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하루 여행] 푸른 바다와 섬들이 손짓하는 곳

남해

2019-08-23     양민호

바캉스의 계절, 여름을 맞아 남해로 떠났다. 짧은 하루 여행이지만, 잠시 일상의 짐을 훌훌 떨쳐버리고 남해의 푸른 바다를 둘러보며 마음을 쉬었다. 긴 여름이 무르익고 있었다.

#남해 보리암

‘북상하는 태풍의 영향으로 하루 종일 흐리거나 비가 내리겠습니다.’ 아침 일기예보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래서 남해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을 까. 이른 새벽, 겨우 잠을 뿌리치고 일어 나 짐을 싸는 마음이 무겁다. 끄무 레한 새벽하늘을 하염없이 바라 보며, 보리암으로 향했다. 보리암을 오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제1주차장(복곡주차장, 성수기 승용차 기준 주차료 5,000원)에 차를 대고 셔 틀버스(왕복 2,500원)를 이용해 제2주 차장까지 가서 걸어 올라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제2주차장까지 차를 가지고 올라가 는 것이다. 8월이라 성수기이긴 하지만,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찌감치 나선 덕에 제2주차장까지 차 를 가져갈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걸어서 15분 정도 오르면 보리암이다. 희미하게 비치는 가로 등 불빛을 따라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오른다. 거세게 불어오는 동풍이 해무를 잔뜩 눈앞에 늘어 놓는다. 10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길, 쏟아지는 땀과 습기로 금세 온몸이 축축하게 젖는 다. 무거워진 몸만큼이나 마음도 무겁다. 일출에 대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보리암에 도착했다. 캄캄하다. 예상 일출 시 각이 10분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남쪽의 섬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먼저 와서 해수관세음 보살상 앞에 자리 잡은 사람들 역시 일출 감상은 포기한 낌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 광전(普光殿)에 들어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 전에 삼배 올리며 기도를 드린다. 보리암이 어떤 곳인가. 우리나라 수많은 기도처 가운데 가장 영험하기로 소문난 곳 아닌가(3대 기도처든 5대 기도처든 남해 보리암은 무조건 들어간다).
그런 곳인 만큼 먼 길 달려온 이의 작은 바람쯤은 흔쾌히 들어주시리라. 법당을 나와 화엄봉 아래 자리를 잡았다. 보 리암에서 일출과 다도(多島)를 감상할 수 있는 포 인트는 여러 곳이 있는데(사실 어디서든 잘 보인다), 해수 관세음보살상 앞과 화엄봉 아래, 그리고 조금 올라가 금산 제1경이라는 망대가 있는 금산 정상 (681m)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서서히 날이 밝아 온다.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남해의 절경 이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낸다. 눈앞으로는 남해 에서 가장 빼어난 풍경을 자랑한다는 상주은모 래비치, 저 멀리 바다 위로는 겹겹이 선 크고 작은 섬들이 비죽비죽 솟아오른다. 비록 삼대가 공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출은 아니었지만, 장 엄한 남해의 시작을 목격했으니 말로만 듣던 보 리암의 기도빨(?)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밀려오는 얕고 두터운 구름 들, 붉은빛 감도는 아침 바다와 하늘이 사방에 형 용할 수 없는 신령스러움을 더한다. 자연이 펼쳐 보이는 환상의 파노라마를 흠 뻑 감상하고 다시 보리암으로 내려온다. 법당에 들어가, 이번에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불현듯 던진 욕심 같은 바람조차 아낌없이 들어주는 불 보살님의 자비로움에 삼배! 그러고서 법당을 나 오는데, 맞은편 예성당(禮聖堂, 설법당) 주련의 글귀 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첨앙제번뇌(暫時瞻仰除煩 惱, 잠시 우러러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넉넉히 보았으면 홀가분하게 돌아가라 이르시는 말씀 인 듯하다. 욕심 많은 한객은, 그 말씀 잠시 유예 하고 보리암 구석구석을 둘러본다. 석불전 부처 님께 합장 인사 올리고, 해수관세음보살님께도 예를 갖춘다. 극락전에 들러 만불(萬佛)을 뵙고, 태조 이성계가 100일 기도를 올렸다는 선은전(璿 恩殿)까지 다녀온 다음에야 비로소 하산길에 오 른다. 내려가는 길이 오를 때보다 여유롭다. 잠에 서 깬 짙은 녹음이 흙길 위로 쏟아진다. 그 길 따 라 나이 지긋한 어르신부터 방학을 맞은 어린 학 생들까지, 주말을 맞아 보리암을 찾은 사람들 행렬이 줄지어 섰다.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일까. 바짝 치켜든 고개가 다들 보리암을 향하고 있다.

 

INFORMATION

남해 보리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의 말사이다. 신라 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수도하던 곳으로, 스님은 이곳을 보광산(普光山) 보광사(普光寺)라 불렀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그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현종 때 이곳을 왕실 원당으로 삼고 절 이름을 보리암(菩提庵), 산 이름을 금산(錦山, 명승 제39호)으로 바꾸었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군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관음성지로 손꼽힌다.

