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제자 이야기] 아나율 존자 2

2019-05-28     이미령

|    시체를 목에 두른 나무꾼 이야기
왕자였던 시절부터 스님이 된 이후까지 부족한 것을 겪어본 적이 없는 아나율 스님! 대체 전생에 무슨 복을 그리 지었는지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맛난 공양을 드신 도반 스님들을 향해 아나율 스님이 자신의 전생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오래전 어느 생에선가, 아나율 스님은 바라나성에 살고 있는 가난한 나무꾼이었습니다. 나무를 해다가 장에 내다 파는 나무꾼 신세라 늘 무일푼 신세였지요.

한때 이 나무꾼이 살고 있는 도시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굶어 죽는 사람이 속속 나왔고 거리에는 시체들이 즐비했습니다. 이런 와중이니 탁발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수행자들은 더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 아침, 파사타라는 벽지불 한 분이 탁발에 나왔다가 들고 나온 발우를 그대로 들고 다시 성을 돌아 나오게 되었지요. 가난한 나무꾼이었던 전생의 아나율이 그 벽지불의 빈 발우를 보고 말했습니다.

“제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변변찮지만 피밥 한 그릇이 있습니다. 그거라도 드시지요.”

나무꾼은 벽지불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가서 피밥을 보시했습니다. 공양을 받고 벽지불이 떠나간 뒤 나무꾼은 땔나무를 마련하려고 성 밖 공동묘지(시다림) 근처로 가서 나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백골이 다 된 시체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더니 나무꾼의 목을 끌어안는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나 놀라고 무서워서 나무꾼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시체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의 목을 꼭 끌어안은 시체는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몸부림치고 구르고 두 손으로 붙잡고 떼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새 해도 기울고, 나무꾼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시체를 목에 두른 채 성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지요. 사람들은 그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습니다. 나무꾼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이 시체를 떼어내 주십시오. 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이 시체를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달아나던 사람들이 모두 몰려들었지만 나무꾼 목에서 시체를 떼어낼 수는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무꾼은 시체를 목에 두른 채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나무꾼이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시체를 떼어내려는 순간 백골의 시체는 스르르 떨어지더니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무꾼의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니 공동묘지에서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시체가 황금 덩어리였단 말인가. 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나는 그토록 지겹던 가난을 벗어나게 됐구나.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러나 이내 나무꾼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엄청난 황금을 나 혼자 쓸 수는 없다. 죽을 때까지 써도 내가 쓴 흔적조차도 나지 않을 거야.’
나무꾼은 이내 왕에게 달려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고하며 아뢰었습니다.

“모쪼록 대왕께서 제가 받은 보물덩이를 가져가셔서 나라에 필요한 곳에 쓰시옵소서.”

그러자 왕은 이 나무꾼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그의 황금덩이를 가져오도록 신하들에게 명했습니다. 신하들이 여럿 나무꾼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나무꾼은 자기 방에 놓여 있는 황금덩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이 황금 덩어리를 가져가십시오.”

그런데 신하들이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그곳에는 백골의 시체 한 구만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신하들은 대뜸 화를 냈지요.

“감히 이런 장난을 치느냐. 저 시체를 지금 황금 덩어리라고 하다니. 폐하를 능멸한 죄를 어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구나.”

신하들이 화가 잔뜩 난 채로 왕에게 돌아가서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나무꾼은 신하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눈에는 번쩍번쩍하는 황금덩이인데, 왜 저들은 자꾸 시체라고 말하는지 말이지요. 나무꾼도 신하들을 뒤따라 궁으로 다시 들어가서 왕에게 간곡하게 청했습니다.

“제가 폐하를 속이겠습니까? 부디 제 집으로 가셔서 그 보물덩이를 가져가서 좋은 일에 쓰시기 바랍니다.”

하도 간청하는 바람에 왕이 직접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의 집에는 백골의 시체 한 구만이 왕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진노한 왕에게 나무꾼이 금덩이 몇 개를 손에 들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 금이 제가 지은 선업의 과보로 온 것이라면, 지금 왕의 눈에도 금으로 보이기를 바랍니다.”

그의 서원이 끝나기 무섭게 왕이 소리쳤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 전부가 황금 덩어리야!”

감탄해 마지않는 왕에게 나무꾼은 이른 아침에 벽지불에게 피밥 한 그릇을 공양 올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보시를 했구나. 그렇다면 이 보물은 온전히 그대의 것이다. 이 과보를 누가 빼앗아 가겠는가. 그대가 쓰고 싶은 대로 마음껏 쓰도록 하라.”

|    거친 밥 한 그릇이 낳은 복덕
아나율 존자는 자신의 전생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주었습니다. 겨우 밥 한 그릇의 보시였을 뿐인데, 그것도 기름지고 향기로운 밥이 아닌 거칠기 짝이 없는 피밥 한 그릇의 보시였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한 그릇의 거친 밥은 굶주림이 만연한 세상에서 가난한 나무꾼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요, 전 재산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보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기에게 현재 쓸모가 없어진 물건을 아낌없이 기부하는 것도 보시이겠으나, 종교적 차원에서 보시는 자기에게 정말 소중한 물건을,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주는 일입니다. 자기에게 소중한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베푸는 일, 이것이 종교적 차원의 보시입니다. 나무꾼의 피밥 한 그릇이 갖는 힘은 컸습니다. 나무꾼은 다음 생부터 하늘에 연이어 태어났고, 세력 있는 집안에 태어났고, 석가족 왕자로 태어나서도 ‘없다’라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복을 누리며 지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나율 존자는 역시 다릅니다. 도반들에게 전생 이야기를 들려준 뒤에 그는 이렇게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선업의 과보로 이뤄진 것입니다. 그 이후 한 번도 삼악도와 같은 곳에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어 해탈하였고 감로의 자리에 머물 수 있게 되었지요.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내가 누린 이로움과 행복은 부처님 덕분입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나를 살펴서 내가 깨달을 인연이 되었음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덧없음의 이치를 들려주시려고 신통으로 내가 있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행여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기면 속속들이 지혜를 나눠주셔서 의심을 풀어주셨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나는 머지않아 베살리 근처 대나무 숲 마을에서 반열반할 것입니다. 다시는 생사윤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짙푸른 대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나는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될 것입니다.”(『불본행집경』)    

부처님의 십대제자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의 치열한 수행을 쌓았고, 심오한 이치를 체득하신 분들입니다. 십대제자가 이루신 깨달음이란 경지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내게는 멀고도 먼 저 해탈열반의 언덕을 위해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들려주는 삶의 이력을 보면, 지금 우리가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선업을 차곡차곡 쌓아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몸으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쌓아 온 공덕이 그 사람을 해탈열반의 성으로 이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이 제일이라는 내용보다 그분들이 어떻게 살아오고 살다 가셨는지 그걸 음미하고 따라 하다 보면, 
어느 사이 우리도 부처님의 제자로 자리매김할 날이 오겠지요. 
그 자리에서 독자분들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연재를 
즐겁게 읽어주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미령
불교강사이며, 불교칼럼리스트, 그리고 경전이야기꾼이다. 동국역경위원을 지냈고, 현재 BBS불교방송 ‘멋진 오후 이미령입니다’를 진행하고 있고, 불교책읽기 모임인 ‘붓다와 떠나는 책여행’을 이끌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붓다 한 말씀』,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간경수행입문』, 『이미령의 명작산책』, 『타인의 슬픔을 들여다볼 때 내 슬픔도 끝난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