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멸망(百濟滅亡)

연재소설, 원 효 성 사

2007-09-15     관리자


한산벌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위치에 포진한 신라군과 백제군은 서로가 경거망동을 삼가는 눈치였다.
신라군은 태사 원효(太師元曉)가 증원군 3천과 군수물자를 잔뜩 싣고 온 것에 고무되어 금방 싸워도 지난 날처럼 패하지는 않을 것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동병(動兵)하지는 못하고 5∼60명 내보내어 싸움을 돋우는 등 소극적인 움직임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평원광야(平原曠野)에 포진한 지 엿새째가 되던 날 유신 장군은 원효에게 말했다.
"지난 번 말씀한 작전을 전개해 보려는데 대사의 의향은 어떻소?"
"그러잖아도 다시 한번 재진할까 하던 참이었소. 한번 결행해 보시오."
두 수뇌의 대화는 앞서 원효가 권유한 바 있는 작전에 대해서였다. 날랜 화랑 한 사람을 적진으로 보내어 적군을 살상하게 하는 작전이다.
"누가 적임자일까?"
유신 장군은 혼잣말처럼 뇌이면서 출전할 화랑을 마음 속으로 고른다.
"옳지 그렇군."
유신 장군은 곧 김흠순(金欽純) 장군과 품일(品日) 장군을 불러 그의 계획을말하고 어느 화랑을 보내면 좋겠는가를 의논하였다.
김흠순 장군은 유신 장군의 친동생(親弟)이다. 총대장인 형님의 계획안을 듣고 그의 아들인 화랑 반굴(盤屈)을 불렀다.
반굴 화랑은 신라군의 젊은 장교로서 충성심과 효심을 갖춘 모범 화랑이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앞에 반무릎을 끓고 군례(軍禮)를 드린 뒤 여쭙는다.
"그래, 네게 할 말이 있어 불렀다."
"…."
품일 장군은 잠시 말을 끊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다가 굳은 표정으로 반굴을 굽어 본다.
"반굴아."
"예, 장군님."
"화랑오계(花郞五戒)를 기억하고 있느냐?"
"예, 장군님."
"외워 보거라."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유신(交友有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이옵니다."
"음…."
이 화랑오계는 일찍이 원광 법사(圓光法師)께서 일러준 계명이다.
귀산(貴山)과 추항( 項)은 작갑사(鵲岬寺)에 호젓이 안거하고 계시는 원광 법사를 찾아 뵙고 여쭙기를, "저희는 화랑으로서 백제군과 대치하고 있는 최일선에 복무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상생계(不殺生戒)를 제일의 계명으로 가르치셨는데 나라에서는 적군이 침입하면 서슴없이 적군을 죽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계명에 따르자면 나라에 불충(不忠)이 되고 나라의 명에 따르자면 신불자(信佛者)로서 부처님의 계명에 어긋나게 되옵니다.
그렇다면 저희 화랑들은 어떻게 처신해야만 부처님 계명과 나라의 명을 어기지 않게 되겠나이까?"
이 질문을 받은 원광법사는 실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두 화랑의 고충을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그래서 두 화랑에게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일러주었던 것이다.
임금을 섬김에 충성으로써 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하며 벗을 사귐에 믿음이 있어야 하고 싸움에 다달아 물러섬이 없어야 하며 생명을 죽이되 가림이 있어야 하느니라.
대강 이런 뜻이거니와 맨나중 부분의 살생유택(殺生有擇), 즉 생명을 죽이되 가려서 하라는 계명이야 말로 전장에 나간 군사로서 상대국의 군사를 죽여야 하는 의지를 분명히 심어준 것이었다.
이 계명의 가르침을 받은 귀산과 추항은 전장에 복귀하여 동료 화랑들에게 원광 법사의 가르침을 낱낱이 설명해 주었으며 백제군의 침공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그 이후 화랑들은 세속오계를 화랑오계로 받아들여 이 계명을 실천덕목으로 삼아 용감무쌍한 화랑이 된 것이다.
흠순 장군은 아들에게 먼저 화랑오계를 상기시키고는 다시 이른다.
"지금 신라군은 실로 연전연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으냐?" 이런 때 네가 화랑의 참모습을 과시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으면 한다마는 네게 그런 용기가 있느냐?"
" 예, 장군님 명령만 내리시면 단숨에 달려가 적군을 베겠습니다."
"오냐, 고맙다. 어서나서거라."
"옛."
반굴 화랑은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날쌔게 말에 올라 적진을 향해 질풍 같이 달려간다.
이 광경을 신라군은 침묵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백제군에서는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반굴은 맨앞의 백제군을 향해 창을 휘둘러 복을 베고는 다음의 백제군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그를 에워싼 백제군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를 바라보던 신라군 측에서는 의분심이 복받쳐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백제군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드높아지고 있었다.
반굴의 죽음을 가장 분해한 사람은 관창 화랑(官昌化郞)이었다. 관창과 반굴은 고향집에서의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관창은 입술을 깨물며 일어나서 이내 김유신 대장군 앞으로 나아가 군례를 올리며 다부진 목소리로 아뢴다.
