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암자의 숨은 스님들] 상극한 것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는 거라!

견성암 종고 스님

2019-07-25     이광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지리산에 7암자 코스가 셋 있다. 하루 등산하기 좋을 거리의 7개 사암(寺庵)을 묶어 당일 코스로 만든 것이다. 왜 하필 일곱 개일까 하면, 불교에 칠정[喜怒憂懼愛憎欲]이 있고, 안이비설(眼耳鼻舌)의 구멍도 일곱 개[七竅]이고, 저 일곱 선녀가 내려앉은 칠선계곡이 있고, 허황후의 일곱 왕자가 성불한 칠불사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일곱으로 묶는 것이 그럴싸하다. 윤달 삼사(三寺) 순례만 해도 무병장수 극락왕생인데, 하루 7암자는 그 수치만으로도 벌써 두 배가 넘으니, 공덕도 그만 못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지리산도 어지간히 다녀보면,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매번 종주만 하고 다니기도 그렇다. 굽이굽이 열두 폭 치맛자락을 하나씩 파고 들어가 보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는 것인데, 말하자면 총론에서 각론으로, 중급에서 고급으로 산에 다니는 실력이 느는 것이다. 그 대상으로 7암자만 한 것이 없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빠듯하게 걸어야 7암자를 다 돌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뭔가 뿌듯한, 분명 장수할 것 같은 성취감이 밀려온다. 그것이 매력이다. 제일 유명한 코스가 삼정산 능선이다. 도솔암 → 영원사 → 상무주암 → 문수암 → 삼불사 → 약수암 → 실상사. 북쪽에서 지리산 주능선의 장쾌하고 시원한 곡선을 조망할 수 있다. 그다음이 ‘헛절’ 7암자다. 지리산 동북부 쪽으로 절은 사라지고 암자 터[庵址]만 남은 곳을 다니는 코스다. 적조암 → 지장사터 → 금낭굴암터 → 선열암터 → 유슬이굴암터→ 고열암터 → 신열암터. 조선의 문신 김종직이 함양 태수를 하던 시절(1472), 지리산을 5일간 둘러보고 산행기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는데, 거기에 지장사 선열암·신열암·독녀암·고열암등 많은 사암이 나온다. 현존하는 것은 없고, 터만 남아 사람들이 그 기록을 따라 돌아다니는 것이다. 지리산 남쪽으로는 구례 천은사로 시작하는 7암자 코스가 있다. 천은사 → 견성암 → 수도선암 → 상선암 → 우번대 → 삼일암 → 도계암. 천은사에서 출발하여 노고단 근처까지 U턴하여 돌아오면서 천은사 산내 암자를 망라하는 것이다. 이 코스가 제일 짧고 수월하다. 거기 견성암을 찾아가는 길이다.

“스님, 천은사 입장료 폐지한 뒤로 좀 달라진 게 있습니까?”
“석 달 되어 가는데, 달라진 게 뭐 있겠나?
매양 비슷하지”

천은사에서 산길로 10여 분 올라가면 견성암(見性庵)이 있다. 거기 종고 스님이 개 하고 둘이 산다. 풍산개라 풍채도 좋고 야무지게 생겼다. 풍산개 세 마리면 호랑이하고도 맞장을 뜬다는것인데, 가끔 절 근처에 내려오는 멧돼지를 물어 죽이는 모양이다. “살생의 업이 큰일”이라고 스님이 그런다. 나는 지리산 갈 때 가끔 여기들러 차도 한잔 얻어 마시고, 이런저런 세상사는 얘기를 듣고 나오기도 한다. 일전에 천은사에 출가하겠다고 온 사람이 있어 기쁘게 반겼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가 좀 많았다. 환갑을 넘겼으니, 행자가 아니라 큰 스님 뻘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행자 방에 박을 반으로 쪼개 적어 걸어 놓은 ‘하심(下心)’과 ‘묵언(黙言)’을 배우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잇값을 한 것이다. 스님들이 뭐라 해도 행자 오불관언이었다. 절 마당을 쓸라고 스님이 일을 시키면, 딱 뒷짐을 지고는 “그러는 스님은 몇 살이냐?”고 되묻는 것이다. 난감한 일이다. 스님들이 대책 회의를 거듭한 끝에 견성암으로 종고 스님을 찾아왔다. 그래서 스님이 그 길로 내려가 단칼에 제압해버리고 말았으니.

