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스크리트로 배우는 불교] 반야바라밀다

2019-05-28     전순환

이제 앞서 소개한 세존과 그의 제자들, 그밖에도 마이트레야(maitreya)의 음역인 미륵(彌勒)을 비롯한 보살마하살들, 신들의(devānām) 제왕(indra)인 샤크라(śakra), 즉 천제석(天帝釋)과 같은 천신(天神)들 등 여러 인물과 신들이 범본 반야부 불전 전반에 등장하며, 반야바라밀다를 포함한 다르마(dharma), 즉 법(法)들에 대한 담론을 진행해 나아간다. 반야바라밀다는 반야부에서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반야경들을 읽기 전, 이 용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필자는 어원적인 측면과 범본 『팔천송반야경』에서 파악되는 그 의미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그에 앞서 반야란 용어의 탄생이 경명(經名)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이 있기에 이에 대해 먼저 소개하기로 한다.

|    반야부의 경명
어떤 언어로 되어 있든 반야경들을 접해본 분들이라면 그 경명들을 보고 조금은 의아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반야(般若)-바라밀다(波羅蜜多)로 음역되는 프라즈냐(prajñā)-파라미타(pāramitā)가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에 반야부에 속한 총 11개 반야경의 경명으로 쓰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승천왕(勝天王) 반야경」(K1(6), 제566권-제573권)을 제외한 모든 경전의 명칭에 독특하게도 반야바라밀다를 수식하고 있는 형용사적 수사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품(小品) 반야경」(K1(4-5), 제538권-제565권)의 경우, ‘8’을 나타내는 아스타(aṣṭa)와 ‘1,000’의 사하스라(sahasra)로 합성된 ‘8,000’에 형용사를 만들어내는 여성형 이카(ikā)가 붙어 형성되는 아스타사하스리카(aṣṭasāhasrikā)는 ‘8천 개로 구성되는’을 의미하여, 경명은 「팔천-반야바라밀다」가 된다. 「대품(大品) 반야경」(K1(2), 제401권-제478권)의 경우 ‘5’의 판차(pañca)와 ‘20’의 윙샤티(viṁśati), 그리고 ‘1,000’의 사하스라로 합성된 ‘25,000’에 이카가 붙어 형성되는 판차윙샤티사하스리카(pañcaviṁśatisāhasrikā)는 ‘2만5천 개로 구성되는’을 의미하여, 경명은 「2만5천-반야바라밀다」가 된다. 산스크리트에서 10 초과 100 미만의 수사들은 영어식이 아닌 독일어식, 즉 일 단위가 십 단위에 선행하여 표현되는데, 이에 따라 판차-윙샤티는 ‘25’가 된다.

이밖에도 소위 『금강경』, 정확하게는 ‘금강’을 의미하는 와즈라(vajra)와 ‘절단’을 나타내는 체다(cheda)의 합성어에 이카가 붙어 ‘금강을 절단할 (만큼 강력한)’을 의미하는 와즈라체디카(vajracchedikā), 이 단어가 의역되어 있는 「능단금강(能斷金剛) 반야바라밀다경」(K1(9), 제577권) 또한 원제가 ‘3’의 트리(tri)와 ‘100’의 샤타(śata)로 합성된 ‘300’에 이카가 붙어 형성되는 트리샤티카(triśatikā)는 ‘3백 개로 구성되는’을 의미하여, 경명은 「3백-반야바라밀다」가 된다.

|    경 - 수트라
반야바라밀다경이란 한역의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통상 경(經)이 붙어 있지만, 실제 범본들에는 경을 의미하는 수트라(sūtra)가 빠져 있다. 그 이유는 통례적인 경전 시작의 첫 문장, 즉 “에왐(evam) 마야(mayā) 쉬루탐(śrutam)”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문구를 번역하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뒤로 전개되는 내용이 기록된 경전이 아닌 자신이 들은 바를 타인에게 들려주는 구전(口傳)의 형식으로 이야기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명칭에는 기록된 텍스트의 개념인 경, 즉 수트라가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구전된 반야바라밀다가 어느 시점에 와서는 문자로 기록되고 번역되어 텍스트의 형식으로 그 모습을 갖추었기에 한역에서처럼 경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송 - 쉴로카
위와 같이 수사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각각의 반야경이 서로 다른 시기에 기록되었을 것이고, 이후 모이고 축적됨에 따라 그 모두가 반야바라밀다에 대한 경전들이지만 나름 경의 구분이 필요했으리라 생각된다. 누구에 의한 발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방법은 각 경전의 분량에 따라 부여되는 수사였다. 그렇다면 이 수사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과연 무엇이 8천 개, 2만5천 개, 3백 개라는 것일까? 산스크리트 경명들에서는 구체적인 단어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수사는 쉴로카(śloka)와 그 개수를 나타내는 것이다. 한역의 경명에서는 이 단어가 『팔천송반야경』, 『이만오천송반야경』, 『삼백송반야경』처럼 송(頌)으로 표현되고 있다.

