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암자의 숨은 스님들] 인생은 다리, 지나는 가되 그 위에 집을 짓지는 말라

약수암 흥선 스님

2019-07-01     양민호

‘숲 그늘로 새벽 창이 열립니다. 뒷담을 넘어온 오동나무 가지가 열쳐둔 창문을 기우듬히 엿봅니다. 거기서 뻗은 오동잎 부채에서 일렁, 푸른 바람이 입니다. 창문 너머, 개울 건너, 숲 그늘이 자꾸 짙어갑니다. … 하늘은, 구름은 연못 속에 자화상을 그려놓고 물끄러미 제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마당 위로 때글때글 쏟아지는 햇살에 여름이 익어 갑니다. 한낮 뻐꾸기 울음에 검푸른 숲이, 온 산이 미동조차 없이 아득한 졸음에 잠깁니다. 붉은 해가 서산마루를 넘으면 아이 부르는 엄마 목소리로 멧비둘기가 웁니다. 그 소리에 고향 마을의 저녁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아름다운 글이다. 어느 여름의 하루, 특별할 것도 없는 산사의 하루다. 날은 바뀌어도 어제 같은 오늘이어니, 오동나무 가지에 바람이 일고, 숲 그늘은 하루하루 짙어간다. 뻐꾸기 소리 아득한 졸음에 잠기고, 고향 들녘에는 저녁연기 피어오를, 무념무상의 시간들이 저렇게 흘러간다. 흥선 스님이 쓴 글이다. 스님은 책을 여러 권 냈는데, 『일-줄이고 마음-고요히』라는 책에 나온다. 좋아하는 한시를 한편 번역하고, 그 옆에 짧은 산문을 이어놓았다. 이 산문과 짝을 이루는 한시가 고려삼은(三隱)이었던 길재(吉再)의 ‘한거(閒居)’. ‘시냇가 띠집에서 한가롭게 지내나니/ 달 밝고 바람 맑아 흥취가 겨웁고녀/ 손님조차 오지 않고 산새는 지저귀니/ 대 언덕에 책상 놓고 누워서 책을 보네.’

지리산 약수암 가는 길. 약수암은 실상사에서 머잖은 산내 암자라 큰 절에서 하루 묵고 올라갈 참이다. 극락전에 들러 내게 ‘효천(曉天)’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신 도법 스님께 인사했다. 스님은 ‘지리산의 아침’이라는 템플스테이를 주관하고 계셨는데, 안내 리플릿에 ‘길 위의 스승 도법 스님과 함께하는 2박 3일’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화엄학림, 귀농학교, 인드라망, 탁발순례, 화쟁과 결사, 그런 미답(未踏)의 길을 걸어온 스님에게 길 위의 스승! 참 어울리는 말이다. 종무소에 들렀더니 절 살림 얘기들이 두런두런 오간다. 차 한 잔 마시는 와중에 일하는 보살님 한 분이 바삐 일어선다.

“먼저 가요. 아들이 천왕봉에 소풍 갔는데 내려올 때가 돼서 마중 가느라 먼저 가요.”

“아니, 천왕봉으로 소풍을?”

