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회향하리

나의 믿음 나의 다짐

2007-09-15     관리자


Bathurst 에서 돌아오는 길은 내내 가슴 한 쪽이 저려왔다. 끝없이 펼쳐진 목장과 평원 사이로 난 길을 달려 시드니 내륙쪽으로 4시간이나 들어간 그 곳은 참으로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80년대에 지어졌다는 중세풍의 학교건물은 위풍도 당당하게 언덕 위에 자리잡고 앉아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골프장, 테니스장, 수영장 등이 부속시설로 딸린 캠퍼스가 우리식의 기준으로 고등학교라 하기에는 좀 사치스러워 샘이 날 정도였다.
다민족 국가인 호주에서도 내륙 속에 위치해 있다보니 90% 이상이 백인들로 이루어진 고장, 그곳에서도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가진 St. Stani-siaus College에 한국 유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방문한 터였다. 이미 그 곳에 유학하고 있는 한명의 한국 학생을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교장실에서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학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어서 학교시설 안내를 받았다.
새로 지은 산뜻한 건물에 자리잡고 있는 기숙사, 고등학교라고는 하지만 학제가 우리 나라와는 달라 중학교 1학년부터를 High School(고등학교)이라고 하니 적게는 14살부터의 소년들이 각 지방에서 엄마를 떠나 살고 있는 그들의 집, 그들의 하루였다.
조그마한 옷장과 책상, 군대가 이러리라 상상케 하는 잘 정돈된 침대를 보며 그 침대들이 왜 그리도 작아 보이던지! 엄마를 떠난 저들의 외로움을 누가 헤아려 줄 것인가! 침대 모서리를 자꾸만 쓰다듬어며 갑자기 핑 돌았던 나의 눈물은 나 또한 두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중 한 책상 위에 붙여져 있던 태극기와 지구의 한쪽 호주의 내륙 한 모퉁이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 그는 이미 열일고 여덟 살로 내 키보다 훌쩍 큰 청년이었지만 꼭 껴안고 등이라도 한 번 두드려주고 싶을 만큼 반갑기도 하고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세계 3대 미항의 하나라는 시드니에서도 오페라 하우스나 하버 브릿지가 있는 Circular Quay(시드니 중앙부두)에 가보면 시드니가 인종 전시장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피부색에서, 생김새에서, 남녀노소까지 각기 다른 인종, 다른 국가에서 여행온 사람들이 한가롭게 오가고 있다.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이라는 말을 저절로 떠 올리게 만든다.
남편의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호주에서 생활하던 7년 동안 사사로운 우리 가정사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국 사람의 이민이나 유학사에도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7년전 서울 올림픽이 한창이던 10월 하순에 서울을 떠나던 그 때에는 경유지도, 국적도 복잡하기만 했던 비행기를 3번이나 갈아타고 정신없이 가야 했던 시드니가 이제는 일주일에 직항 비행기만도 14편이 될 만큼 가까운 거리로 좁혀졌다.
교민 수도 삼사만을 헤아리게 되었고, 1980년대 중반부터 늘기 시작한 유학생들의 숫자도 88서울올림픽을 전후로 급격히 증가하여 이제는 한 해 유학생이 5∼6천 명에 이르고 있다.
호주의 안정된 사회환경과 높은 교육수준, 지역적으로 편리한 이점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이 곳을 유학처로 선택하는 것이다.
유학생 중 약 70%는 어학연수과정의 학생들로 대학교 이상의 정규 유학생 수는 아직 상당히 낮은 편이지만, 입학은 쉽고 졸업은 어렵다는 한마디 말로 함축될 수 있는 호주의 교육제도 때문일까? 정규과정 졸업자들의 경우에는 한국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는다고 한다.
호주의 유학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어학연수의 경우도 호주가 교육수출을 국가 전략사업의 하나로 꼽을 만큼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유학생들에게는 각종 규제를 완화하여 보다 쉽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여러 과정을 가지고 있으며, 점차 늘고 있는 중교생의 유학에 맞추어 중고등학교에 맞는 영어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제공하고 있다. 아시아권에서 온 많은 유학생들이 성공적으로 그들의 공부를 마치고 있었다.
그러나 7년 동안 인연이 되어서 만났던 많은 유학생들, 그들은 분명 나름대로의 목표와 꿈을 가지고 태평양을 건너왔지만 많은 좌절과 방황을 겪고 있었고 상당수는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기도 했다.
유학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도 세우지 않고 그저 외국에 나가면 잘 될 것 같은 막연한 기대를 가졌다는 학생도 있었다. 공부 못하는 자식이 창피해서 유학이라도 보냈다면 위안이 될 것 같았다는 무책임한 부모도 있었다.
이제는 한국인의 호주 이민사도 20여 년을 넘었고 시드니를 중심으로 양적으로 팽창하기만 했던 유학생 사회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몇몇 뜻있는 어른들이 모임을 만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특히 18세 전 조기 유학생들의 경우 그들의 학업뿐만 아니라 가족을 떠난 외로움을 헤아리고 자칫 무절제와 방종에 빠지기 쉬운 생활을 바로 이끌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다만 부러울 정도로 결속력이 강한 타종교에서 이러한 활동들을 활발히 이끌고 있는 것을 보며, 이제는 우리 불교인들도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주위를 돌아보고 이웃을 생각하는 활동을 해야겠다는 바람이 있다.
어려운 외국생활 중에서도 크나큰 공덕을 입은 것은 부처님과의 인연이었다. 성당에 다녔던 내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처음 호주공항에 도착해서 만난 불자가정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 분들의 도움으로 관음사에 나가며 만난 보살님들은 그대로 내 인생의 도반들이었다. 힘든 외국생활 속에서도 별로 힘들다는 생각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분들 덕분이다.
무엇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던 나임에도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들을 때면 연신 "맞아 맞아"를 연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도 어려운 여건 하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열심히 절에 나가며 총무일을 맡았었다. 우리 가정을 이끌어 주고 지켜주던 것은 등불과도 같았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던가! 내가 만난 많은 유학생들, 호주 속의 한국 젊은이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이 시대와 사회를 이끌어 가기에 충분한 이유와 꿈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학의 캠퍼스에서, 영어 학교의 강의실에서 만난 그들의 눈빛 속에 지구촌의 주역으로 성장해갈 밝은 한국의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20대 후반에 떠나 젊음의 한 때를 회향하고 어느새 중년이 되어 돌아온 이즈음, 호주에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리며 때로는 미소도 짓게 되고 때로는 우울해지기도 한다. 모두가 그리운 얼굴들이다. 그들의 하루하루에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하기를 두손 모아 기원해드리며, 조국의 미래를 위해, 또 불교의 미래를 위해 특히 호주 유학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밝은 등불이 되리라 다짐해 본다. 이제는 내가 지금까지 받은 만큼이라도 회향해야 할 때가 아닌가.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향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