 시주은혜를 갚을 수 있을 만큼 공부하지 않으면 참말로 큰일납니다."

- 일제, 6·25전쟁 등 격동의 세월이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역사적으로 험한 세상에서 수행해오시면서 잊지 못할 일들도 많으실텐데요.
"대승사 윤필암에서 용맹 정진한 직후라, 대승사가 산이 깊어 공비가 출몰한다 하여 통행금지는 물론이고 입산조차도 군인들의 허가를 맡고 다닐 정도로 시절이 험악하던 때였어요. 윤필암 스님들을 죽이러 올 거라는 소문이 흉흉해서 대중스님들은 점촌으로 피난을 가고, 스물 한 분 중에 나하고 세 분 스님만 윤필암에 남게 되었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 생사를 초월하고자 수행하고 있는 우리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니 딱 기가 막히는 거예요. 그래 점촌 경찰서에 가서 '죽이러 올 거면 날짜라도 알자'며 따졌지요. 경찰관이 웃으면서 그런 일 없다고 하길래 '그러면 왜 우리 윤필암 스님들에게 공민증을 안 만들어주느냐'고 했더니 그 밤에 공민증을 다 만들어 줍디다.
한 번은 도솔산 미륵암에서 있었는데, 누가 '중동무 중동무' 부르면서 애원하길래 톨톨 털어 쌀 한 됫박 준 적도 있고, 경찰이라 사칭하며 우르르 몰려와 밥을 해달라고 해서 밤새도록 해줬더니 이번엔 진짜 경찰들이 몰려와서는 빨갱이들한테 밥해줬다고 난리인 거라. 어디 빨갱이라고 빨갛게 색칠을 하고 다니나 다 똑같지. 그때도 잘못 했으면 끌려가서 죽었을 겝니다. 실제로 어느 비구니 스님은 경찰서에 갔다 나오더니 그 길로 입적했다고 합니다."

- 고생고생 말이 아니셨군요. 조계종 정화운동에서도 큰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구산 스님께서 혈서 쓰시고 월탄 스님은 할복하고…. 그때 대부분의 절을 대처승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비구 비구니는 동냥을 해서 수행하느라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때였지요. 많은 스님네들께서 눈이 폴폴 오는 조계사 앞마당에 거적을 깔고 단식하면서 대처승들에게 우리가 마음놓고 수행할 수 있도록 총림 몇 사찰을 양도해달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듣는 거예요. 정화불사에 참여한 1200명 스님들 뒷바라지하랴, 재판이 50여 건이 넘는데 그에 대응하랴, 나는 화주해서 그 뒤 봐주느라 바빴었지요.
그 때 서로 잘 타협해서 비구·대처간에 화합을 잘 했으면 우리 불교가 지금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재판하느라 유실된 삼보정재가 말도 없이 많아요. 어디 그뿐인가. 신도들 신심 떨어지고, 불교세는 말할 수 없이 약화되고…요즘 듣자 하니 윗사람이 나서서 형평성 잃은 종교정책을 시행해 우리 불자들의 마음이 많이 상해 있다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게 다 포교를 게을리한 인과입니다. 하지만 편협한 그들도 인과법을 벗어날 순 없어요."

- 늘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현대인, 그럼 나는 현대인 아니고 구대인인가? 허기사 내가 구대인은 구대인이에요. 요샛사람들 사는 것을 보면 속이 다 상해서 욕이 절로 나옵니다. 요즘 TV고 라디오고 환경문제니 뭐니 떠들고 있는데 그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 짚고 헛다리만 짚고 있더라구요. 환경문제의 근본원인도 탐내는 마음이요, 이 세상의 갖가지 보도 듣도 못할 나쁜 짓도 인간의 탐심에서 나오는 겁니다.
쓰레기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는데 우리 때는 쓰레기가 없었어요. 아, 물에 떠내려가는 배춧잎 하나 잡으려고 십 리나 뛰어갔는데 버릴 게 어디 있어요. 근데 요샛사람들을 보면 고기니 뭐니 잔뜩 먹다가는 다 뭉퉁그려 버리는 거라. 어디 자기 집에다만 버리나. 산이고 들이고 사람들 때문에 그야말로 쓰레기전쟁이라. 이 산에도 송이가 많이 났는데 이제는 송이도 안 나요. 송이는 조금이라도 더러운 곳에는 안 나거든….
무엇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해야 해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불교의 인과법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할 수 있겠어요. 인과법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보니 다들 죄 짓고도 죄 짓는 줄을 모르고 두려워하지 않는 거예요. 요즘 보세요. 옛날에는 도둑놈이 따로 있었는데 요즘에는 다 도둑놈이라, 윗물부터 시작해서 아랫물까지 온통 흐려져 있으니….
모쪼록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해요. 마음 공부 열심히 하고, 욕심 줄이고, 철저하고 진실하게 살아가야 해요.
그리고 아무리 세속에 산다 할지라도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日朝塵)이라, 사흘 닦은 마음은 천 년 동안 길이 남을 보배요, 백 년 동안 탐한 물질은 하루 아침의 티끌이라는 말씀을 깊이 명심하고 모두가 마음공부에 힘써야 할겁니다. 마음공부하고 탐심을 줄이다 보면 온갖 문제가 저절로 없어지고 진실로 살 만한 세상이 될 겁니다."

- 스님, 감사합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