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에세이] 성찰 없는 시대에 ‘신미대사 찾기'

2019-08-23     김택근

영화 <나랏말싸미>가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영화 속 신미대사가 스크린 밖으로 끌려 나왔 다. 요즘 신미를 폄훼하는 자들의 눈길에는 성찰 이 들어 있지 않다. 그저 날카로울 뿐이다. 무엄 한 일이다. 새삼 몇 년 전 신미가 주석했던 복천암을 찾 았을 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회주 월성 스님은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역’임을 확신했다. 월 성 스님이 내민 「복천사지」에는 한글 창제를 주 도했음 직한 여러 정황들이 실려 있다. 「세조어제 원문」, 「영산 김씨 세보」, 「복천보장」, 「상원사 중 수 권선문」 등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우리는 한글 하면 세종을 떠올린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실록에 그리 전 하고 있다며 이설(異說)은 철저히 경계하고 배척 한다. 한글문화연대의 <나랏말싸미> 관련 논평 중에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설은) 세종을 남 의 수고 가로채 자기 위신 세우려는 나쁜 임금, 못난 임금으로 몰아갈 위험이 매우 높다”라는 대 목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는 여백 이 없다. 어찌 왕이 혼자서 나랏말씀을 창제할 수 있는가. 아무리 재능이 특출해도 엄중한 국사를 밀 쳐두고 왕이 홀로 작업을 했을 리 없다. 분명 누 군가의 조력을 받았다. 그들이 누구일까. 집현전 학자는 아닌 듯하다. 한글을 창제한 직후 최만리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 를 올린다. 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었다면 반대 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종은 조 력자들을 밝히지 않았을까.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유교의 나라에서는 밝힐 수 없는 사람들 이라면 스님들이 아니었을까. 신미는 속명이 수성(守省)이고 문장가 김수온 의 친형이다. 10살에 사서삼경을 독파했고, 이후 에는 대장경에 심취했다. 범어와 티베트어를 공 부하여 40세 즈음에는 막힘이 없었다고 전해진 다. 신미는 아마도 범어 원전을 원음대로 옮기고 싶었을 것이다. 뜻글자인 한자는 범어를 음역하 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신미는 소리글을 만들어 보고 싶었을 것이다. 대제학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전 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 게 보기와 뜻을 들어 보이시면서 이름하여 훈민 정음이라 하셨다. 꼴을 본뜨되 글자가 옛날의 전자와 비슷하다”고 밝혔다.

여기서 본뜬 글자가 ‘옛날의 전자(古篆)’라 함은 여러 설이 있다. 범자 및 티베트어 기원설, 몽골 파스타 문자 기원설, 태극 사상 기원설 등이다. 그중 범자에서 따왔다 는 설이 가장 오래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신미 와 동시대 인물인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한글 은 범자에 의지해서 만들었다”고 했고, 이수광도 『지봉유설』에서 “언서(諺書)는 글자 모양이 범자 를 본떴다”고 했다. 세종이 소리글을 탐구했던 신미에게 도움을 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종은 ‘한자의 기득권’ 을 지닌 집현전 학자들은 멀리하고 안평, 수양대 군과 신미를 중심으로 학조와 학열대사 등 승려 들에게 따로 새 글을 연구하라 일렀다고 한다. 그 연구 공간이 대자암, 현등사, 진관사, 흥천사, 회 암사 등이었다고 한다. 불가에서 내려오는 얘기 이다. 그렇다면 신미의 업적은 왜 정사에 나오지 않을까. 아마 억불숭유의 시대였기에 승려들이 한글 창제를 도왔다면 결코 이를 반포하고 유포 시킬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공적을 감 춰야만 유림들로부터 신미와 한글을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자. 유교 국가임에도 왜 최초의 한글 번역서들이 불교 경전이었을까.

가장 먼저 『석보상절』, 『능엄경언해』, 『월인천강 지곡』 등을 지었을까. 또 세종이 아들 문종에게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祐國利世 圓融無碍 慧 覺尊者)’라는 법호를 신미대사에게 내리라고 유언한 것은 어인 일인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 롭게 했다(祐國利世)’는 것으로 미루어 신미대사가 매우 큰일을 한 것 아니겠는가. 비상시국이 아닌 세종 때에, 더욱이 승려에게 이런 법호를 내림은 ‘나라 글을 만드는 데 큰일을 했음’이 아니었을 까. 또 훗날 세조가 숱한 명찰들을 놔두고 신미가 주석하고 있던 작은 절 복천암(사)을 찾아간 것은 어찌 바라봐야 하는가. 신미를 추적함은 그를 떠 받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신미가 한글 창제를 도 왔다면 어디 공을 세우려 했겠는가. 글이 있되 글 을 모르는 민초들을 보듬으려 했음이 아니던가. 불경이 있되 불경을 모르는 중생들을 깨우치려 했음이 아니던가. 역사 왜곡 논란에 목청을 높일 일이 아니다. 한글이 살아있으니, 그 글로 부처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전하면 될 일이다. 살아서 펄떡이는 한글 경전을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신미대사를 찾는 일이 될 것이다.

 

김택근 시인, 작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오랜 기간 기자로 활동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