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개론]공(空)이란 무엇인가?

2019-05-28     장휘옥, 김사업

“연기(緣起), 그것을 우리는 공(空)이라고 부른다.” 
(『중론』 제24장 관사제품 제18송 전반부)
“자성(自性)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론』 제15장 관유무품 제2송 후반부)

|    연기(緣起)에 대한 오해
모든 것은 조건(=인연)에 의존하여 생겨나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라고 했다. 그런데 연기를 이렇게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흰 종이 한 장과 파란 종이 한 장이 간격을 두고 떨어진 채 놓여 있다. 바람이 불어와 두 종이는 서로 겹치게 되었다. 얼마 후 다시 세찬 바람이 불어와서 두 종이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멀리 날아가 서로 떨어졌다. 그러나 흰 종이는 변함없이 여전히 흰 종이고, 파란 종이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흰 종이와 파란 종이가 바람이라는 조건에 의존하여 서로 붙게 되었고, 그 후에 불어온 세찬 바람이라는 다른 조건에 의해 서로 떨어졌다’라고 생각해서, 조건에 의존하여 서로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했으므로, 이것이 바로 ‘연기’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이해하면 타당할까? 얼핏 보면 맞는 것 같다. 더구나 위와 같이 말로 표현해 놓고 ‘조건에 의존하여’, ‘조건에 의해’라는 문구에만 주목하면 연기의 사례로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불교 역사에서 이와 유사하게 연기를 이해한 부파도 있었다.

위의 예에서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두 색깔의 종이는 붙기 전에도 각각 흰 종이와 파란 종이였고, 떨어진 후에도 변함없이 각각 흰 종이와 파란 종이다. 단지 바람이라는 조건에 의해 서로 붙었다가 떨어졌다 했을 뿐이다. 연기를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 두 종이는 늘 그대로이고 바람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붙었다 떨어졌다만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연기는 고정불변인 어떤 것이 조건에 의해 서로 결합하거나 분리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연기를 이렇게 알고 있다면, 나에게 불행이나 행복이 생겼을 때 그 원인 파악이나 해결책 강구도 이에 맞추어 진행될 것이다. 흰 종이 대신에 나를 대입하고 파란 종이 대신 불행이나 행복을 대입한 뒤, 흰 종이에 파란 종이가 붙듯이 ‘나에게 불행과 행복이 생겼다’고 이해하면 나름대로 그 원인이나 해결은 쉽게 도출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저 사람을 만나서 불행하다’, ‘가난해서 불행하다’는 경우를 위의 연기 이해 방식에 맞추어 살펴보자. 저 사람은 원래가 불행 덩어리인 파란 종이고, 가난도 원래가 불행 그 자체인 파란 종이다. 나는 이러한 것과 별개로 독립되어 있으며 언제나 나로서 지속되는 흰 종이다. 나에게 불행이 생긴 것은, 흰 종이에 파란 종이가 붙듯이 불행 그 자체인 ‘저 사람’과 ‘가난’이 여러 조건에 의해 나와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에게서 불행 그 자체인 ‘저 사람’과 ‘가난’을 분리시키는 여러 조건을 만들어 그것들에서 내가 멀리 떨어지는 것밖에 없다. 구체적으로는 저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거나,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 가난을 떨쳐 내어야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멀리 떨어졌다 해도 또 조건이 갖추어져 그것이 나와 결부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불행해진다. 그것이 나와 결부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그렇다면 영원한 평안인 열반에 이르는 길은 내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하여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 이외에는 없다.

연기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나온 것이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이다. 공사상의 견지에서 보면, 흰 종이와 파란 종이도 연기한 것이므로 언제나 변함없는 흰 종이·푸른 종이는 없다. 착각에 불과하다. 흰 종이와 푸른 종이는 지금 상태 아래서만 그 색일 뿐, 다른 조건에 들어가면 다른 색으로 변한다. 그 종이의 색깔은 고정불변이 아니며 무엇이라고 결정해서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저 사람’이나 ‘가난’이 불행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저 사람’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인도하는 등대가 될 수도 있다. 집안이 부유했다면 나태하고 거만한 일생을 보낼 수 있었던 사람이 오히려 가난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열심히 노력하여 큰 성취를 이룬 예는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저 사람’이나 ‘가난’이 자신에게 불행을 초래했다면, 그것은 ‘저 사람’이나 ‘가난’ 자체에만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이를 대하는 자신의 생각과 태도 등에도 원인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공사상의 입장이다. 마치 물은 컵에 들어가면 컵 모양을 하지만, 바가지에 들어가면 바가지 모양을 하는 것과 같다.
물을 ‘저 사람’이나 ‘가난’이라 한다면, 컵과 바가지는 그것을 대하는 각각의 사람이다. ‘저 사람’과 ‘가난’(=물)은 사람(=컵과 바가지)에 따라, 불행(=컵 모양)을 초래할 수도 있고 성공(=바가지 모양)의 계기도 될 수 있다. 연기에 대한 이러한 이해야말로 석가모니의 진정한 가르침이며 바른 이해라고 보는 것이 공사상의 입장이다. 공사상은 절망에 빠진 당신에게 묻는다. “누가 그대를 절망케 하는가?”

