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 - 살며 사랑하며] 이미 아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

2019-07-01     양민호

제법 절 근처 좀 돌아다녔답시고 예불도 108배도 염주 꿰기도 새로운 건 하나도 없지만, 가끔 템플스테이 하러 갑니다. 똑같은 조끼를 조로록 입고 경내를 산책하는 재미가 꽤 좋거든요. 당일치기 관광객이 되어 산채비빔밥과 더덕구이 사이에 빠듯하게 시간 내서 전각 여기저기 바쁘게 들여다보고 부처님 숫자 헤아리고 갈 때보다 훨씬 느슨하고, 제법 거주민 같은 느낌도 들어요. 절밥도 맛있고요.

물론 스님과의 차담도 즐겁습니다. 어떨 땐 스승님의 말씀 같고 어떨 땐 동네 사람들과 나누는 하릴없는 수다 같은 이야기들이지요. ‘스님’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슬쩍 풀어주시는 곁에 냉큼 들어앉아서 놀리기도 하고 농담도 톡톡 던지면 착착 받아주시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데요. 그러다 보면 스님 만만해지듯 세상사도 만만해지곤 합니다.

봄의 템플스테이에서 돌아와서 스님과 차담하며 나눈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스님이 이번에 생애 처음으로 차를 사셨대. 새로운 소임을 맡으면서 아무래도 이래저래 필요할 것 같아서. 밀양에서 중고차를 인수해서 절까지 운전해서 오셨다더라고. 그런데, 차를 사니까 그만큼의 고민이 따라오더래. 돈 고민, 기름값 고민, 안전에 대한 고민…. 하나를 소유한 만큼 번뇌도 늘어난다는 걸, 소유를 줄이는 만큼 번뇌도 줄어든다는 걸 이번에 실감하셨다더라고.”

그러자 친구가 한숨을 쉬더군요.

“중생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를, 그 스님은 이번에 겨우 알게 된 거야?”

그러게요. 생각해보니 우리 중생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죠. 겁많은 저는 그래서 운전도 안 배우고 차도 안 샀는걸요. 가끔 스님과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스님이시니까 세상 물정을 모르셔서 그래욧.” 소리가 절로 납니다. 제가 절집 생활을 모르듯, 스님도 중생의 세계를 모르시리라 섣불리 짐작하는 것이지요. 스님 보시기에 괜히 어렵게 사는 나를 방어하고 싶기도 할 테고요.

그렇게 꼬아보기 시작하면, 세상 편한 소리 하는 게 스님들입니다. 누가 모르냐고요. 전세 구하고 집 옮기느라 전전긍긍하고 샴푸 하나 사더라도 가성비 따지고 차 한 대 사려면 이것저것 열심히 알아보고서도 불안해하는 우리들이야말로 소유의 번뇌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래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바세계의 삶 아닙니까? 하루쯤 절에서 지내고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히더라도 돌아오는 버스에서 흔들리면 또 혼탁해지는 줏대 없는 마음 탓만 할 일이 아니지요.

그렇지만 또 생각해보면, 스님들이 사바세계 중생들의 삶을 모른다는 것도 제 생각일 뿐이겠죠. 도법 스님은 종종 자르듯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미 불교의 핵심을 알아.”

“에이 설마요. 배우지 않고 어떻게 알아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인생 무상한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들 인생 무상하다 하잖아.”

듣고 보면 그렇죠. ‘무상’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핵심 가르침이잖아요. 소유가 번뇌를 불러온다는 것도 알고, 다른 사람이 잘되어야 나도 잘된다는 것도 알고, 말은 거듭거듭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살다 보면 누가 안 가르쳐줘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네요. 그러고 보면 중생의 문제는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그리 살지 못한다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님의 말씀이 소중합니다. 빼도 박도 오도 가도 못하는 중생의 삶에 “꼭 그래야 돼?”라고 바늘구멍 한번 뽁 내주시는 거지요. 꼭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한번 돌이켜 질문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시는 거지요. 다시 오만 세상사에 휩쓸리더라도, 그런 시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를 가져오리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외제 차 살 거 경차 사고 오토바이 살 거 자전거 사는 정도의 차이는 생기지 않을까요?

가끔은 스님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내게 질문을 합니다. 꼭 그래야 할까? 꼭 이렇게 나를 닦아 세워야 할까? 이걸 선택하는 것이 꼭 필요할까? 그렇게 생긴 바늘구멍이 숨구멍이 되고, 들숨 날숨에 닳다 보면 그물처럼 성기어지는 날이 오겠죠. 그때까지는 슬금슬금 절도 다니고 스님의 입도 쳐다보면서 살아야 되려나 봅니다. “스님이 뭘 모르셔서 그래요.”라는 말이 성급하게 목구멍까지 차오르더라도 꼭꼭 누르면서 말이에요.


글_ 박사
북칼럼니스트. 경향신문, 조선일보 등의 일간지를 비롯 각종 월간지와 주간지에 책과 문화에 관련하여 기고했다. KBS TV 책 읽는 밤, KBS, SBS, MBC, 교통방송 등에 출연했으며 현재 KBS <김선근의 럭키 세븐>에서 책 소개 중. 서울신문과 조선일보에 책 소개를 연재하며, 매달 <책 듣는 밤>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도시수집가』, 『나에게 여행을』, 『여행자의 로망백서』, 『고양이라서 다행이야』, 『나의 빈칸책』, 『비포컵라이즈, 뉴욕』, 『위크트리퍼-샌프란시스코』, 『가꾼다는 것』, 『치킨에 다리가 하나여도 웃을 수 있다면』, 『은하철도999, 너의 별에 데려다줄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