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들] 서예(書藝), 진솔한 마음을 화선지에 담는 일

서예가 김상지

2019-07-25     양민호

 

 

지난 6월 1일, (사)한국미술협회가 주최하는 제38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 부문 역대 최연소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상지(30) 서예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청년 불자 서예가의 수상 소식에 미술계는 물론 불교계의 이목이 한데 쏠렸다. 달관의 경지를 그린 옛 시인의 글을 물 흐르는 듯한 필체로 한 폭의 화선지에 담아낸 젊은 서예가, 그를 만나러 경주로 향했다.

 

공부보다 서예가 좋았던 사춘기 학생 인생의 멘토를 만나 서예에 눈뜨다

신경주역에서 차로 30여 분 거리, 경주 시내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한 행복만당 서예학원. 김상지 서예가의 작업실이자 후학을 양성하는 곳이다. 건물 입구에 ‘역대 최연소 영남 최초’라고 큼지막하게 내건 현수막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작업실 안은 온통 먹 향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사방에 걸린 여러 장의 습작품,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인 문방사우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온몸에 먹칠해가며 붓글씨 쓰던 어린 시절이 까마득하게 떠오르는 풍경이다. 잠시 아련함에 젖어 작업실을 둘러보는 손님에게, 먼 길 와줘서 고맙다며 주인장이 시원한 음료 한 잔을 건넨다. 훤칠한 인상의 청년. 직접 얼굴을 마주하니 서예에대한 평소 생각,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나 어울리는 무엇’이라는 고정관념이 불쑥 솟아올라 왠지 모를 낯섦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부드러운 듯 힘 있게 써 내려간 붓글씨처럼차분하면서도 당찬 태도, 겸손하지만 확신에 찬말투에서 금세 서예가다운 면모가 전해진다.
“처음 서예를 시작한 건 1998년, 초등학교 1학년 땝니다. 다른 친구들은 다 국영수 학원 가는데, 저희 부모님은 성적보다 인성 기르는 게 먼저라며 저를 서예 학원에 데려갔어요. 멋모르고따라갔는데 좋더라고요. 그래서 서예에 푹 빠져 살다가 중학교 2학년쯤 돼서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너 서예 계속할래, 아니면 공부할래? 서예 계속할 거면 학원 가서 전화하고, 공부할 거면 학교 가서 전화해라.’ 그러면서 내쫓다시피 저를 밖으로 내보내셨어요. 사춘기 한창 공부하기 싫어할 나이에 제가 어디로 갔을까요? 당장 학원으로 가서 전화드렸죠. 그 후로 지금까지 쭉 서예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보통의 부모라면 어린 자녀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받고 좋은 대학 가기를 바랄 텐데, 조금 별난 구석이 있다 싶었다. 혹시 어려서부터 특출났던 것이 아닌가, 부모님이 그런 재능을 먼저 발견하고 길을 터준 것이 아닌가 싶어 물었더니, 그렇진 않단다. 오로지 부모님은 ‘정직·근면·성실’이라는 가훈처럼 바르게만 자라길 원하셨다고. 심지어 두 분 모두 시장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느라 바빠서 다른 애들이 부모님 손 잡고 대회 나갈 때, 자기는 늘 혼자여서 서러웠다며 투정 부리듯 말한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간 부모님의 수고와 뒷바라지를 어찌 모를까. 언제나 부모님 말씀처럼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그의 말에서 가족을 향한 깊은 애정이 묻어난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부모님이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불교와의 만남이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님이 불교를 좋아하셨답니다. 특히 아버지가 불교 공부를 많이 하셨는데요. 불교 사전을 통째로 외우다시피 하셨다더라고요. 제 이름도 불교 사전에서 따다 최상의 지혜[上智]로 지으셨으니까,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시죠? 그 덕에 저도 어려서부터 불교와 가까이 지냈습니다. 고향이 부산인데, 세 살때부터 통도사에서 운영하는 도심 포교당 유치
원을 다녔습니다. 유년부, 초중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활동까지 풀코스를 밟았죠. 당시 심산 스님(홍법사 주지)이 포교당 주지로 계셨는데, 저를 각별히 돌봐 주셨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큰 은인, 은사라고 할 수 있는 분이죠.”
김상지 작가가 서예가로 성장하기까지 누구보다 심산 스님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현실적인어려움에 부딪힐 때 종잇값이며 생활비 등을 지원해 준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많은 가르침을주었단다.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매번 그의 글씨에 대해 평해주고, 기교보다 깊이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채찍질해주었다고 한다. “늘 제 글씨를 보고 성에 안 찬다고 하셨어요. 기술은 좋은데 깊이가 없다고, 더 공부해야한다고. 그런 경책의 말씀이 좋은 밑거름이 된 게아닌가 합니다. 이번에 상을 받고 처음으로 스님께서 칭찬을 해주셨는데요. 잘했다고, 더 많이 못도와줘서 미안하다고 하시는 말씀 듣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멀고도 험한 예술의 길에서 서예의 아름다움을 전하다

