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암자의 스님들] 묘향대 호림 스님

어차피 산속에서 사는 것은 매한가지요

2019-05-28     이광이
사진:최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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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참 묘(妙)하다. 금년 정월 우번대를 찾아가다가 눈길에 막혀 포기하려던 차에 지리산 북편 달궁마을의 어느 펜션에 들어갔다. 이른 아침이라 다른 집들은 문을 안 열었는데, 그 집만 유독 장작에 불을 피우고 있어서 이끌리듯 들어간 것이다. 인사를 나누니, 덕동펜션 정창조 사장(57). 그는 여차저차 한 우리 사연을 듣더니 바로 트럭에 체인을 감고는 눈길을 뚫고 노고단까지 데려다주었던 고마운 사람이다. 우리는 그 인연을 따라 지리산 갈 때 자주 그 집에서 잔다. 그는 사경(寫經) 책을 수십 권씩 사서 주위에 나눠주는 불자이기도 하고, 지리산에서 약초와 버섯 등을 채취하는 산꾼이기도 하고, 조난 사고가 났을 때 긴급 투입되는 전북산악연맹 소속 구조 대원이기도 했다. 나는 늘 묘향대가 걱정이었다. 대개 지리산 다른 암자 토굴이야 차에서 내려 1시간 안팎 걸으면 된다. 하지만 여기는 반야봉이 동북방으로 능선 8부쯤에 품어 안은, 깊고도 높은 구중심처 아닌가. 쉽게 나설 엄두가 나는 곳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하늘이 숨겨 놓은 땅, 이 땅의 아란야로 딱 둘을 꼽으면 이북의 묘향산 법왕대와 이남의 지리산 묘향대였다. 묘(妙)한 것은 묘향산(妙香山)도 묘하고, 묘향대(妙香臺)도 묘하다. 어느 선방은 1년 안에 깨치고, 어느 암자는 한 달 안에 득도하고, 어느 토굴은 열흘 안에 도통한다는 구전들이 구구한 바, 이 두 곳은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그야말로 전설의 성지였다. 이런 걱정을 듣고 있던 정 사장은 “약초 캐러 자주 가는 곳이니 걱정 말라.”며 스스로 안내하겠다고 나섰으니, 참으로 불자다운 행동이었다. 산꼭대기는 봄이 늦다. 승속이 다른 것처럼, 마을에는 이미 백화만발하였고 철쭉도 시들어 여름으로 가는데, 산정에는 이제야 참꽃 피고 산벚 꽃잎 바람에 날리고 있으니 봄이 한창이다. 녹음이 짙어지기 직전, 이때가 고지대의 약초를 채취하는 마지막 타이밍이다. 아직은 잎이 여려 가지에 붙은 약초들이 눈에 보이지만, 조금 더 지나면 활엽이 무성하여 상황버섯 같은 값나가는 것들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정 사장은 약초 채취를 위해 어차피 가는 길, 묘향대 산길 안내를 겸하겠다는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지리산 제2봉 반야봉(1732m)을 등산로가 아닌 길로, 길 없는 길로, 곡선이 아닌 직선으로, 심마니들의 길로, 산을 타야 하는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으니….

