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생각과 생각 사이

김신일 개인전 <ㅐㅏㅘㅐㅏㅏㅣ> 리뷰 & 작가 인터뷰

2019-07-01     마인드디자인(김해다)

공(空) 사상을 바탕으로 마음의 작용을 표현해온 김신일 작가의 개인전이 남양주 갤러리 퍼플에서 열리고 있다. 월간 「불광」 2018년 1월호에서 금강 스님과 함께 현대적 불교미술에 대해 논하고, 제5회 붓다아트페스티벌에서 시대와 호흡하는 청년 불교미술 작가들을 지원하고자 마련한 ‘청년불교미술작가공모전’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불교계와도 인연이 깊은 김신일 작가. 그의 개인전 현장에서 작가와의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다섯 가지 색 사이의 만 가지 색
김신일 작가는 주로 무채색 계열의 작업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 전시장 중앙에 커다랗게 서 있는 화려한 색깔의 작품 <오색사이: In between Five Colors-space>를 보면서 작가의 작품세계에 무언가 중대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색의 폐품을 찍은 사진을 가로로 길게 늘여 세로 2m, 가로 5m에 이르는 둥글린 구조물에 부착하고, 여러 겹의 코팅 작업을 통해 고화질 텔레비전 화면과 같은 효과를 준 김신일 작가의 <오색사이>. 설명을 듣기 전에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추상화된 폐품 이미지는 그 커다란 크기와 높은 해상도 탓에 약간의 현기증마저 느끼게 했다.

김해다
<오색사이>를 가만히 바라봤더니 눈이 좀 피로해집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사물들을 바라보거나 영화관 제일 앞자리에 앉아 내 눈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대한 스크린을 애써 마주 보는 순간의 피곤한 감정이랄까요. 고정된 인식을 넘어 실상을 보는 데 관심 있는 작가님이 의도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김신일
(웃음) 그럴 수 있겠네요. 눈과 같이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게 해주는 감각 기관은 이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애매한 것을 맞닥뜨렸을 때 다소 힘듦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눈의 피로감을 주려 구체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작품을 구상하며 명명백백하지 않은 모호한 상태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김해다
그 모호함과 현기증은 ‘사이’라는 단어와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요. 작품의 제목인 <오색사이>는 어떤 의미인가요?

김신일
지난 개인전을 준비할 무렵부터 ‘생각과 생각 사이’의 틈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과 다음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는데요. 『도덕경』 12장의 첫 구절로, 다섯 가지로 구분된 색깔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는 뜻의 ‘오색령인목맹(五音令人耳聾)’이 저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여기서 오색은 오방색, 즉 청􀇁황􀇁적􀇁백􀇁흑 다섯 가지로 색깔을 구분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이 다섯 가지 색깔 말고도 수천, 수만 가지의 색깔이 있는데도 오색의 구분에 사로잡혀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그것은 맹인과 같다는 뜻이지요. 제가 작업을 통해 보고자 하는 ‘생각과 생각 사이’가 이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아 <오색사이>라고 제목을 지었습니다.

김해다
작년, 금강 스님을 모시고 마련했던 차담 자리에서 스님께서 그 ‘생각과 생각 사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와 같다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이 나는데요. 이와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색사이>의 이미지가 쓰레기를 찍은 사진을 가로로 늘린 것이라 들었습니다.

김신일
우연한 기회에 폐품 사진을 오랫동안 보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폐품 역시 ‘사이’의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에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버려진 물건들, 이름과 정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무엇’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 폐품들의 그 애매모호한 상태가 재미있었습니다. 계속해서 구분 짓고 정의내리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간 인식의 한계로 인해 가려져 있는 아름다움의 단계가 있다면 바로 폐품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8시 22분 31.384028…초
‘사이’에서 무념(無念), 무상(無想), 무주(無主)의 시각을 찾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는 무심하게 걸린 두 시계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똑딱똑딱 소리도 나고 움직임도 있지만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는 않는 시계. 시침과 분침을 파라핀으로 찍어 누른 탓에 시간이 흐르는 듯 흐르지 않게 된 시계는 이쪽과 저쪽, 이 색과 저 색, <오색사이>에서 쓰레기를 찍은 사진의 한 픽셀과 또 다른 픽셀, 그리고 8시 22분과 8시 23분의 이항대립을 떠나 실상을 보고자 하는 몸짓이 아니었을까.