성인 1,000원 | 단체 800원 | 초중고등학생 무료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보리암로 665(상주리 2065) | 055-862-6500

#가천 다랭이 마을

가천 다랭이 마을을 찾았다. 이곳은 산자락을 따 라 100여 층, 680여 개의 다랑이 논(명승 제15호, 계단 식 논)이 펼쳐져 있는 작은 시골 마을로, 앞쪽으로 탁 트인 바다와 마을의 자연 경관이 절묘한 조화 를 이뤄 ‘CNN 선정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 3 위’에 뽑히는 등 남해 최고의 관광 명소로 손꼽힌 다. 남해군에서 2002년부터 이곳을 농촌체험 마 을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는데, 마을 안길을 돌며 각종 체험거리와 먹거리를 접할 수 있다. 그 명성 답게 마을 위 해안도로 가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그런데 다들 멀찍이 서서 구경만 할 뿐, 쉽사리 마을 안쪽으로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한낮의 태양 탓이다. 마을 입 구 안내판을 보니, 꼼꼼히 다 돌아보려면 꽤나 시 간이 걸릴 듯싶다(4.8km) . 단단히 각오하고 출발한 다. 좁은 길이 사방으로 갈라진다. 조삼모사지만, 일단은 편한 아랫길로 접어든다. 얼마 안 가 마을 자랑거리인 암수바위가 나온다. 나란히 놓인 두 바위가 각각 남성의 성기와 만삭 여인이 누워 있 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암수바위라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원래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선돌 (立石)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바다와 마을을 지 키는 수호신으로 성격이 변했고, 지금은 미륵불 (彌勒佛)로 불린다고 한다. 온 김에 기운(?) 좀 받아 갈 겸 금세 달아오른 몸의 열기도 식힐 겸 앞쪽 벤 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마을 끝 넘실대는 푸 른 바다가 이리 오라 손짓한다. 다시 길을 나선다. 한적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기웃댄다. 사람 그림 자 드무니 시골 정취가 물씬 풍긴다. 한 시간쯤 걸 었을까. 점점 쉬는 간격이 좁아지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더 무리했다간 탈이 나지 싶다. 아직 돌 아보지 못한 길이 여럿이지만, 제쳐두고 마을 끄 트머리에 있는 정자로 직행한다. 드넓은 바다로 부터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땀을 훑어가고, 벼랑 아래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온몸으로 상쾌함이 퍼진다. 이 바닷바람은 얼마나 오랫 동안 많은 이들의 땀과 더위를 씻어줬을까. 등 뒤 로 차곡차곡 쌓인 논들을 바라본다. 저 논은 현주 네, 저 논은 미정이네… 소달구지 하나 지나기 힘 든 좁은 논과 두렁에서 맨손으로 농사짓고 자식 들을 길러냈을 주름진 얼굴이 하나둘 그려진다.

INFORMATION

가천 다랭이 마을은 보리암에서 차로 40여 분 떨어진 곳에 있다. 굽이진 남면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하며 경치를 감상할 수도 있고, 남해 바래길 트레킹 코스(1코스 다랭이지겟길과 2코스 엥강다숲길 교차점)를 따라 걸을 수도 있다. 매년 7월부터 10월까지 ‘다랭이마을 달빛걷기’ 축제를 진행하는데, 다랭이마을의 역사와 문화, 자연생태에 관해 듣고 소원 풍등 날리기 등을 체험해 볼 수 있다.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남면로 679번길 21 

055-863-3839(다랭이마을 관광 안내소)

달빛걷기신청 www.darangyi.go2vil.org

 

# 남해 상상양떼목장 & 충렬사

남해를 돌아 나오는 길. 하동군과 맞닿은 서북쪽 설천면에 위치한 상상양떼목장에 들렀다. 편백 나무 숲에 둘러싸인 10만 평의 너른 대지 위로 양 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목장은 크게 제1-3목장, 앵무새체험관, 편백숲 산책로, 소공 원(1· 2), 전망대, 연못쉼터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여느 목장과 차이가 있다면 바로 숲과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다. 전망대에 올라 멀 리 바라다보니 동화 속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 다. 해안에서 보는 경치와는 또 다른 멋이다. 아 래로 내려가 낮은 울타리 따라 목장 사잇길을 걸 어본다. 멀찍이 풀을 뜯던 양들이 손에 들린 사료 바구니를 보고는 잽싸게 달려온다. 바구니를 내 밀자 서로 먼저 먹겠다고 머리를 들이미는데 휴, 다들 힘이 장사다. 요란한 밥그릇 싸움에 반은 바 닥에 흘려버리고, 순식간에 바구니가 거덜이 난 다. 여기저기서 그렇게 양들과 씨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즐거운 외침이다. 싱그러운 숲과 나무, 푸른 바다, 맑은 공기,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광경에 절로 미소 지어진 다. 함께 온 연인, 친구, 가족들과 추억을 쌓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들, 그 틈으로 기분 좋게 오늘 소풍을 마무리한다. 상상양떼목장을 끝으로 계획한 남해 여행 일 정은 끝이 났다. 돌아갈 일만이 남았는데, 노량대 교를 건너기 전 발길 끄는 곳이 있어 잠시 차를 세웠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 국하고 처음 유해를 모셨던 곳, 남해 충렬사(사적제233호)다.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과 그 뒤로 조 성된 가묘를 둘러보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수백 년이 흘렀어도, 비록 총칼은 들지 않았어도, 여전 히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두 나라. 역사는 쉬이 다시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 

INFORMATION

내비게이션으로 ‘상상양떼목장’을 검색해 찾아갈 때는 가는 길을 잘 확인하길 바란다. 자칫 샛길로 들어서는 수가 있는데, 좁고 경사진 산길이라 운전하기 까다롭다. 목장 운영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입장료는 성인 9,000원, 소인 6,000원이다(입장 시 인당 사료 한 바가지를 지급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입장이 가능하다.

경남 남해군 설천면 설천로 775번길 364

055-862-5300

싱그러운 숲과 나무, 푸른 바다, 맑은 공기,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광경에 절로 미소 지어진다.

충무공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 앞, 태극기가 높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