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하루 여행] 느린 걸음으로 텅 빈 시간에 이르다

춘천 그리고 청평사

2019-07-01     양민호

춘천 그리고 청평사를 여행의 첫 목적지로 삼은 것은 두말할 것 없이 가까워서다. 서울에서 2시간 안팎(대중교통으로 3시간여)이면 도착하는 곳. 하루 여행 코스로 이만한 곳이 있을까.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맞으며 춘천으로 간다.


# 김유정역 - 김유정문학촌

김유정역을 첫 행선지로 잡은 것은 아련함 때문이다. 학창 시절 그의 대표작 『봄봄』과 『동백꽃』을 읽으면서, 작품 속에 그려진 때 묻은 시골 풍경에서 느꼈던 동질감에 대한 기억이 그리로 발길을 이끌었다.

평일 아침 김유정역은 한산했다. 오가는사람도 전철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평일 여행의 호사가 이런 게 아닐까 하며 느긋하게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의 김유정역은 2010년 경춘선이 개통되면서 새로 지은 역사로, 그 전까지는 오른쪽으로 백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구 역사를 사용했다. 짧았던 구 역사(驛舍)의 역사(歷史)가 이름 딴 이의 생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새것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겨운 감성을 옛 역사와 그 주변에서 느낄 수 있다. 작은 역사 앞에 놓인 녹슨 철로, 낡은 무궁화호 열차(북카페로 운영 중이다), 작은 꽃나무로 이뤄진 생태숲이 잘 짜인 미장센처럼 펼쳐진다.

느린 걸음으로 그 풍경들을 두 눈에 담는다. 뜨겁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도 어쩐지 한가로운 봄 곁에 선 듯한 기분. 오래된 것들 곁에서면 마음도 그렇게 시간을 되돌리나 보다. 짧은 산책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소설가 김유정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역 앞 도로를 건너 김유정문학마을로 향한다. 머잖아 도착. 김유정문학촌(생가와 기념전시관)과 김유정이야기집이 낮은 경사길을 사이에 두고 들어서 있다. 소설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설치 작품들,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로 빼곡한 문학촌과 이야기집을 돌아보며 소설가 김유정을 다시 만난다.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애틋하게 누군가를 사모했으며, 뛰어난 글재주를 가졌으되 일찍 세상을 저버린 사람. 작품보다 극적인 그의 삶이 눈앞에 아른댄다.

문학마을을 나오면 위쪽으로 김유정 소설의 주요 배경인 실레마을을 돌아볼 수 있는 실레이야기길이 펼쳐진다.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소낙비)>, <점순이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동백꽃)>,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봄봄)> … 누구 아이디어인지 재치 있게 작품에서 이름 따다 붙인 열여섯 갈래의 길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그 길 따라, 이야기 따라 걸어가며 소설 속 점순이가 되었다가, ‘나’가 되었다가, 마침내 김유정이 되어 본다. 한적한 시골 풍경에 흠뻑 잠겨서 그가 그린 전원의 삶을 나도 따라 스케치해 본다. 아쉽게도 철이 지나 노란 동백꽃(생강나무)은 만날 수 없었지만, 돌아올 계절을 기약하며 다시금 발걸음을 돌린다.

* Information
지하철 경춘선 회기역에서 김유정역까지 1시간 20분. 역 앞 도로를 건너면 3분여 거리에 김유정문학마을이 있고, 그 위가 실레이야기길 초입이다. 문학촌 입장료(이야기집 입장료까지 포함된 금액)는 개인 2000원, 단체 1500원. 실레이야기길을 천천히 다 돌아보는 데는 2시간 남짓 걸린다.

