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 개론] 석가모니는 바라문교의 아뜨만을 부정했는가

2019-07-01     양민호

[‘아뜨만은 있는가, 없는가’라는 질문에 침묵을 지킨 세존(=석가모니)은 그 까닭을 묻는 아난에게] 대답하셨다. “‘아뜨만은 있다(=유아)’고 대답하면 상주론자와 같게 되고, ‘아뜨만은 없다(=무아)’고 대답하면 단멸론자와 같게 된다.” - 『상윳따 니까야』 44.10

“모든 부처님은 ‘아뜨만이 있다’고 잠정적으로 설하셨다. ‘아뜨만은 없다’고도 설하셨다. ‘아뜨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도 설하셨다.” - 『중론』 제18장 관법품 제6게송


불교를 공부하는 바람직한 태도

‘무아(無我)’의 기본적인 뜻은 ‘아(我), 즉 아뜨만(ātman)은 없다’이다. 아뜨만은 힌두교의 전신인 바라문교의 우빠니샤드 철학에서 그 존재를 주장한 것으로, 우선은 ‘나’·‘자아(自我)’를 뜻한다고만 알아 두자. 석가모니는 무아(無我)를 가르쳤고, 따라서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했다고 일반 불교인들은 알고 있다. 석가모니는 과연 바라문교의 아뜨만을 부정했을까?

사람은 처음에 안 것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직전 호에서 동일한 물건을 두고 할머니는 요강이라고 고집하는데 손자는 양념 단지라고 우기는 일화를 이야기한 바 있다. 두 사람의 견해가 이렇게 다른 것은, 할머니는 처음에 그것을 요강이라고 알았던 반면 손자는 양념 단지라고 알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최초로 머리에 입력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불교를 처음 배울 때 석가모니는 바라문교의 아뜨만을 부정했다고 알았다면, 더구나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단체와 친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면, 그것과 배치되는 견해는 무시하거나 저항하려 드는 것이 인지상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안 것’에 대한 집착은 부와 지위와 명예에 대한 집착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끈질기고 심각할 수 있다. 자신의 가치관, 어떤 사람에 대한 본인의 평가, 늘 해 오던 일의 방식 등을 좀처럼 쉽게 바꿀 수 없지 않는가? ‘안 것’에 대한 집착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죽고 잔상 없는 맑은 눈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 때 진실은 보인다.

석가모니는 바라문교의 아뜨만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셨을까? 이에 대해 쟁쟁한 세계적인 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그 아뜨만을 부정했다는 주장은 물론,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는 주장,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초기 경전인 아함과 니까야 등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아함이나 니까야 등에는 동일 주제에 대해 일치된 하나의 내용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치되는 내용도

담겨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사정은 부파불교의 논서 간에도, 대승불교에 속하는 경전이나 논서 간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경전이나 논서 등 1차 자료 간에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 있게 된 역사적 이유는 불교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연재들에서 설명했다. 문제는 위와 같이 서로 다른 주장들을 접하게 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에 있다. 어떻게 해야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앞으로 불교를 공부해 나가는 데 매우 중요한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인 ‘중도(中道)’를 실천하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중도는 ‘양극단에 치우침이 없는 바른 길’을 뜻한다. 여기서 치우침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과 저것, 양자 모두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곳에 저절로 나타나는 사고방식이자 삶의 방식이다.

1과 3의 중도는 양자의 단순 평균인 2가 아니다. 1이나 3,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것이 중도다. 허공은 불에도 타지 않고 비에도 젖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석가모니는 바라문교의 아뜨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에 대해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 새로운 내용,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거기에서 자유롭게 되어 접근하는 것도 중도의 실천이다.

학자 간에 주장이 달라 일반인에게는 다소 까다로울 수 있는 아뜨만의 문제를 굳이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으로 유사한 상황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바람직한가에 대한 단서를 찾는 데 도움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바라문교의 아뜨만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아뜨만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리적인 순서가 될 것이다.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우빠니샤드 철학 시대에 이르러 바라문교 내부에서는 ‘자아의식(自我意識)’, 즉 나에 대한 의식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이 자아의식은 당연히 나를 대상으로 한다. 자아의식의 대상이 되는 ‘나’가 아뜨만의 가장 기본적인 뜻이다. 따라서 ‘나’와 같은 개념인 ‘자아’ 또는 ‘자기’도 아뜨만의 기본적인 의미가 된다. ‘아뜨만(ātman)’은 산스끄리뜨이고 이에 해당하는 빨리어가 ‘앗딴(attan)’이다. 한문 경전에서는 아뜨만을 ‘아(我)’라고 의역하여 표현하고 있다.

