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한 물건] 호미

2019-07-01     양민호

한 마리의 초식 동물처럼 호미는 놓여 있다. 호미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이 초식 동물이 들판을 파헤치면 흙 속에서 식물들이 솟아 나온다. 식물들을 먹고 사는 동물이 아니라 식물의 씨앗을 뿌리는 동물. 할머니는 이 동물을 평생 키우셨다. 그리고 밭에 나가 일을 하며 비가 오는 날에는 비를 맞으며 흙을 갈아엎고 풀을 뽑아냈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밭에서 일했고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잠깐 감나무 그늘에 앉아 양은 도시락 속의 보리밥을 물에 말아 드셨다. 장아찌 하나로, 고추장 한 숟갈을 반찬으로 도시락을 비웠다. 그러고 다시 밭이랑을 보다 일을 시작했다. 호미는 지치는 법이 없다. 늙고 고집 센 당나귀처럼 일을 시작하는 호미와 할머니는 닮아 있다.

초등학교 때는 늘 나도 밭에 나가 일을 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새벽부터 온 식구들이 밭으로 걸어갔다. 밭은 산 중턱에 있었고 길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소를 끌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 안개가 우리 바짓가랑이 사이로 흘러갔다. 밭이 멀기도 멀어 도착하면 이미 지쳐 있었지만 안개가 걷힐 때까지 아버지는 밭을 갈고 누나들은 자루가 달린 농기구로 흙을 모아 둑을 만들었다.

비닐을 씌우기 위해서는 호미가 필요하다. 이 초식 동물은 흙을 모아 비닐 끝에 흙을 올리고 기어코 바람에 펄럭이는 비닐을 파묻고 지나간다. 해가 뜨고 안개가 걷히면 식구들은 말없이 비닐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참깨를 몇 알씩 넣었다. 길고도 지루한 노동을 견디는 것이 어린 시절에 배운 가장 커다란 자산일까. 나는 아직도 고집 세게 노동을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때론 타인을 너무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그 노동을 견디지 못한다면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포기했다는 자책감이 들기에 스스로를 노동이라는 흙덩어리에 파묻는다.

호미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이미 나 자신이 호미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것은 어릴 적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이해하지 못하는 할머니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잠을 자는 것처럼, 나는 천천히 호미를 받아들인다. 고향의 산 중턱에서는 아직도 늙은 부모님들이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다. 가끔 부모님을 따라 밭에 가면 나는 금세 지쳐 밭둑에 앉아 쉰다. 노동이란 하나의 수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끝없이 수양을 거듭하면 어느 경지에 이르게 될지 모른다. 그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부모님은 견딜 수 있을지도, 아니면 경지에 오르기 위해 수행을 거듭하며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밭을 가는 소도 지치고 부모님도 지치고 나도 지치는 봄날, 뽑혀진 풀들이 시들어가는 것을 본다. 우리도 저렇게 시들어가고 있다.

어릴 적 할머니가 종일 밭에서 일하고 저녁에 돌아오면 나는 어떻게 저렇게 오랜 시간 일할 수 있을까 이해하지 못했다. 시든 풀처럼 할머니는 누워서 일어나지 못한다. 할머니는 노동이 즐거워서 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하기 싫어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할까.

나이가 든 지금은 조금 이해할 것 같다. 그 노동은 자신을 견디기 위해, 힘겨운 삶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그것만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체념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슬픔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삶에 체념하지 않기 위해 그 체념, 슬픔의 깊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것이 할머니의 노동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시집와서 아무도 모르는 산 너머에 나무를 심었다

그 나무는 자라 하늘까지 닿았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짐승은 죄를 지어 일만 한다 하지만
소가 일하지 않는 날에도
비를 맞으며 밭고랑에서 김을 매던 할머니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간다 하니
하늘 어딘가에도 마당이 있을 것이다

그 마당에서 아홉 잔의 술과
아홉 개의 떡을 먹으며 노래 부르면
호미는 말잔등으로 변해 달리고
타령조로 울다 웃고
목이 쉬면 까마귀를 달여 먹고

지상에서 추지 못한 춤을 출 것이다

- <소나기> 부분

언젠가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또 다른 복잡한 마음으로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시를 쓰며 나는 할머니에 대해 늘 생각했고 할머니를 통해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앞으로도 할머니는 내 마음속에서 잠들어 있고 가끔 깨어나 중얼거리실 것이다. 그 중얼거림을 나는 귀 기울여 듣고 할머니와 이야기할 것이다. 그런 조그만 웅얼거림과 자기 한탄, 그리고 손자에게 하는 말들이 나의 시들이 되어 가끔 종이에 인쇄되어 나올 것이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나는 할머니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할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기에 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었다. 아주 온순하지만 고집 센 호미처럼 나도 천천히 할머니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와 호미가 한 몸이듯 나도 나의 언어와 언젠가 한 몸이 될 것이다.

이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호미는 한 곳에 걸려 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호미는 벽에 걸려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할머니가 쓰던 호미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쓰고,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쓰게 될 것이다. 허리가 구부러져 호미와 비슷하게 닮아가면 호미 날이 흙을 파고들어 덩어리들을 부수듯 내 몸도 햇볕과 바람에 부서져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제 나도 늙어가기에 호미와 한 몸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시골 마당 구석에 헛간이 있고 헛간에는 삽이며 괭이며 낫이며 갖갖 농기구가 벽에 걸려 있다. 호미는 가장 얌전하게 벽이 곧 자신의 방이라는 듯이 잠자고 있다. 저 초식 동물은 늘 잠에 빠져 있고 주인이 깨우면 천천히 일어나 일터로 간다. 그리고 쉬지 않고 아주 천천히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가장 늦게까지 일한다. 밤이 어두워지면 비로소 집으로 돌아오는 호미와 할머니. 가장 친한 친구이며 원수이며 운명의 동반자인 호미는 늘 할머니 손에 쥐어져 있다. 그들이 떨어져 있는 시간은 오직 잠자는 시간뿐이다. 똑같은 시간에 잠에 빠지고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쌍둥이처럼 할머니와 호미는 같은 운명의 길을 간다. 분노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아무도 해치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그 길을.


글_ 김성규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