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나는 불교] 우리는 행복한가? / 김천

영화

2019-08-22     김천

가장 행복한 나라,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곳으로 흔히 부탄이 이야기된다. 물질의 풍요가 행복과 반드시 일치되지 않는다는 증례로 부탄, 방글라데시, 필리핀의 국가 행복지수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선진국보다 높다는 주장도 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동의하지 않고 있으며 때로는 통계의 오류로 지적되기도 한다. 특히 부탄의 경우는 국가가 국민행복지수라는 것을 정해 자신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UN에서 올해 발표한 행복 지수 상위의 국가들은 모두 북유럽의 국가들이다. 2013년에 핀란드 출신의 토머스 발머 감독이 제작한 영화 <행복(Happiness)>은 소위 행복한 부탄의 가장 깊은 속살을 보여주고 있다.

80분 남짓한 다큐멘터리 영화 <행복>은 부탄에서도 가장 오지인 라야 마을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8살짜리 소년 페양키가 출가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장마가 끝나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 홀로 아들을 키우던 어머니는 소년을 절로 데려갔다. “출가의 이유가 뭐냐?”는 주지스님의 질문에 “아이가 학교를 싫어한다”고 답한다. 8명이 살던 절은 “텔레비전을 보려고 떠났다”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도시로 가버려서” 이제 막 출가한 페양키를 포함해 3명의 스님이 살아간다. 자신보다 한두 살 정도 더 나이든 사형과 함께 경을 외던 페양키는 가끔 마을 학교로 가서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돌아온다. “학교는 정말 재미있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결국 그의 어머니가 말한 ‘학교가 가기 싫어’ 출가했다는 이유는 거짓이다.

부탄은 가장 은둔한 국가이다. 1999년에야 인터넷이 보급되고 텔레비전 방송이 허용됐다. 인도와 티베트 국경 히말라야에 위치한 티베트 문화권의 불교 국가로 왕은 용왕의 후손으로 불리고, 국교는 불교이며 현재의 국왕 직메 왕축이 2008년 왕국에서 입헌군주제로 체제를 바꾸었다. 부탄의 왕이 나라 곳곳을 찾아가 국민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 미디어를 통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부탄은 자연스레 가장 행복한 나라, 사람들은 정신적 가치를 지향하며 빈곤을 극복하고 행복을 느끼는 나라로 선전한다. 그러나 그런 풍문들은 과연 사실일까?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지막 마을 라야에 전기 시설을 하기 위해 공사가 시작되자 페양키의 삼촌은 야크 소를 팔아 텔레비전을 사겠다고 결심한다. 이웃들은 “텔레비전을 보여주고 돈을 벌 수도 있다”고 부추기고 “이왕이면 큰 거로 사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어렵사리 사온 텔레비전은 말 등에서 흔들리다가 결국 고장이 났다. 아내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구박하고 그는 “또 살 것이다”라고 대꾸한다. 물질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채우지 못한 욕망은 더 큰 고통을 가져온다. 욕망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불행의 상처도 더 깊다.

페양키는 늘 같은 경전을 외우고 또 외우지만 이해할 수 없다.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께서 늘 그러하듯이, 지혜는 자비심으로 나타나고…” 처음 출가하던 날 스승께 예를 올리고 “이제부터 오직 세상의 모든 생명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약속하였지만 그의 육신은 어리고, 세속이 그리웠다. 페양키는 형과 같은 사형에게 “아버지가 숲에서 곰을 만나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하고, 어머니가 자신을 절로 보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절에서 보낸 잠시 동안 소년은 훌쩍 웃자라버렸다. 삼촌은 그에게 “텔레비전을 사러 도시에 함께 가자”고 권했다. 페양키는 “어머니가 허락하면 따라가겠다”고 약속한다. 어머니는 소년에게 도시에 가면 사무원으로 일하는 그의 누나를 꼭 만나보라고 부탁했다. 건강하게 자란 야크 한 마리를 끌고 조카와 삼촌은 산자락을 굽이굽이 넘었다. 다행히 야크는 후한 값을 받았고 상인은 여행이 평안하고 꼭 좋은 텔레비전을 구하라고 축원한다.

페양키는 처음 타보는 자동차가 너무나 신기하고 신났지만 멀미 때문에 크게 앓아야 했다. 지나친 기쁨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부탄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수도인 팀부는 페양키에게 눈부신 문명 세계였다. 거리에 취한 채 잠든 사람을 보고 페양키는 묻는다. “이 사람은 행복한가요?” 그의 삼촌은 단지 술에 취해 있을 뿐이라고 답했다. 물질에 취해 있는 우리는 행복할까? 약물과 술로 도취의 쾌락에 젖을 때도 행복할까? 권력과 명성의 정점에 서면 행복할 까? 페양키의 질문은 고스란히 “우리는 행복한가?”로 돌아온다. 야크를 처분한 돈의 대부분을 지불하고 텔레비전을 샀지만 소년의 누나는 일한다던 곳에 없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그는 야릇한 조명 속에서 춤추는 누나를 만날 수 있었다. 도시로 일하러 간 누나는 댄서가 되어 있었다. 마을로 돌아오자 그의 스승은 남쪽으로 떠났다. 절에 자물쇠를 채우며 언젠가 다른 스승이 와서 페양키와 그의 사형을 돌봐줄 것이라 이야기 했지만 속절이 없다. “마음의 행복과 평화로움이 진흙탕 같은 세상에서 지켜줄 것이다”라는 마지막 축원은 공허하다. 두 어린 스님은 가사를 날개처럼 펼친 채 스승이 없는 대지를 뛰어다녔다.

페양키는 어머니에게 누나가 댄서가 됐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전기가 들어오자 마을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프로레슬링에 눈을 떼지 못하고 빠져들었다. 페양키는 텔레비전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보고 삼촌에게 묻는다. “저것들이 진짜인가요?” 우리들은 때때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헤매인다. 부처님은 일체에 자성이 없고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셨지만, 돈은 아름답고 현세는 영원하며 명예와 권력은 절대적이라 믿는다. 영화가 여기까지 왔을 때 부탄이 가장 행복한 나라인가 아닌가는 별 의미가 없다. 물질이 있으면 행복할까, 물질을 떠나 행복할 수 있을까의 질문은 어리석다. 행복은 불행을 떠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을 얻어야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불행해도 행복할 수 있고, 미망 속에서 윤회를 거듭해도 우리 안의 보리심을 깨달을 수 있다. 행복은 보살로서 살겠다는 서원과 자각의 문제이며, 가난과 풍요와 물질과 권력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무런 가치 판단과 해설도 없는 이 영화는 그런 점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물질주의도 정신주의도 자본주의도 무지와 깨달음도 아니라는 것을. 다만 우리의 욕망과 집착이 우리를 불행하게 할 뿐이다.

 

● <행복>은 2014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상을 받았다.

●● 이 영화는 미국 공영 방송 홈페이지(pbs.org)에서 영어 자막판을 볼 수 있다.

김천
동국대 인도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방송작가, 프로듀서로 일했으며 신문 객원기자로 종교 관련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여러 편의 독립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지금도 인간의 정신과 종교, 명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