‘나’에 대한 고찰에 열중한 우빠니샤드 철인들은 점차 번뇌에 물든 ‘일상적인 나’를 부정하고 그것을 넘어선 참된 나, 즉 ‘초월적인 나’로서의 아뜨만을 자신의 내면에서 깊이 찾아갔다. 그 결과, ‘일상적인 나’의 인식·행위·윤회·해탈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알았다.

따라서 욕망 등의 번뇌를 일으키는 ‘일상적인 나’와 모든 번뇌에서 초월한 ‘초월적인 나’는 서로 반대되는 성격을 가짐과 동시에 외부와 내부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리석은 우리가 알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일상적 나’밖에 없으나, 이것이 있다는 것은 곧 ‘초월적 나’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완전히 ‘초월적 나’에 도달했을 때 ‘일상적 나’의 요소는 소멸하며 이때가 해탈하는 순간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초월적인 나’만을 가리켜 아뜨만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초월적인 나로서의 아뜨만을 학계에서는 ‘자기의 본질’, ‘영혼’에 해당한다고 본다. 최초기 우빠니샤드 문헌인 브리하드 아란야까 우빠니샤드와 찬도기야 우빠니샤드에 산재해 있는 아뜨만에 대한 설명을 요약정리하면 이렇다.

아뜨만은 말이 없고 초연하며 심장의 내부에 있다. 아뜨만은 생하지도 늙지도 죽지도 않고 평안하다. 아뜨만은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고 영원하다. 속박되거나 훼손되는 일도 없다. 감각과 생각으로는 알 수 없고, 말로 규정할 수도 없다. 단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neti neti)’는 식으로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행동도 본인의 아뜨만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이 아뜨만이 나의 본질인 것이다.

또한 아뜨만은 인식되지 않는 인식의 주체요, 생각의 주체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을 때나 숨 쉬고 말하고 있을 때도, 그 배후에 있으면서 그것을 성립시키고 있는 당체다. 이렇게 아뜨만은 인식을 포함한 모든 행위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한 과보도 맡게 된다. 행위가 남기는, 합당한 과보를 초래하는 힘인 업을 내세에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도 아뜨만이다. 따라서 바라문교에서 윤회의 주체는 아뜨만이다.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까? 사후에 육체는 소멸하지만 나의 아뜨만은 소멸되지 않는다. 임종이 다가왔을 때 아뜨만은 신체에서 빠져나간다. 이때 지금까지 행한 행위의 결과인 업도 아뜨만에 부착되어 아뜨만의 뒤를 따른다. 마치 수를 놓는 여인이 다 놓아진 수를 풀어 새로운 모양의 수를 놓듯이, 아뜨만은 부착된 업에 따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모습의 몸을 취한다. 이 새 몸이 다하면 아뜨만은 다시 그 몸을 빠져나와 직전까지 쌓은 업에 합당한 몸을 새로이 취한다. 이런 식으로 윤회는 지속된다.

모든 욕망을 방기하고 완전히 ‘초월적 자기’에 도달했을 때 이때 나의 아뜨만은 일체의 부착물 없이 홀로 몸을 빠져나와 브라흐만(우주의 최고 원리) 그 자체가 된다. 그 몸은 개밋둑 위에 버려진 뱀의 허물처럼 생명 없이 눕혀지고, 이때의 몸을 갖지 않는 불사(不死)의 아뜨만이 바로 브라흐만 그 자체인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나’는 더 이상 숱하게 많은 다른 ‘나’, 즉 타인과 구별된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우주의 일체가 된다.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해탈이며, 이제 다시 윤회하는 일은 없다.