위치_ 강원 춘천시 신동면 김유정로 1430-14
문의_ 033-261-4650
 


# 소양강

춘천하면 떠오르는 대표 먹거리 ‘막국수’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두 번째 행선지로 향한다. 멀리 청평사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북한강과 만나 의암호로 흘러드는 곳, 소양강 하류에 위치한 소양강스카이워크다. 전체 길이 174미터, 바닥을 투명 유리로 설치한 국내 최장 규모의 스카이워크로 지난 2016년 7월 개장해 지금은 춘천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 옆으로 소양2교와 소양강처녀상이 서 있다. 지역 명소답게 평일 낮, 30도에 육박하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인파로 붐빈다. 멀리 낮게 이어진 산등성이와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한 하얀 층적운이 데칼코마니처럼 비친 수면 위로 잔잔한 물결이 일렁인다. 그 멈춘 듯 흐르는 강물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힐링이 따로 없다. 머릿속을 맴돌던 잡념도 물길 따라 둥둥 떠내려간다. 다만 바람 한점 없는 한낮의 열기가 야속하기만 하다.

* Information
경춘선 춘천역에서 소양강스카이워크까지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 주변에 파라솔 테이블이 몇 개 마련돼 있지만, 가능하면 한낮의 더위를 피해 해 질 무렵에 찾을 것을 추천한다. 때맞춰 가면 멋들어진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강변으로는 자전거전용도로가 마련돼 있어 경치를 감상하며 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소양강스카이워크 입장료는 2,000원.

위치_ 강원 춘천시 근화동 8번지
문의_ 033-240-1695
 


# 강원도립화목원 - 신매리 메밀밭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 좀 식혀볼 요량으로 소양강스카이워크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강원도립화목원을 찾았다. 복잡한 도심에선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식물원. 갈 길 멀지 않은 나그네가 쉬어가기 맞춤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앉아 잠시 새소리, 나뭇잎 소리에 귀를 내어준다. 나른한 몸과 마음이 한결 넉넉해지는 기분. 여러 갈래로 뻗은 작은 산책로를 따라가며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 사이에서 잠깐의 여유도 만끽해본다. 화목원에서 차로 5분 정도 달리면 서면 신매리 메밀밭이 나온다. 이맘때면 하얀 메밀꽃이 만개하는데 춘천을 찾는 사진꾼(?)들이 빼먹지 않고 들르는 핫스팟 중 하나다. 작년까지 메밀밭 가로 새빨간 양귀비꽃이 피어 절묘한 색감의 조화를 이루었다는데, 더 이상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그래도 소욕지족(少欲知足)이라, 눈꽃처럼 피어난 메밀꽃밭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 Information
강원도립화목원 내 대표 포토존은 플라타너스 나무와 철쭉원, 그리고 장미터널이다. 활짝 핀 철쭉과 장미를 만나고 싶다면 5월 중순께 방문할 것을 권한다. 한편 화목원 내 산림박물관에서는 연중 체험 프로그램을 실시하는데, 사전 예약을 통해 숲해설과 숲공예 등을 체험할 수 있다. 화목원 입장료는 성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500원. 박물관은 무료 입장이다.

위치_ 강원도 춘천시 화목원길 24
문의_ 033-248-6696 󰠐 체험 예약 033-248-6684
 

# 청평사

오늘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청평사로 향한다. 청평사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 춘천 IC를 지나 46번 국도를 따라 배후령 터널을 넘어가거나, 소양강댐에 차를 대고 배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굽이진 도로 따라 드라이브하며 가는 것도, 소양호를 가로지르며 뱃바람 맞는 것도, 저마다의 묘미가 있어 취향껏 고르면 된다. 서둘 일 없는 여행객은 배에 몸을 실었다. 10여 분 뱃길을 달려 청평사 선창장에 도착, 숲길에 들어선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적당한 넓이의 오솔길. 우측으로 흐르는 계곡물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계곡 초입에서 청평사까지 오르는 길에 많은 볼거리가 있다. 제일 먼저 마주치게 되는 것이 공주설화를 모티브로 만든 공주상(像)이다. 다소곳한 자세로, 한 손에 커다란 뱀을 받쳐 들고 눈 맞춤하고 있는 공주상이 계곡 한 편에 자리해 있다. 중국 당나라 때 태종의 딸 평양공주를 사랑한 한 청년이 죽어서까지 사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상사뱀으로 환생해 공주 몸에 붙어살다가, 청평사를 찾은 공주가 목욕재계 후 스님께 가사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해탈하게 되었다는 것이 설화의 골자. 평양공주가 기거했다는 공주굴, 몸을 씻었다는 공주탕, 뱀을 떼어낸 은혜에 보답하고자 세웠다는 삼층석탑(일명 공주탑), 그리고 청평사의 대문이자 대표 문화유산 회전문(보물 제164호)까지 설화에 얽힌 여러 장소를 차례로 만나볼 수 있다. 이런 애틋한(?) 러브스토리가 깃든 절이 전국에 얼마나 될까. 그 덕인지 풍문에 따르면 청평사는 연중 젊은 연인이 가장 많이 찾는 절이자 방문객 평균 연령이 가장 낮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 물론 확인할 길은 없다.

