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나는 불교] 서양에 오딧세이가 있다면 동양엔 서유기가 있다 / 김천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눈물 나고 쓰라린 인생의 의미를 불교적 가르침으로 풀어낸 코미디 영화

2019-05-28     김천

<서유쌍기(西遊雙記)>는 <월광보합(月光寶盒)>과 <선리기연(仙履奇緣)> 두 편으로 된 시리즈 영화이다. 두 영화는 1994년 홍콩에서 한 달 사이로 개봉됐다.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서유기. 삼장법사가 손오공 일행과 함께 요괴를 물리치며 서역으로 불경을 찾아 떠나는 내용이다. 서양에 대서사시로 일리야드 오딧세이가 있다면 동양에는 서유기가 있다. 그야말로 삶이라는 모험을 떠나 얻기 어려운 것을 성취하는 인생의 진실이 담긴 이야기다.

주성치는 희극 배우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 대부분은 희생과 헌신, 고난을 극복하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희극이지만 웃어넘기기 어려운 짙은 아픔이 그의 웃음 속에 담겨 있다. 그런 점이 주성치 영화의 독특함으로 꼽힌다. 희극인데 눈물이 나고, 웃으면서 인생의 쓰라림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 그의 영화의 묘미다.


주성치의 영화 중 걸작을 꼽으라면 그의 팬들은 주저 없이 <서유쌍기>를 든다. 이제껏 수없이 만들어진 서유기 영화 중에서 독보적으로 평가된다. <서유쌍기>는 앞서 만들어진 홍콩의 다른 흥행작들의 상황과 대사를 거리낌 없이 베꼈다. 잘 알려진 <중경삼림>, <동사서독>, <동방불패>를 비롯한 유명 영화들의 장면과 인물, 명대사가 영화를 보는 내내 나온다. 표절을 감추기는커녕 관객이 알아채지 못할까 봐 반복하며 강조하고 있다. 원작의 진지한 장면을 떠올리며 그 실없음에 함께 웃게 된다.

서유기는 어린 시절 동화로 읽고 만화로 보고, 커서는 연극과 영화, 드라마로 끊임없이 보게 되는 이야기다. 그 내용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알려졌고 새로움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서유쌍기>는 새롭고 다르다. 두 편의 영화, <월광보합>과 <선리기연>은 500년의 시간을 두고 꼬여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없고 사건과 사건은 인과를 갖지만 앞과 뒤가 섞여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시간, 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후회를 남기며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인간사. 고통 속에 놓인 삶의 본질은 어리석음과 애욕 때문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서유쌍기>는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여지없이 속되다. 삼장법사는 떠벌이에 주책없이 묘사되고, 신선들마저 우스꽝스럽고 멍청하다. 요괴한테 맥없이 당해도 대책이 없다. 그런데도 삼장법사와 신선들은 자비심을 잃지 않았으며, 인간을 돕고 불법을 수호하는 데 물러서지 않는다. 그 어떤 삼장법사보다 매력이 있고 신선은 배불뚝이 이웃처럼 친숙하다.

서유기 속에 등장하는 흑풍령이나 화염산, 백사하 등은 지금은 이름난 관광지가 됐다. 마음만 먹으면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통해 편하게 가서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둘러보고, 현장 스님의 활약과 더불어 서유기 속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하지만 천 년 전만 해도 아무나 갈 수 없는, 목숨을 걸어야 갈 수 있던 땅이었다. 그 어려움을 뚫고 불교는 서에서 동으로 전해졌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속된 욕망을 버리고 세상에 지혜와 자비를 전하기 위해 그 길을 걸었는지 상상할 수 있고, 그 이야기가 <서유쌍기>의 핵심이다.

서유기는 명나라 시대 오승은의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온전히 그의 창작은 아니라고 한다. 현장 스님의 대당서역기를 기반으로, 인도의 전설과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이야기와 소설, 연극·희곡들이 시대를 흐르면서 하나의 드라마로 엮였다고 한다. 서유기의 원전은 당나라와 송나라 저잣거리에서 불렸던 강창문학(講唱文學)에서 뿌리를 찾고 있다. 강창문학은 대중들에게 불법을 전하기 위해 스님들이 시장 바닥에 판을 벌려 불경을 이야기로 각색하고 노래하던 문학이다. 강창을 펼치던 스님들을 강창승(講唱僧)이라 불렀다. 강창문학은 둔황에서 중국 시안을 거쳐, 이 땅에까지 영향을 펼쳤는데 판소리도 대표적인 강창문학의 변형으로 꼽는다. 회심곡, 백발가, 참선곡도 대중들에게 다가가 불법을 전하는 강창문학으로 볼 수 있다. 강창문학 중 가장 인기 있던 주제가 현장 스님의 구법 이야기인데, 여러 가지 내용이 섞이면서 서유기라는 걸작이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 영화는 두 종류의 녹음본이 있다. 광둥어(廣東語)와 북경어판인데, <서유쌍기> 마니아들은 광둥어판을 더 높게 꼽는다. 북경어의 반듯함보다는 광둥어의 과장된 느낌이 영화에 더 어울린다. 월광보합에 달빛을 비춰 타임머신으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을 주문으로 외쳐야 한다. 북경어판에는 그냥 ‘반야바라밀’로 들리지만, 광둥어판에서 주성치는 달빛을 가르며 거듭 ‘뽀로뽀로미’를 외친다. 심각한 장면에서 그의 반야바라밀 염송은 즐겁고 유쾌하다.

이 영화를 다시 주목하는 이유는 미디어 시대 불교 콘텐츠의 고민에 대한 답을 읽을 수 있어서이다. 천 년 전 스님들은 왜 탁자를 들고 저잣거리로 나갔으며, 사람들 앞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담으로 표현하고 노래했을까. 거룩한 육바라밀과 자비의 가르침을 어떻게 즐겁고 유쾌한 이야기로 들려주었을까를 서유기를 통해, 그리고 희극으로 태어난 <서유쌍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덮인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책장에 꽂힌 거룩한 경전은 펼쳐서 세상을 위해 읽어야 하고, 가르침은 알 수 없는 진언과 의식의 굴레를 벗고 대중들 앞에서 살아나야 한다.

현장법사 일행이 서역길로 떠나는 <선리기연>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제가 일생소애(一生所愛)가 흐르는 장면은 압권이다. 애욕을 벗고 가르침을 구하러 떠나는 손오공의 운명에 “고해 속에 반복되는 사랑과 미움은, 속세의 피하기 어려운 운명이니, 서로 사랑하지만 끝내 곁에 두지 못하네.”를 노래하며 먼지 바람 부는 사막으로 걸어가는 일행의 뒷모습을 비춘다. 사랑하는 것을 떠나야 하는 아픔(愛別離苦)과 구하려 하나 얻지 못하는(求不得苦) 고통이 가슴을 저민다. 노관정의 간절한 노래를 들으면서, 손오공이 되기 전 지존보와 자하선인의 가슴 아린 사랑이 관객들의 눈가를 적시게 한다. 이런 슬픈 코미디가 나의 인생일 수도 있다.    
 

<서유쌍기>는 근래에 후편과 리메이크판이 제작됐는데, 
원작의 뛰어남을 현재의 제작 기술과 자본으로도 넘어서지 
못했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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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쌍기>는 구글플레이와 유튜브에서 유료로 볼 수 있다.

김천
동국대 인도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방송작가, 프로듀서로 일했으며 신문 객원기자로 종교 관련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여러 편의 독립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지금도 인간의 정신과 종교, 명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