사진:최배문

달궁 쟁기소로 입산했다. 쟁기소는 반야봉 북서쪽으로 흐르는 만수천 계곡의 못이다. 정상에 오르는 최단 코스의 출발지다. 반야봉에서는 4개의 물길이 발원한다. 북향하여 2개, 이곳 만수천과 동쪽 뱀사골이다. 이 물길은 경호강으로 합류하여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른다. 반야봉 남향은 서쪽으로 연곡사 피아골의 발원이고, 동쪽으로 쌍계사 화개천의 시원이다. 그러니까 반야봉에 서서 북쪽으로 오줌을 누면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오줌을 누면 섬진강이 되는 것이다. 계곡을 따라 산길을 오른다. 정 사장은 앞서 걷는데 해갈에 도움이 된다면서 당귀 잎을 따 준다. 더 가서는 삼지구엽초를 꺾어주고, 오가피순, 곰취 할 것 없이, 그의 손이 뭔가를 취하면 바로 나물이고 약초다. 계곡 옆에 왕릉처럼 검은색의 커다란 무덤이 있다. 이곳이 옛 삼한 시대 변한 땅인데, 계곡에서 철이 든 돌을 캐내 불로 녹여 철을 빼내던 ‘제철소’라 한다. 그에게서 역사와 자연을 배우며, 약초를 씹으며 올라간다. 완만한 계곡 길을 따라 걸을 때는 좋더니만, 갑자기 투구봉과 반야봉 사이의 능선을 향해 치고 들어간다. 부슬부슬 비가 내려 바위가 미끄럽고 위험한 탓이다. 오르는 방향은 있는데 길은 없다. 사면은 60도를 넘는 급경사다. 산죽을 잡고 발을 디딘 겉흙이 미끄러진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아래로 구를 수도 있다. 겁이 난다. 아! ‘길 없는 길’이란 정말 어려운 길이구나! 부처님이 걸었던 길이 ‘길 없는 길’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럴 때만 꼭 “관세음보사~알”을 암송하면서 겨우겨우 능선에 올라섰다. 정 사장은 앞서 걷다가 안 보이다가 다시 보이면 손에 뭔가 들려 있다. 구상나무에서 따온 상황버섯, 항암에 좋다는 자작나무 버섯, 말굽버섯, 생리불순 냉대하에 좋다는 작약뿌리까지 배낭 속으로 자꾸 들어간다. 능선을 한참 오르자 연안 김씨 묘가 나온다. 직진하면 반야봉이다. 거기서 왼쪽으로 내려간다. 고지대에서 자생하는 전나무와 구상나무,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썩어 천 년이라는 3천 년의 주목, 나무와 바위를 뒤덮고 있는 이끼들,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천연의 원시림이 펼쳐져 있다. 그 길로 한참을 내려간다. 투구봉에서 오는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로 돌았을 때, 거기에 뭔가 있다. 비 내리고 안개 자욱한 대숲 속에서 정말 거짓말처럼 노랗게 드러나는 지붕, 묘향대가 있다.

사진:최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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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느라고 고생들 했어요. 그런데 내가 그 길로 오지 말라고 했잖아. 몇 시간 걸렸어요?”

“아침 8시에 출발해 오후 2시 반이니까 6시간 반 걸렸네요.”

“아까 출발할 때 전화로 3시간이면 온다고 하길래 한번 와 봐라 했지. 여기 오는 세 갈래 길 중에 그 길이 제일 힘든 길이요. 사람마다 가는 길이 다 다른 거야. 남들 간다고 따라가는 게 아니야, 나는 내 길을 가야 돼. 약초꾼들은 산을 날아다녀요. 거기 쫓아가다가 제명대로 못살지. 좋게 등산로로 다니세요.”

호림 스님, 점심 해놓고, 방에 불 때 놓고 기다리셨다. 이제나저제나 해도 안 오기에 먼저 공양하시고 우리는 컵라면으로 허기를 때웠다. 당초에는 왕복 6시간 잡고, 이야기 2시간 하고, 당일 하산할 참이었는데, 벌써 오후 3시가 넘었다. 되돌아 내려가자니 앞이 캄캄하다. “아! 하룻밤 자고 갔으면, 부처님이시여!” 속으로 기도를 올리는 딱 그때, “지금 꼴들을 보아하니 이대로 내려가면 사고 난다.”면서 스님이 자고 내일 가라 한다.

묘향대는 둘이 산다. 호림 스님은 2004년에 들어와 15년 됐고, 처사 한 분이 같이 산 지 10년 됐다. 둘 다 60대고 스님이 몇 살 위다. 처사는 묘향대로 출가하여 스님 밑에서 머리를 깎았다. 1년 행자를 한 뒤, 화엄사에 계 받으러 갔는데 나이가 많다고 수계를 안 해주더란다. 그 후로 자르지 않은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온다. 부엌에서 아궁이 2개에 불을 때는 옆에 나란히 앉아 물어봤더니 “머리 깎으나 안 깎으나 뭣이 다르겠어요? 어차피 산속에서 사는 것은 매한가지요.”라고 한다. 산은 여름이 늦고 겨울이 빨라 제일 큰일이 땔감이다. 9월부터 첫눈 오기 전까지, 두 달 반은 나무를 해야 산 아래보다 긴 겨울을 날 수 있다.