나는 놀랍고 신기해서 “몇 살인데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초등학교 6학년”이라 한다. 남원시 산내초등학교 6학년 20여 명, 선생님, 학부모 두루두루 천왕봉으로 봄 소풍을 나선 것이다. 이른 아침 백무동을 출발하여 세석 장터목 지나고 천왕봉에 올랐다가 그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길이다. 지금 세석평전의 철쭉은 얼마나 아름다울꼬? 산내초등학교는 늘 소풍을 산으로 간다. 어디나 산 아닌 것이 없고, 산으로 빙 둘러 산내(山內)면이다. 1학년은 가까운 둘레길을 다녀오고, 2학년이 되면 실상사 맞은편 백운산으로 소풍을 간다. 3~4학년은 노고단이나 칠선계곡을 다녀오고, 5학년은 지리산 제2봉 반야봉을 오른다. 최고학년이 되면 오늘처럼 가볍게 최고봉으로 소풍을 다녀오는 것이다. 산내초등학교는 실상사의 귀농학교 덕에 학생 수가 100여 명으로 근동에서 제일 많다. 늘 지리산을 바라보면서 자라는 아이들, 저 안개 자욱한 높은 산으로 소풍 가는 그 자체로도 얼마나 재미나는 일일까만,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혹은 사는 것이 막연해질 때, 훌쩍 다녀올 곳이 있다는 것, 그곳에 갔다 오면 다시 지혜가 생겨날 것이고, 그 산길의 기억이 아이들의 한 생을 좀 더 단단하게 해주지 않을까 하고, 나 홀로 생각이 제 맘대로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이튿날 약수암에 올라가니, 흥선 스님 보릿대 모자 쓰고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고 있다. 합장 인사드려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세상에 대해 별 하실 말씀이 없다고 한다. 나는 보광전에 참배하고 멀뚱멀뚱하고 돌아다닌다. 지리산 암자 토굴 다니면 대개 그렇다. 환영받는 경우는 거의 없고, 쫓아내지는 않지만 쉬 받아주지도 않는다. 내가 그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고, 그는 침묵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좀 더 오래 경내를 어슬렁거려야 한다. 나도 사실 불쑥 찾아가는 것이 스님이 홀로 맑혀 놓은 우물을 흐리게 하는 일이나 되지 않을지 조심스럽다. 하지만 세간의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길어오는 물 한 그릇, 말 한마디를 기다리며 그것으로 지친 몸과 마음에 위안 삼는 것 아니겠나 하고 나는 생각한다. 하물며 이곳은 약수암(藥水庵) 아닌가!

“스님, 실상사 보광전은 작은데 비해 석등이 너무 크지 않나요?” 불교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스님 전공 분야를 파고들어 불쑥 물었다. 스님 한심한 듯 쳐다보더니 그래도 말문을 연다. “석등이 언제 거요? 통일신라 시대요. 보광전은 언제 거요? 1884년 고종 21년에 월송대사가 세운 거요. 조선 후기하고 같아요? 그게. 목조 건물은 다 불타 사라지고 돌만 남은 거지. 그 앞에 서서 석등에 걸맞은 큰 법당이 앞에 있었겠구나, 하고 옛날을 상상하면서 봐야 하는 거요.”

“화엄사 석등 앞에 각황전 같은 큰 법당이 있는 것처럼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려.”

“화엄사 석등은 높이가 636cm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거요. 각황전은 원래 의상법사가 670년에 건립한 3층 장륙전이라 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02년 중건한 거요. 시대도 다르고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석등과 법당이 제짝이 아니라는 얘기다. 스님 입을 열면 백과사전이다. 정확한 수치를 나열하면서 잔 펀치들이 날아온다. 이럴 때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데, 또 묻는다. “여기 석등은 왜 이렇게 크게 지었답니까?” 했더니, “지리산이 얼마나 큰 산이요. 산이 크니까 절도 크고 탑도 크고 석등도 큰 거요. 산 작은데 절 큰 것 봤소?” 하! 그 간명함에 감탄사가 나온다. 나는 말문이 터진 김에 궁금하던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에 대해 물었다.

“광주박물관에서 그 석등을 봤는데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데요.”

“두 마리 사자가 어떤 모양으로 있던가요?”

“…”

“가슴을 맞대고 직립하고 있지요?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동물이 직립하는 것 봤어요? 왜 그런지 생각해 봤어요? 『석등』 책 읽어보셨어요?”

흥선 스님은 『일-줄이고 마음-고요히』, 『석등』, 『맑은 바람 드는 집』 이렇게 3권, 그리고 답사 여행의 길잡이 『8권 팔공산자락』, 『13권 가야산과 덕유산』 등을 썼는데, 나는 『석등』은 읽지 않고, 하필 딴 책을 읽고 말았던 것이다.