완만한 경사로 이어진 길을 따라 계속 오른다. 마지막 배편을 놓칠세라 하산을 서두르는 등산객들 사이로 유유자적 제 갈 길을 가노라니, 어쩐지 혼자만 다른 시간 속에 사는 듯 묘한 즐거움이 있다. 하지가 가까워 느리게 지는 오후의 햇살에 감사하며 덩달아 나도 한껏 늑장을 부린다. 춘천의 3대 폭포 중 하나라는 구송폭포 앞에 앉아 잠시 청량한 물줄기도 맞아보고, 이 일대를 원림(園林)으로 가꿔 평생을 머물며 자연의 일부로 살았다는 진락공(眞樂公)*의 참된 즐거움도 가늠해 보면서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간다.

저녁 6시. 마침내 청평사에 다다랐다. 절 입구에 선 커다란 은행나무와 절 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양쪽에 나란히 선 잣나무를 일주문 삼아 안으로 들어서자, 오봉산을 병풍처럼 둘러친 사찰 전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윤회전생을 깨우치게 한다는 회전문(廻轉門, 윤회전생의 줄임말이라 한다)을 지나 대웅전과 나한전, 삼성각과 극락보전을 차례로 둘러본다. 대가람이었다던 옛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아담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아늑함을 자아낸다. 사람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초저녁의 절은 그야말로 무인지경(無人之境), 홀로 경내를 거닐며 상념에 젖는다. 오직 내게만 허락된 듯, 혼자 떠난 하루 여행의 절정에서 만난 이 ‘텅 빈’, ‘혼자’만의 시간 낯설다. 낯설지만 반갑다. 이 순간을 조금 더 누리고 싶다. 하지만 어느덧 길었던 해가 산마루를 넘어가고, 이제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남은 시간은 오롯이 텅 빈 채로 남겨 두기로 하고, 조용히 절의 하루를 닫아준다. 오늘이 저문다.

사실 오늘 여행의 최종 목표는 오봉산 정산에 있는 적멸보궁터까지 오르는 것이었다. 청평사 마당 앞으로 난 길을 따라 30여 분 쭉 오르면 이를 수 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다녀오자 싶어 나섰지만, 아무래도 무리였다. 생각보다 길이 험하고, 중간쯤 있는 해탈문까지 갔을 때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청평사를 찾아 꼭 한 번 다녀올 참이다. 해탈을 넘어 적멸의 맛을 보고야 말겠다는 심사로!

*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의 시호. 고려 시대 문신으로 23세에 과거 급제하고 29세에 대악서승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청평산으로 들어가 평생 나물밥과 베옷 등으로 생활하며 학문과 선을 즐겼다. 청평사라는 이름은, 1550년 보우선사가 그의 호 청평거사에서 이름을 따온 데서 비롯됐다. 청평사 오르는 길가에 부도탑과 그가 만든 연못(영지, 影池)이 남아 있다.

* Information
소양댐 선착장과 청평사 선착장 사이를 운항하는 배는 30분 마다(오전 9시 30분 첫차, 오주 6시 막차) 있다. 왕복 요금은 성인 6,000원 어린이 4,000원. 청평사 문화재구역 입장료는 성인 2000원, 청소년 1200원, 어린이 800원이다.

위치_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674번지
문의_ 청평사 033-244-1095 󰠐 소양댐 선착장 033-242-2455


글_ 양민호
사진_ 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