김해다
이 시계 작품은 무언가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면밀히 살피려는 작가적 선언과 같이 느껴집니다.

김신일
사실 이 작품은 제가 작업실에서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동안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던 단순한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웃음). 제가 보고자 하는 ‘사이’는 시각적인 ‘사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소리와 같은 시간적 요소에서 더욱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과 생각 사이’라는 문구에서 모음만을 남겨 놓은 전시 제목 <ㅐㅏㅘㅐㅏㅏㅣ> 역시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되기도 했습니다. 자음과는 달리 모음은 발음할 때 소리가 끊기지 않고 시간 속에서 지속되는 성향이 있는데요. 이 전시 제목을 누군가 소리 내어 읽는다면 ‘생각과 생각 사이’를 1과 3 사이에 있는 2처럼 단순하게 구분 짓지 않고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농담과 같은 것이었지요.
 


느리게 흐르는 시간
<1380초 보기>는 23분 동안 서서히 변화하는 한 가지 풍경을 가만히 담은 영상 작품이다. 아침에 차를 마시며 작업실 창문 밖 풍경이 아주 느리게, 그렇지만 분명하게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던 작가는 자신의 경험으로 관객을 초대하고 있었다. 스틸 사진으로 보일 만큼 느린 풍경의 변화를 1380초, 24분 동안 조용히 지켜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른편에 거꾸로 재생되고 있는 영상과 비교해야만 겨우 화면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만큼 성급하고 무딘 감각이 느리고 예민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작가 노트에 쓰인 작가의 말처럼 “느리게 보려 하기 때문이 아니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연속을 자세히 보려 했더니” 느리게 보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신일 작가의 작품과 함께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따라가 보기를 추천한다.


김신일 개인전 <ㅐㅏㅘㅐㅏㅏㅣ>
장소 : 갤러리 퍼플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수레로 457-1)
기간 : ~2019년 7월 6일 (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 : 031-521-7425
자세한 내용은 갤러리 퍼플 홈페이지(www.gallerypurple.co.kr) 참조


이달의 볼 만한 전시

꽃으로 전하는 가르침 ― 공주 마곡사 괘불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 2019. 4. 24. ~ 2019. 10. 20.
문의: 02-2077-9499
1687년 5월, 마곡사 승려와 신도들의 간절한 마음과 노력이 모여 높이 11m가 넘는 괘불이 완성됐다. 찬란한 햇빛 아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을 공주 마곡사 괘불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보자.


 

박서보 ―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 2019. 5. 18. ~ 2019. 9. 1.
문의: 031-992-4400
대표적인 단색화가 박서보. 그의 전 생애에 걸친 화업을 조명하는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비워내는 수행의 과정”이라 부르는 그의 작품세계를 이번 전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절필시대 ―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1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서울 | 2019. 5. 30. ~ 2019. 9. 15.
문의: 02-2022-0600
국립현대미술관에 최초로 근대 불화가 전시되고 있다. 1930년대에 전통 불화의 법식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불화는 해인사에서 후원을 받았던 근대화가 정종여가 그린 진주 의곡사 괘불이다. 근대 불화가 어떻게 시대와 호흡했었는지 살펴보자.



글. 마인드디자인
한국불교를 한국전통문화로 널리 알릴 수 있도록 고민하는 청년사회적기업으로, 현재 불교계 3대 축제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서울국제불교박람회·붓다아트페스티벌을 6년째 기획·운영하고 있다. 사찰브랜딩, 전시·이벤트, 디자인·상품개발(마인드리추얼), 전통미술공예품유통플랫폼(일상여백) 등 불교문화를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며 ‘전통문화 일상화’라는 소셜미션을 이뤄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