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에세이 - 살며 사랑하며] 직립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 ‘걷기’와 ‘달리기’

2019-07-01     양민호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오면서 살아온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숭고한 행위는 걷기와 달리기다. ‘걷기’부터 생각해보자. 사실 걷는다는 건 곧 ‘생각하는 일’이었다. 인간이 사색하는 동물로 자리 잡고, 사색을 통해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근본에는 ‘걷기’라는 행위가 있었다. 직립 보행을 하면 손의 관절을 이용해 네발로 걸을 때보다 35% 정도의 칼로리가 절약된다고 한다. 인류는 바로 그 남는 칼로리를 뇌에 공급했던 것이다. 손이 발처럼 걷는 것에 주로 활용됐다면 인간의 문명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따지고 보면 고대 로마 문명도 걷기가 만들어낸 문명이었다. 소나 말, 수레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지휘관이 아닌 모든 로마 병사는 걸어서 대륙을 지배했다. 로마 병사가 다져 놓은 길을 따라 지식과 기술이 전파됐고, 이 길은 유럽 문명의 핏줄 노릇을 했다. 로마 군대의 행군 속도와 행군 거리는 장거리 도보 여행의 상한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

중세에 들어서도 인간에게 걷기는 삶의 가장 중요한 일부였다. 이때 걷기는 곧 계급을 의미하기도 했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다니는 귀족이나 기사와 평민들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됐다. 이때부터 ‘걸을 수밖에 없는 사람’과 ‘걷고 싶을 때만 걷는 사람’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높은 계급이었던 ‘걷고 싶을 때만 걷는 사람’들이 바로 18세기 산책 문화를 탄생시켰다. 생존과 상관없는 유희로서 걷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산책은 낭만주의를 발전시킨 하나의 동인이 됐다. 사상가와 문인은 걷기를 통해 세상과 자연과 교감을 시도했다.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잉글랜드와 유럽을 도보 여행하면서 낭만주의 시를 썼다.

인간의 걷는 행위는 역사를 바꿨다. 북아메리카 이주민은 곳곳으로 걸어가서 오늘의 미국을 탄생시켰고, 탐험가들은 극점과 높은 산맥을 인간의 발아래 굴복시켰다.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봉기한 민중은 행진을 통해 세상을 바꿨고 히틀러와 무솔리니 지시에 따라 행군을 시작한 군대는 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했다.

걷기 시작한 인간은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육상 경기를 떠올려보자. 육상은 하나의 미학이다. 결승선을 앞두고 곡선주로를 한 마리 영양처럼 내달리는 육상 선수를 볼 때면 짜릿한 전율이 느껴진다. 오로지 몸 하나로 중력과 바람, 고갈되는 생체 에너지에 맞서 맞대결하는 것, 이것이 육상의 매력이다. 그래서 그럴까. TV에서 육상 경기 중계를 할 때면 채널을 돌리지 않고 꾸준히 경기를 지켜보는 ‘안방 육상팬’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마라토너인 베른트 하인리히 미국 버몬트대학 교수는 사람들이 육상에서 전율을 느끼는 원인을 “달리기는 전혀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강렬한 열정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와 닿는 말이다. 400만 년 전 숲에서 사바나로 이동한 원시 인류에게 달리기는 인간의 가장 일차적인 생존 방식이자 운동 방식이었다.

달리기는 가장 원초적인 생명 활동이다. 오로지 속도와 지구력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일어나는 잡것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행위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기술이나 신념, 허위를 완전히 제거하고 나면 오직 본질만이 남는다. 그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이 달리기다.

달리기는 우리 인생길을 닮아 있다. 인생에는 늘 도달해야 할 곳이 존재했으며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곧 인생이었다. 때로는 외로웠으며, 때로는 숨이 턱에 차도록 힘들었고, 때로는 스스로 실망하며 중간에 포기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시 고개를 들면 언제나 도달해야 할 곳은 존재했다. 그것은 삶이 가진 숙명이자 희망이기도 했다.

그렇다. 베른트 하인리히 말처럼 “달리기는 인생의 기막힌 은유”다.


글_ 허연
매일경제신문 기자, 시인.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현대문학상, 시작작품상, 한국출판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미터』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