“행자 이리 와봐라, 행자 나이가 얼마고?”
“허허 내가 환갑이 넘었는데…요.”
“아 그래? 그러면 이순(耳順)이구나. 혹 종심(從心)이라고 들어봤나?”
종심은 종고 스님 나이 일흔이다. 그랬더니 행자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스님께 사죄하더라는 것이다. 종고 스님이 그 한 칼에 행자의 버릇을 잡았는데, “내가 법랍 40년이 넘어서 임제의 할(臨濟喝)도 아니고, 덕산의 방(德山棒)도 아니고, 법(法)이 아닌 나이로 행자를 제압해버렸다니까!”하는 호방한 말씀에 우리는 한참을 깔깔대고 웃었다. 그렇게 웃었지만, 갈수록 출가자는 줄고, 늙고, 그것이 지금 우리 불교의 현실이다.
“스님, 통행료 문제는 대승적 결단이라고들합니다만, 어떠신가요?”
“대승, 좋은 말이지. 대승이라는 말은 화엄사 천은사가 큰 결단을 내렸다는 것인데, 말이야 맞지만 뒤집어 봐요, 그동안 폐지가 안 됐던 것이 다 절 탓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거라. 우리가 산적 소리까지 들어가며…. 내가 이 문제는 할 말이 많아요.”
천은사는 828년 통일신라 시대 창건된 유구한 전통 사찰이고, 절 땅이 2백여만 평에 이른다. 여의도의 약 3배에 달하는 엄청난 넓이다. 정부는 1967년 지리산을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로 지정한다. 이때 절 땅의 대부분이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면서 재산권 제약을 받게 된다. 게다가 당시 군사정권이 작전 도로를 내고 88올림픽 때 포장까지 해서 국유지처럼 임의로 사용해 왔다. 국가가 사유지를 보상하지 않고 무단 점용한 것이 이 문제의 발단이다. 천은사는 그동안 문화재 보호와 수행 환경을 위해 ‘문화재구역 입장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32년 흘러 지난 4월 29일 폐지된 것이다.
“그 길이 노고단 가는 길이라 사람들이 관람료 때문에 불편해했던 것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에요. 하지만 일의 선후는 알아야지. 당시 군사정부가 백성을 우습게 알 때요. 사유지를 마음대로갖다 써 버린 것이 문제의 시작이요. 산적 질은 정부가 한 거야.”
“앞으로가 문제네요.”
“나는 잘 됐다고도 봐요. 천은사 살림이 가난해지겠지만, 부자 되려고 중 된 것은 아니잖아? 없는 대로, 본시 출가하던 마음으로 살면 되지. 앞으로가 문제요. 천은사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입술이라.”
우리나라 국립공원 안에서 입장료를 받는 사찰이 24곳이다. 적게는 1천 원에서 많게는 5천 원까지 받는다. 이 중 9곳은 사찰 입구에 매표소가 있어 논란이 없다. 하지만 15곳은 천은사처럼 매표소가 사찰 입구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문제가 도미노로 번져가지 않을까 스님이 걱정하는 것이다.
나는 입장료에 찬성한다. 석굴암 같은 세계적 문화유산, 혹은 수많은 국보와 보물의 불교 문화재는 그 대가를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것이며, 외국에서도 문화재 관람이 공짜인 곳은 거의 없다. 나는 다만, 그 입장료를 전액 조계종 총무원에서 관리하고, 전액 승려의 노후 복지를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계종의 노후 복지 수준은 정말 아프리카 국가에 버금갈 것이다. 생로병사중에서 적어도 질병만큼은, 무욕의 삶을 살아온 승려에게 걱정 없도록, 해결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입장료를 그런 데 써야 맞다. 문화재는 선대의 유산이다. 한마디로 조상 덕인 것이다. 그 빼어난 불교 예술 작품들이 특정 사찰이나 문중의 소유가 아니듯이, 그 입장료 역시 전체를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차는 연하게 먹는 것이 좋아”

 

종고 스님, 차 박사다. 천은사 너른 산자락 1만 평이 차밭이다. 처음 대밭 사이에 차가 자생하던 소규모 죽로차 밭이 있었다. 밀림 같은 대밭을 거의 베어내고 큰 차밭으로 만들었다. 천은사 주지할때 빼고, 근 10여 년 차 농사를 지어 왔다. 지금은 화엄사 구층암 덕제 스님에게 다 넘겼다.
“이제 차는 안 만들고 차를 마시기만 하지요. 차를 좋아하니까 차가 잘 굴러와요. 차가 내 앞에 와서 그래요, 저도 예뻐해 주세요. 차는 고급차 비싼 차가 좋은 게 아니라. 차는 색향기미(色香氣味)라 하는데, 기운이 있어야 좋은 차지. 보이차 오래됐다고 좋은 게 아니고. 차 담은 지 얼마 안된 청차라도 연하게 기운을 느끼면서 마시는 게 좋은 거라.”

“스님, 차가 굴러옵니까?”
“그럼 굴러오지. 인생이라는 것이 흘러가는것이 아니야, 굴러가는 거야. 흘러가는 것은 그냥 강물처럼 쭉 흘러서 가버리는 것이고, 성쇠 흥망, 있고 없음, 생로병사와 같이, 상극한 것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굴러가는 것이거든, 이것이 다하면 저것이 오고, 저것이 다하면 이것이 오고, 차가 다 떨어지면 또 차가 생기고,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는 거라.”
가만 생각해보면, 7암자를 다니는 것이 무병장수 안 할 수 없게 생겼다. 산길을 걸으며 물 한모금 마시고 몸도 튼튼, 암자 스님에게서 한 소식 얻어듣고 마음도 튼튼. 그래서 하루는 7암자를 돌아보려고 나서시거든, 혹은 천은사를 시발로 남쪽 7암자 길에 오르시거든, 꼭 견성암에 들러 종고 스님께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가시라. 스님께 허락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떠나오는 길에 “어떤 차가 좋은 차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좋은 차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 마시는 차”라고 했으니, 암자에 들르는 누구인들 반기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이광이
60년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따라 대흥사를 자주 다녔다. 서강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와 더욱 친해졌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냈고, 도법 스님, 윤구병 선생과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책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