불교 경전에서 언급되는 아뜨만

초기 경전인 아함과 니까야에서 무아(無我)는 무상(無常)과 고(苦)와 연관되어 함께 설해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 일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색(色, 육체)은 무상이며, 무상인 것 그것은 고이며, 고인 것 그것은 무아(無我, an-attan, ‘비아’로도 번역 가능)이며, 무아인 것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며, 그것은 내가 아니고, 그것은 나의 아뜨만이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를 가지고 보아야 한다. (뒤이어 수, 상, 행, 식에 대해서도 동일한 내용이 언급된다) - 『상윳따 니까야』 22.15

색, 즉 육체는 영원하지 않고(=무상), 생각대로 되지 않으며(=고), 무아라고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무아라고 한 부분의 빨리어 원어는 ‘안-앗딴(anattan)’이고, 이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는 ‘안-아뜨만(an-tman)’이다. 명사를 부정하는 접두사 ‘아(a)’는 모음 앞에서는 ‘안(an)’으로 바뀌는데, 이 ‘안’이 아뜨만 앞에 붙은 것이 ‘안-아뜨만’이다.

산스끄리뜨에서 이렇게 부정의 접두사가 붙게 되면 그 명사는 두 가지 형태로 부정된다. 이것을 아뜨만에 적용시켜 말하면, ‘아뜨만은 없다’와 ‘아뜨만이 아니다’라는 형태로 부정되는 것이다. 한문 경전에서 ‘아뜨만은 없다’는 ‘무아(無我)’로, ‘아뜨만이 아니다’는 ‘비아(非我)’로 각각 번역되어 있다.

번역 이전의 원어가 ‘안-아뜨만’이라면 한문 경전에서 ‘무아’라고 번역되어 있어도 ‘비아’로 대체할 수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위의 인용문에서의 ‘무아’도 ‘비아’로 바꿔서 새길 수 있는데, 여기서는 무아라는 용어가 일반인에게 익숙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아라고 옮겨 놓았을 뿐이다. 문제는 ‘안-아뜨만(an-tman)’을 ‘무아’와 ‘비아’, 이 둘 중 어느 쪽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다.

왜냐하면 무아는 완전히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비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A는 아뜨만이 아니다’라고 할 경우, 그것은 아뜨만 자체는 부정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아뜨만의 유무에 대해 어느 쪽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학자들은 주로 ‘무아’로 볼 것인가 ‘비아’로 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석가모니는 바라문교의 아뜨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의 답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필자는 우선 아함과 니까야에서 아뜨만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부터 살피고 싶다. 과연 바라문교에서 의미하는 그대로 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니까야에 많이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색(육체)은 비아(非我, an-attan)이다. 만약 색이 아뜨만이라면, 색은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또한 색에 대해 ‘나의 색은 이렇게 되어라’라든가 ‘나의 색은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색은 비아(非我)이기 때문에 병에 걸린다. 또한 색에 대해 ‘나의 색은 이렇게 되어라’라든가 ‘나의 색은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뒤이어 수, 상, 행, 식에 대해서도 동일한 내용이 언급된다) - 『상윳따 니까야』 22.59 등

육체(색)가 아뜨만이라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므로 병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아뜨만을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라문교에서의 아뜨만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바라문교의 아뜨만은 육체를 형성한 당체이기는 하지만 육체를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존재는 아니다. 육체가 병들더라도 자신은 그 병에서 초월해 있기는 하지만, 육체가 병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바라문교에 따르면 우리 모두에게는 아뜨만이 있다. 그렇지만 바라문교도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자신의 명령만으로 스스로 미남미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뜨만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니까야의 범위 내에서 언급되는 아뜨만에는 바라문교적인 아뜨만의 개념은 보이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바라문교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던 용어를 불교가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되, 그 의미를 불교적인 의미로 바꾸어 사용한 예는 더러 있다. 새로운 사상을 전혀 모르는 상대에게 가르침을 펴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업(業)이다. 바라문교에서 한때 ‘제사 행위’를 의미하던 업을, 불교는 ‘의사(意思)’·‘의도’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렇게 아뜨만이라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바라문교와 불교가 그 의미를 각각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불교에서 아무리 아뜨만이 없다거나 아뜨만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바라문교의 아뜨만과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석가모니가 ‘무아’ 또는 ‘비아’를 설하셨다 해도, 그것이 바라문교의 아뜨만을 긍정했다거나 부정했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된다.

불교는 왜 아뜨만의 의미를 변형시켜야만 했을까? 불교 경전에 언급된 아뜨만의 의미가 바라문교의 그것과 다르다면, 그 경전 구절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면 관계상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다루고자 한다.


글_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글_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등이 있다.

*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1,0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에서 수행・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