|    공·연기·무자성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
공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원어는 슌야(śūnya) 또는 슌야따(śūnyatā)로, 각각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와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에 대한 한자 번역어인 ‘공(空)’의 의미는 ‘비었다’이다. 이 방이 비었다고 하면, 이 방에 사람이나 기물 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인도 원어의 의미를 ‘공’이라는 한자로 의역한 것이다. 그럼 무엇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인가? 바로 자성(自性, svabhāva)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은 모든 사물에 자성이 없다는 것, 즉 무자성(無自性)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공사상을 대성시킨 이가 인도의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경)다. 그의 주저 『중론』 제15장 제2송에서 용수는 자성을 정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인연, 즉 조건에 의존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성은 연기하지 않는 것이며, 연기와는 양립될 수 없는 모순 관계에 있다. 연기를 인정하면 자성이 부정되고, 자성을 인정하면 연기가 부정되는 관계다. 연기하는 것은 조건이 충족되는 한도 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에 조건 여하에 따라 변화·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성은 연기하지 않는 것이므로 애초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고정불변이고 영원히 존속한다. 당신이 어떤 것을 조건(인연)에 따라 생멸·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여하에 상관없이 영원불변의 고정된 무엇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두 자성에 해당한다.

결론적으로, 자성이란 ‘다른 것(=인연·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면서, 어떠한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말한다. ‘자성’이란 용어 대신에 학계에서는 ‘실체’, ‘실재’, ‘고유의 본질’ 등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흰 종이와 푸른 종이는 자성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런 종이는 착각일 뿐 사실은 없다. 누구에게나 항상 불행을 초래하는 그런 불행이 있다면 그것도 자성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불행이라고 불리는 가난도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불행을 초래하지는 않으며, 분발시켜 성공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성으로서의 불행도 없다.

이와 같이 자성은 실제로는 없다. 자성은 마치 토끼뿔과 같다. 토끼에게는 뿔이 없다. 그러나 ‘토끼뿔’이라는 말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토끼를 실제로 보지 못하고 ‘토끼뿔’이라는 말만 들은 사람은 토끼에게 뿔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자성은 토끼뿔과 같은 착각의 소산물이다. 자성이 없다는 것을 한자 용어로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한다. 공은 바로 이 무자성을 의미한다.

연기와 자성은 양자택일의 관계이므로 연기가 진실이라면 자성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연기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이것은 모든 것은 무자성이라는 말이고, 이 무자성을 공이라 하므로 모든 것은 공이다. 연기=무자성=공인 것이다. 여기서 연기·무자성·공은 같은 것을 의미하는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용수는 『중론』 제24장 제18송에서 “연기, 그것을 우리는 공이라고 부른다.”고 하는 것이다.

|    연기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공’
이와 같이 공이나 연기나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연기’라는 기존의 용어를 두고 왜 대승불교는 ‘공’이라는 또 다른 용어를 제시해야만 했을까? 석가모니의 깨달음의 내용이기도 하고, 불교의 핵심이기도 한 연기가 위에서 언급한 내용과 유사하게 오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 들어와 이 오류를 시정하고자 ‘연기’라는 용어 대신에 ‘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기존의 부파불교에서 사용되던 ‘연기’라는 동일한 용어로는 올바른 연기를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파불교의 연기 이해는 무엇이 문제인가? 부파의 대표 격이자 가장 강력한 부파는 설일체유부였다. 설일체유부를 줄여서 유부라고도 부른다. 유부는 수많은 불교 용어의 개념을 정교하게 정립했다. 이것은 실로 유부의 크나큰 공적이고 이후의 불교 전개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한편 유부는 ‘5위(位) 75법(法)’, ‘삼세실유 법체항유’, ‘6인(因)·4연(緣)·5과(果)’라는 매우 복잡한 자신들의 독자적인 해석 체계를 세웠다. 이에 따르면 모든 것은 ‘최소 단위의 요소’ 간의 인과 관계에 의해서 생성·소멸한다. 아래의 내용은 이에 대한 설명이다.

‘최소 단위의 요소’를 유부는 ‘법(法)’이라고 부른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면 물이 생겼다가, 분리되면 물은 없어진다. 물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은 수소와 산소의 결합과 분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모든 것은 최소 단위의 요소인 ‘법’들의 이합집산에 의해 생성·소멸한다고 유부는 이해한다. 유부는 이러한 ‘법’에 75가지가 있다고 하며, 그것을 ‘75법’이라고 호칭한다.

유부가 말하는 이 ‘법’은 자신만의 독특한 본질을 가지며 변하지 않고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이 ‘법’은 자성에 해당한다. ‘법’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인연이 될 때만,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나타나 작용하고는 다시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사라진다. 마음도 이러한 ‘법’ 중의 하나이며, 다수의 번뇌도 ‘법’에 포함되어 있다.