"대장군님, 반굴의 원수를 갚고저 하옵니다. 허락해 주소서."
"응? 너는 누구냐? 관창이 아니더냐?"
"반굴은 저의 죽마고우로서 고향에서 출전하면서 함께 싸움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함께 신명을 바치자고 서로 약속(相約)하였사옵니다.
이몸 비록 불민하오나 친구의 원수를 꼭 갚고야 말겠습니다. 출전을 허락해 주소서."
관창은 다름 아닌 품일(品日) 장군의 어린 아들이다. 이제 겨우 16세의 청소년에 불과한대도 본인이 굳이 자원하여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 나선 것이었다.
이를 본 유신 장군은 얼른 허락을 내리지 못하고 곁에 묵묵히 앉아 있는 품일장군을 돌아본다.
품일 장군은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좋다. 네가 정히 원한다면 허락하겠다만 원수를 갚으려면 네 신명을 바쳐야 하는데 가능하겠느냐?"
"예,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사내장부로 태어나서 죽음을 두려워 해서야 어찌 떳떳한 화랑이라 하겠나이까."
"오냐, 장하다."
김유신 대장군이 관창의 출전을 허락하자 관창은 쏜살같이 말에 올라 반굴이 적진으로 갔던 그 길로 달려나갔다.
신라 군사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보낸다. 관창은 단숨에 적진 깊숙히 달려가서 그를 막는 백제군을 전광석화와 같이 날래고 빠른 동작으로 너댓 명을 베었다. 그러자 백제군 측은 졸병이 뒤로 물러섬과 동시에 무술에 능한 장졸 십여 명이 관창을 에워싼다.
백제군의 총대장 계백(階伯) 장군은 관창의 용맹스런 모습을 이윽히 지켜보더니 큰소리로 명령한다.
"죽이지 말고 생포토록 하라."
관창을 에워싼 백제군 십여 명은 단 삼사 합의 접전으로 관창을 말에서 떨어뜨려 밧줄로 꽁꽁 묶는다.
계백 장군 앞에 꿇어 앉은 관창은 섬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적장을 노려본다.
"투구를 벗겨라."
투구를 벗은 관창은 앳된 청소년이 아닌가. 계백 장군은 깜짝 놀라며 묻는다.
"너는 몇 살이냐?"
"나이는 왜 묻소? 어서 목이나 베시오."
"몇 살인고?"
"열 여섯이오."
"응? 열여섯이라고? 신라군에는 너처럼 어린 군사가 많으냐?"
"몇 사람 되지 않지만 모두가 날랜 화랑출신이오."
계백 장군은 고개를 끄덕인다.
"화랑들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는 터이지만 어린 소년들이 목숨을 초개같이 여길 줄은 미처 몰랐구나."
계백 장군은 거푸 화랑들을 칭찬하고 다시 영을 내린다.
"저 소년 화랑을 돌려 보내라."
계백 장군은 아직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관창을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관창은 오랏줄에 묶인 채 말에 실려 신라진으로 돌아갔다. 관창은 유신 대장군 앞에 국궁하고 적장과의 대화 내용을 아뢰고 여쭈었다.
"이번에는 적장을 베지 못하였지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반드시 적장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관창의 비장한 각오를 들은 유신 대장군은 다시 출전하기를 허락했다. 관창 화랑은 재차 적진으로 달려갔으나 이번에는 단 한 명도 적군을 살상하지 못하고 이내 붙들리고야 말았다.
계백 장군은 관창의 용감한 충성에 감복하면서도 그를 살려둘 수는 없었으므로 관창의 목을 베어 그의 말에 실어 보냈다.
관창의 의로운 죽음을 본 신라군은 모두가 의분심을 돌발하여 일제히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오만 명과 오천 명이 맞붙은 싸움은 황산벌을 피로 붉게 물들 였다. 오천의 백제군은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으며 신라군도 거의 절반을 잃었다.
계백 장군의 오천 군은 사비성을 지키는 군사였는데 그 군사가 전멸을 당하자 사비성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무혈입성(無血入城) 하였다.
백제의 최후의 왕인 의자왕(義慈王)은 간신히 탈출하여 웅진성(熊津城)으로 피신하였지만 뒤쫒아간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생포되어 마침내 항복하고야 말았다.
사비성이 함락당하게 되자 의자왕을 시중 들던 3천 궁녀는 적군에 잡혀 죽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겠노라며 낙화암(洛花岩) 절벽에서 백마강(白馬江)으로 몸을 던져 의로운 최후를 장식하였다.
사비성을 함락시킨 신라군은 전승(戰勝)의 기쁨을 누릴 사이도 없이 당군(唐軍)과의 일전을 치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군은 백제를 멸한 여세를 몰아 신라군을 칠 계략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계략의 일환으로 당군은 웅진성에 5만 대군을 포진시키고 나머지는 선편으로 귀국하였으며 신라군은 사비성에 일만 명의 군사를 남겨 놓고 모두 서라벌로 돌아갔다.
유신 대장군과 원효는 상감을 중앙에 모시고 양 옆에 바짝 붙어 말을 몰았다. 너무도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치른 뒤여서 서로 입을 굳게 다문 채 서라벌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었다.
-계속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향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