‘ 공희연화호(共喜年華好) 내유수석간(來遊水石間)/
연용개원수(烟容開遠樹) 춘색만유산(春色滿幽山)/
호주붕정흡(壺酒朋情洽) 금가야흥한(琴歌野興閑)/
막수귀로명(莫愁歸路暝) 초월반인환(招月伴人還)’.

제38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김상지 작가가 행초서로 글씨를 써 대상을 받은 당나라 맹호연의 <유봉림사서령(遊鳳鳳林寺西嶺)>이라는 시다. 벗과 함께 산속을 노닐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는내용의 시로, 낭만적이고 유유자적한 삶의 태도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작업실 바닥에 새로 쓴 듯채 먹물이 마르지 않은 작품이 놓여 있었다. 커다란 화선지 위로 물 흐르듯 써 내려간 붓글씨가 작중 화자의 마음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했다. 김상지 작가에게 특별히 이 작품을 고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작품 속 화자처럼,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이 작품을 골랐습니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고, 글씨가 곧 사람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제 마음과작품 내용이 잘 어우러지다 보니까 좋은 결과가나온 게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고 한 번에 뚝딱된 것은 아니고요. 출품하기까지 같은 작품을 천번 정도는 썼던 것 같아요. 그 정도는 해야 되더라고요. 막힘 없이 줄줄 제 글씨를 써 내려가려면요.”

 


자고로 예술가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고 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스스로 만족할만한 글을 이루기까지 쓰고 또 쓰는 서예가의 삶도 그렇다. 누구나 바라는 큰 상을 받기까지, 김상지 작가가 걸어온 길 역시 순탄치만은 않았다 고 한다. 선비같이 고고하고 대쪽 같은 정신을 이어받아 기품 있는 작품을 쓰겠노라 가슴에 새겼던 다짐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이리 치이고 저리치이며 산산이 부서졌다. 졸업을 1년여 앞두고 다니던 대학교를 자퇴하고 6년간 손에서 붓을 놓기도 했단다.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할까요. 힘든 시간이었지만, 반대로 이 길에 대한 신념을 다시 세우는 소중한 시기이기도했습니다. 제 호가 도홍(陶弘)인데요. 학교 다닐 때 지도 선생님이 지어주신 겁니다. 커다란 그릇에 꿈도 담고 지혜도 담고 많은 것을 아울러 담으라고요. 그만큼 그때 저는 다른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래도 지금은 좀 나아지지 않았나 합니다. 욕심을 덜었다고 할까요. 제가 신조처럼 늘 품고 사는 말이 하나 있는데요. ‘서예로 덕 볼 생각하지 말고, 서예가 나를 통해 빛을 보도록 하자’입니다. 은사 스님이 불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씀을 제 상황에 맞게 고친 겁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글씨에 적잖은 꾸밈과 겉멋이 끼어 있다고 평했다. 그런 눈속임을 모조리덜어내고, 진솔한 작품을 써 내려가는 것이 평생의 목표라고. 이를 위해 다시 대학에 들어가 열심히 서예학을 공부하고 매일 겸손한 자세로 글씨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바라는 또 하나의 꿈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서예의 매력을 알고 일상에서 서예를 즐기는 것이다.
“똑같은 글을 써도 매번 느낌이 다릅니다. 화선지 상태에 따라 예상치 못한 먹 번짐, 새로운 선질이 나오거든요. 서예의 매력이죠. 그리고 서예는 좋은 힐링, 명상 수단이 아닌가 해요. 붓을 잡고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다 보면 몰입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어렵지도, 따로 뭘 준비할 것도 없어요. 잠시 시간을 내 자리에 앉아서 마음에 있는 것 그대로를 적으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서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글. 양민호 / 사진. 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