“등(燈)이 뭐요? 빛이요, 어둠을 밝히는 거지요? 그냥 등불이 아니고 상징입니다. 무명에서 광명으로, 어둠과 고통에서 지혜와 자비의 세상으로 향하는. 사자 두 마리는 그 등을 지키는 수호신이에요. 석굴암 인왕상 있지요? 금강저를 들고 악의 무리를 막고 있는. 하나는 입을 벌리고 하나는 다물고 있어요. 저 쌍사자는 인왕상과 같은 겁니다. 진리의 등이 꺼지지 않도록 영원히 지키고 서 있는….”

스님 마당에서 계속 풀을 뽑고 있다. 하나하나 일일이 모종삽으로 파서 흙을 털어내고 소쿠리에 담는다. 파낸 땅은 다시 손바닥으로 눌러 다져놓고. 한눈 한번 파는 법 없이 앉은걸음으로 마당을 쓸고 다닌다. 스님 성정 저러하리, 철저하고 꾸준하고 칼칼하고, 뒤로 돌면 여리고 섬세한.

“진리는 다 같은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것은 잘못이요. 불교는 근본적으로 타 종교와 달라요. 그 핵심이 연기(緣起)에요. 부처의 깨달음이 오묘하고 신비롭고 그런 게 아닙니다. 바로 이것, 인드라망에 비유하는 연기입니다. 그 그물코, 개체이면서 전체인 중중무진의 세상. 삼라만상은 여러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 서로 의지하여 함께 존재하지요? 우주 만물 중에 홀로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은 없어요. 상생하면서 연기적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것이에요.”

깨달음은 연기이고, 연기는 무아(無我)이며, 공(空)이라는 것. 이것이 스님 말씀의 핵심이다.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없다. 나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조건이 맞으면 존재했다가 그것이 다하면 사라진다. 나 하나에 모든 것이 담겨 있고, 전체 속에 나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씨앗과 나무와 숲이 공존하면서 순환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나이면 내 것을 더 가지려고 욕망한다. 반대로 더 못 가지면 고통이 온다. 무아일 때, 연기의 삶을 살 때, 고통은 사라진다.


“스님, 그것이 말처럼 쉽게 된답니까? 깨달으면 그렇게 되는가요?”

“깨달음은 도착이 아니고 출발이요. 연기를 알면 깨달은 것이고, 첫발을 내딛는 거죠. 늘 깨어서 실천하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고, 그것이 어려운 겁니다.”

“스님은 직지사 주지도 하셨는데, 혼자 밥 해먹고 살기가 안 힘드신가요?”

“일정해야 혼자 살 수 있는 거요. 제때 먹고 제때 자지 않으면 무너져요. 전에도 2년 반 토굴 살았는데 한 번도 식은 밥 먹은 적이 없어요. 자기와의 약속을 못 지키면 혼자 못 살아. 큰스님이라고 내 양말을 다른 사람이 빨아주면 그게 어디 중인가?”

이끼 푸른 바위틈에서 대롱을 타고 흘러나오는 약수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스님 늘 건강하시라.”고 하직 인사했다. 그제야 스님 호미 든 채로 허리 펴고 얼굴 보면서 한 말씀 하신다. “이런 말이 있어요. 어느 랍비의 말로 기억하는데, ‘인생은 다리이다. 지나는 가되 그 위에 집을 짓지는 말라’.” 그러고는 스님 집 모퉁이 돌아 들어가 버린다. 인생은 다리이구나! 나는 송림 사이로 난 산길을 내려오면서 큰소리로 한번 읊어봤다. “오! 인생은 다리이거니 다리 밑은 공(空)하도다! 언젠가는 무너지고 말 것이니, 그 위에 집 짓지는 말지어다, 나그네여!”

 

글_ 이광이
60년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 따라 대흥사를 자주 다녔다. 서강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와 더욱 친해졌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냈고, 도법 스님, 윤구병 선생과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책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사진_ 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