유부에 따르면, 번뇌는 항상 번뇌로서 늘 있으며 인연에 의해 이것이 내 마음과 결합되면 나는 반드시 번뇌를 일으키게 되어 있다. 번뇌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선 번뇌와 내 마음이 분리된 상태로 지속되는 수밖에 없다. 앞에서 예를 든, 가난은 늘 불행을 가져오며, 이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돈을 많이 벌어 가난을 떨쳐 낼 수밖에 없다는 사고방식과 유사하다.

요컨대, 유부는 연기를 자성인 ‘법’과 ‘법’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과 관계로 보았다. 자성인 번뇌가 인연이 갖추어졌을 때 자성인 마음과 결합되어 번뇌를 일으키다가, 인연이 다하면 번뇌가 마음과 분리되어 번뇌 작용은 그친다는 식이다. 대승불교의 ‘공’은 번뇌를 비롯한 자성으로서의 ‘법’은 착각에 불과하고, 따라서 자성인 ‘법’에 기반한 연기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며 출현했던 것이다.

유부에 따르면 열반(유부는 ‘택멸’이라 불렀다.)도 자성인 ‘법’ 가운데 하나다. 이에 따르는 한, 열반은 어딘가에 열반 그 자체로서 늘 있으며, 그것이 나와 결합하면 나는 열반을 얻는다. 마치 현실을 떠난 어딘가에 유토피아가 늘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같다. 이에 반해 공사상을 대성한 용수는 “무상한 현실을 바르게 아는 것이 열반이다.”라고 말한다. 무상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이 현실을 떠나 열반은 없다. 이 현실의 실상을 바르게 아는 것이야말로 열반이라고 한 것이다.

|    말은 사물을 자성처럼 보이게 하는 요술쟁이
거실 한쪽 구석,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조그만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다. 그 항아리는 시어머니가 젊은 시절에 사용하던 요강이었다. 이것은 이 집 며느리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생 손자가 그 항아리를 보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에요?” 어머니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응, 양념을 넣어 두는 양념 단지란다.”

며칠 후 며느리가 양념을 보관할 용기를 찾고 있을 때 손자가 거실의 항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에 넣어 두면 되잖아요.” 이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가 기겁을 하며 말했다. “이 녀석아, 요강에다 양념을 넣으면 어떡하니!” 이튿날 소변을 막 가리기 시작한 손녀가 거실에서 갑자기 소변 볼 곳을 찾자, 할머니는 그 항아리를 사용했다. 옆에 있던 손자가 큰일이나 난 것처럼 말했다. “할머니! 양념 단지에다 오줌을 누게 하면 어떡해요!”

거실 한구석에 놓여 있는 저것은 요강인가, 양념 단지인가?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정지·고정된 모습이 아니다. 자성이 없는 것이다. 눈앞의 저것은 용변을 보면 요강이지만, 양념을 넣으면 양념 단지다. 흙을 넣고 난초를 키우면 화분이고, 맑은 물을 붓고 금붕어를 살게 하면 어항이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그것은 항상 요강이고, 손자에게는 항상 양념 단지다. 두 사람에게 그것은 자성으로서의 요강이고 양념 단지다. 사물이 이렇게 자성으로 오인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말(언어)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있는 그대로’의 저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것에 배당된 말, 예를 들어 ‘책상’, ‘베개’ 등이 가지는 고정된 의미만 확인하고 있는 것일까? 후자일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시작된 오랜 언어 습관을 통하여, 말이 가리키는 사물에 그 말이 의미하는 그대로 고정불변의 무엇, 즉 자성이 있다고 보는 습성을 부지불식간에 지니고 말았다. ‘베개’로 불리는 것은 원래부터 ‘잠을 자거나 누울 때에 머리를 괴는 것’이고, 이것은 변함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방석으로 사용하기를 주저한다.

‘요강’이라 부르기 때문에 그것은 요강이 된다. ‘요강’이라 불려 요강의 작용을 하면서 요강으로 존재하지만 그것 자체가 원래 요강인 것은 아니다. 말에 의해 그 말이 의미하는 대로 임시로 존재는 하지만, 그것은 말의 작용일 뿐 진실은 그것과 관계가 없다.

이처럼 말은 본래부터 있던 것을 그대로 나타내는 거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말대로 보이게 하는 요술쟁이다. 따라서 말이 보여 주는 그대로를 진실이라고 믿고 집착하면 큰 오류를 범한다. 원래부터 꽃인 꽃은 없다. 꽃으로 부를 때에만 그것은 꽃이 된다. “짜증난다.”라고 할 때에만 그것은 짜증나는 일이 되고, “가난하다.”라고 할 때에만 당신은 가난한 사람이 된다. 말에 주저앉으면 자유가 묶인다.

공이란 이론적으로는 자성이 없다는 ‘무자성(無自性)’을 의미한다. 실천적 측면에서 공을 말한다면, 그것은 ‘무집착(無執着)’이다. 공 그대로 산다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요강으로도 집착하지 않고, 양념 단지로도 집착하지 않고.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등이 있다.

장휘옥ㆍ김사업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1,0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에서 수행・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