‘듣다’를 의미하는 어근 쉬루(śru)에 접미사 카(ka)가 붙어 형성된 쉴로카는 어원적으로 ‘소리, 음성, 찬양(가)’를 의미하며, 더 나아가 베다(veda) 문헌들의 운문 형식인 아누스툽(anuṣṭubh)에서 발전된 운문 형식을 의미하기까지 한다. 1쉴로카는 기본적으로 32음절로 구성되는 4구(句)를 나타낸다. 이 단위에 따르면 <팔천송>은 이론적으로 총 32×8,000, 즉 256,000개의 음절로 구성되는 텍스트 분량을 나타낸다. 단, 텍스트 내에서 모음과 관련된 산디(saṁdhi)가 정확하게 적용되어 있는 한에서이다. 예를 들어 -i로 끝나는 단어에 a-로 시작하는 단어가 따를 경우, 산디가 적용되지 않는다면 적용될 때의 일음절 -ya-가 아니라 이음절인 -i a-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베다의 운문 형식에 따른다면, 『팔천송반야경』을 비롯한 <반야부> 경전들은 원칙적으로 산디가 적용된 상태에서 쉴로카의 수가 측정되어야 한다. 필자가 산디를 철저하게 지키며 기존의 범본들을 재편집한 텍스트 <팔천-반야바라밀다>에 따르면 실제로 송의 개수는 8,400개에 이르고, 음절의 수는 32x8,400, 즉 268,800여 개이며, 단어의 수는 82,000여 개이며, 중복을 제외하면 11,127개로 집계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운문 형식을 나타내는 쉴로카, 아누스툽, 송 모두가 ‘찬양/찬송(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4구 32음절은 베다의 문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오래된 르그베다(ṛgveda)에 엄격하게 적용되는 아누스툽의 운문 형식이며, 르그(ṛg) 역시 ‘찬송하다’의 어근 르츠(ṛc)에서 만들어진 어근 명사로서 전적으로 ‘찬양, 찬송’을 뜻하는 단어이다. 종합해보면, 베다에서 유래하는 4구 32음절 운문 형식의 용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르그의 의미와 유사한 특정 단어들이 이후 그 형식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    반야
비록 ‘팔천’이란 수사가 붙는 경명의 비문(碑文)이나 사본들이 후기(後期) 파라(Pāla) 왕조(AD1100-1200)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났고, 한역 자료에서도 게송(偈頌)에 따른 구분이 당대(唐代)의 현장(玄奘) 이후인 7세기부터 명기되어 나오고 있지만 쉴로카의 개념, 앞서 소개한 천제석에 인드라(indra) 신, <금강반야경>에 인드라신이 가졌다던 강력한 무기인 금강, 이전 칼럼에서 언급한 세존의 제자들 가운데 마하가섭·마하가전연·마하목건련이란 이름들이 베다의 성인들에 유래한다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고유 명사이든 일반 명사이든 적지 않은 산스크리트 불교 용어들이 베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야로 음역되는 프라즈냐 또한 그러한 경우에 해당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이다. 반야에 대한 일반적인 번역은 일역이든 영역이든 ‘지혜(wisdom)’이며, 한역의 경우 일정하게 ‘반야’인 반면, 모니에르(Monier)의 사전적 의미는 ‘지혜, 지식, 분별, 판단’ 등이다. 피상적인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지혜’가 맞는 듯 보인다. 하지만 프라즈냐와 같은 명사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그 기저가 되는 어근에서 도출되기 때문에 어근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근 명사인 프라즈냐의 어근은 그대로 프라즈냐이다. 즈냐(jñā)에 ‘…에 대해’를 나타내는 접두사 프라(pra)가 붙은 이 어근의 의미는 ‘…에 대해 알다, 이해하다, 구분/구별하다’이다. 이 시점에서 베다란 단어의 의미와 비교해보기로 한다. 명사인 베다의 사전적 의미는 ‘(참된/성스러운) 지식’이며, 그 어근인 비드(vid)는 ‘알다, 이해하다’이다. 직접적인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힌두교 최고(最古) 4대 성전의 명칭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베다란 단어가 대승불교와 반야부의 핵심 개념인 반야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 대목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반야의 의미는 어원적 의미에 따른 ‘앎, 이해’이다. 그 대상은 세간의 모든 법이다. 문제는 대상인 제법(諸法)을 어떻게 아느냐는, 이해하느냐는 것이다. 『팔천송반야경』을 접하기 전까지 필자는 반야란 단어를 각종 어원 사전들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경전을 번역하면서, 정답은 아니겠지만 문제의 해답이 눈에 들어왔다. 해답의 열쇠는 경전의 12장 ‘세간의 시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항상 명사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프라즈냐가 ‘알다’로 번역되는 동사로 사용되며, 게다가 어떻게 아는지를 가늠케 해주는 야타부탐(yathābhūtam)이 함께 나타나는 대목이다. 이 단어는 ‘…에 따라’의 야타(yathā)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부타(bhūta)의 합성어에 표지(m)가 붙어 부사로서 기능하는데, 그 의미는 ‘존재하는 대로, 있는 그대로’이다. 따라서 동사와 함께 번역하면 ‘존재하는 대로, 있는 그대로 알다, 진여지(眞如知)하다’라는 뜻이 된다. 12장에서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한 문장을 소개하기로 한다. “여래는 반야바라밀다의 덕택으로 무량의 유정들, 무수의 유정들이라고 진여지하는 것이니라.”

