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한울인 나라

빛의 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2007-09-15     관리자


아침은 그렇게 왔다. 내가 깊은 밤의 어둠 속으로 몸을 내밀었을 때 바람은 매섭게 내 정신을 휘젓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몇 잎의 나뭇잎새가 가로등 불빛 아래 뒹굴고 있는 한켠에 어지러운 세상을 가득 실은 찢어진 신문이 비에 젖어 있었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길들을 자동차들이 무섭게 질주하는 거리에서, 왜 느닷없이 조태일 시인의 「국토」중의 한 구절이 떠올랐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늘 홀로였다. 싸움은 많았지만 승리는 늘 남의 것이고 남은 패배는 늘 내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바람부는 밤거리에서 그것도 열두 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를 기다리는 심심한 거리에서 내 지난 삶의 승리와 패배를 떠올리며 진실로 기다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람부는 광야에서 그날이 가까이 왔다고 소리치던 세례요한의 불 같은 외침이었을까.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만 사람을 위해 전하던 붓다의 강물같은 말씀이었을까. 아니다. 그밤 내가 기다렸던 것은 그저 바라만 보아도 듣기만해도 생각만해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그리운 사람 하나 기다렸을 것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 하나 기다렸을 것이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물먹은 솜처럼 피곤에 젖어 돌아왔고, 그리고 쓰러져 잠들었다. 내가 깨어났을 때는, 내가 잠이 든 뒤에도 살아있던 어둠이 저 혼자 스스로, 몸을 사른 뒤였다.
창문을 열었다. 아침은 그렇게 왔다. 지난 밤의 내 기다림에 답신이라도 보내듯, 나무마다 지붕마다 눈꽃이 피어 있었다. 모든 길들이 모든 차들이 온 세상이 눈에 싸여 새하얀 눈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나는 흐트러진 내 정신을 다스리고, 내리는 눈발 맞으며 희끄므레하게 펼쳐져 있는 전주와 멀리 우뚝 서 있는 모악산을 바라 보았다.
지금 저 눈내리는 모악산이, 위대한 어머니의 산 모악산이 기로에 서 있다. 자본의 논리와 개발의 논리에 밀려 저 민족의 성산 모악산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호텔이 들어서고, 위락시설이 들어서고, 골프장이 들어설 계획이다. 일찍이 미륵신앙을 이 나라에 토착화시킨 진표율사의 금산사가 있는 곳이 모악산이며, 후백제를 세웠던 견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 모악산이다. 정여립의 산, 동학의 산, 강증산의 사상이 펼쳐진 모악산이 지금 갈기갈기 해체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모악산과 같은 운명에 처한 산과 강들이 어디 이 나라에 하나 둘이랴. 점봉산이 그렇고 우이령이 그렇다 ‘사람과 자연은 하나’라는 미사여구만 앞세운 채 개발과 보존의 상호보완도 없이 서두르고만 결과들이 얼마나 극명하게 나타났던가.
다리가 무너졌다. 땅이 꺼졌다. 거대한 백화점이 폭삭 주저 않았다. 수천 수조의 천문학적인 돈들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사람들이 경악하고 넋을 잃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속에 그 날이, 그 사건이 너무도 쉽게 잊혀진다.
혼란과 혼돈 속에 세월은 가고 그리고 지난 밤에 내가 잠든 사이에 사상의 모든 것을 덮어버리듯이 눈이 내렸다. 아침은 그렇게 새로움으로 왔다. 사람의 역사도 자연의 역사도 돌고 도는 법.
나는 생각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동학에서는 사람의 최대 덕목을 “말이 없고, 어리숙하고 서툰 곳에 둔다”고 했다.
등불을 들고, 사람 하나 찾던 현자도 사라진 이 거리에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희미한 촛불 하나 들고서 그리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하나 찾아 나서고 싶다.
눈 내리는 소리, 눈이 녹는 소리를 들으며 아무도 밟지 않는 눈길을 걸어 그리운 그 나라에 가고 싶다. 사람이 사람을 믿고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나라, 사람이 한울인 나라, 그 나라에 가고 싶다. “우리는 수백만 금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의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마쨔의 말을 기억하며.

신정일 님은 ‘54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났다. 황토현 문화연구회장과 정월대보름 보존회 부회장, 그리고 모악산 살리기 공동대책 위원회 공동대표, 김재남, 손화중 장군 추모사업회 운영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얼마전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라는 역사기행 산문집을 펴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향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