|    바라밀다 
세존의 말씀에서처럼 반야는 거의 대부분 파라미타의 음역인 바라밀다와 합성되어 나타난다. 바라밀다의 의미는 보통 일역의 경우 ‘완성, 숙달, 지고(至高)’이며, 영역의 경우 ‘완성(perfection)’이다. 이에 따라 반야바라밀다가 의역이 되는 경우 ‘지혜의 완성(perfection of wisdom)’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는 파라미타의 어원적 분석에 따르면 ‘완성’은 이해가 되지만 사실 공감하기는 어려운 번역이다. 파라미타는 형용사 파라마(parama)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이 형용사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의 의미로 나타날 수 있고 실제 사전에서도 그렇게 기술되고 있지만, 그 중심이 되는 어원적인 의미는 평균의 정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이러한 내포를 감안하면, 파라마의 의미는 ‘최고의, 극도의’가 되며, 상태를 나타내는 접미사 이타(itā)가 붙은 파라미타는 ‘최고/극도의 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필자가 생각하는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파라마/파라미타가 반야와의 합성어가 아닌 반야와 분리되어 나타나는 대목이 『팔천송반야경』을 통틀어 단 1회, 5장 ‘복덕을 얻는 방법’에서 아난다와 세존의 대화를 통해 보여진다. 이 산스크리트 문장을 번역하는 것으로 이 칼럼을 마치도록 한다.    

“세존이시여, 전지자성으로의 회향(回向)을 통해 선근(善根)을 
성숙시키는 그러한 반야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극도로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그러한 극도(極度)로 인해 반야가 바라밀다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니라.”

다음 어원 여행의 대상은 5온과 관련된 용어들이다. 

 

전순환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대학원 졸업.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인도유럽어학과에서 역사비교언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시작된 한국연구재단 지원 하에 범본 불전(반야부)을 대상으로 언어자료 DB를 구축하고 있으며, 서울대 언어학과와 연세대 HK 문자연구사업단 문자아카데미 강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불경으로 이해하는 산스크리트-신묘장구대다라니경』(2005, 한국문화사), 『불경으로 이해하는 산스크리트-반야바라밀다심경』(2012, 지식과 교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