사진:최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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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살면서 나무하는 것은 내 몫이다, 그래 생각해요. 보통 9월에 열 석 짐으로 시작해서 일곱 짐까지 하면 1년 치가 되는 거라.” 한 짐은 통나무 큰 것 3개, 약 50kg 정도의 나무 짐을 하루에 한 번 집에 부리는 것이다. 열 석 짐은 나무하는 곳과 집 사이를 그렇게 13번 왕복했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집과 가까운 곳에서 나무를 하니 13번 부리지만, 점점 집에서 멀어진 곳에서 채벌해야 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일곱 짐밖에 못 했다는 얘기다. 통나무를 베고 자르고 말려두었다가 지게에 싣고 하루에 열 번 넘게 산길을 오르내리는 일, 그것이 어찌 수행이 아니겠는가.

산은 밤도 빠르다. 날은 어둑어둑하고 안개비가 그쳤다 내렸다 한다. 방 안에 둘러앉아 이른 저녁을 먹는다. 방바닥이 뜨끈뜨끈하다. 등을 켜니 오랜만에 둘러앉은 가족처럼 화목하다. 30촉 백열등보다 더 희미한 불빛. 여기에 전기가 들어온 적은 없다. 하지만 태양광 덕분에 전기 맛은 보는데 법당과 방에 등 켜고, 라디오 듣고, 휴대폰 충전하는 데 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여기서 휴대폰은 필수품이다. 험한 산길 5시간 걸리는 암자를 누가 찾아오겠는가? 초파일 절에 온 사람이 많아야 5명 안팎이라고 하니, 그래서 어떻게 살아갈까? 여기에 비법이 있다. 휴대 전화로 법문을 하는 것이다. 전화 법문을 하면, 보시는 계좌로 들어온다. 문명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최첨단의 텔레콤으로 소통이 이뤄지고 있으니, 산꼭대기 암자는 그 덕에 살아간다. 밥은 낮밥 식은 것에 말린 누룽지를 같이 끓여 배는 곯지 않도록 양을 늘렸다. 찬은 배추김치, 열무김치 그뿐이다. 배추김치는 직접 담근 것, 신도의 공양물, 두 종류인데 직접 담근 것이 훨씬 더 맛있다고 했더니 스님이 좋아한다.

사진:최배문

“스님, 요 아래 ‘박영발 비트’라고 있지요?”

“있지, 한 15분 내려가면 있어. 내가 여기 처음 왔던 2004년에 비트를 찾으러 왔다가 못 찾고, 이듬해 연락병을 했던 소년 빨치산(김영승) 그분이 와서 비트를 찾은 거요.”

박영발은 남조선 빨치산 인민 유격대 전남도당 위원장이었다. 이곳은 그들이 1953년부터 이듬해 2월 군경에 의해 사살되기 전까지 무전사와 간호사를 두고 은신했던 지휘본부다.

“그 비트를 찾고부터는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인공기도 꽂아놓고 그랬지. 그런데 그즈음부터 자꾸 그쪽이 시끌시끌하더라고, 꿈에. 울음소리, 곡소리 같은 것도 들리고, 잠들지 못한, 억울한 영가들이 그런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하루는 새벽 예불 마치고, 요령 들고, 과일 좀 싸 들고 찾아갔지. 한 많은 이 영혼들이 극락세계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그 동굴 주위를 돌면서 천도재를 올려줬어요. 그랬더니 이제 편안해졌어, 그날 이후로 더 이상 꿈에 나타나지 않거든.”

마을로 치면 초저녁이건만, 산중에 밤은 깊다. 녹차를 마시다, 보이차로 바꾸고, 귀한 마가목 곡차도 한 모금 얻어 마시고, 산중에서 살아가는 얘기는 깊어간다.    

“스님 법명(虎林)에는 어찌 ‘호랑이’가 들어갔는가요?”

“그러니까 산에서 사는 팔자인가 봐.”

“묘향대에 어떤 연이 닿아 이 높은 데까지 오셨는가요?”

“1978년 내가 초발심해서 화엄사에서 행자 할 때라. 하루는 어느 노장님이 묘향대를 좀 같이 가자고 합디다. 쌀을 갖다 주려고 그런다면서. 그래 내가 반 가마씩 두 번을 져다 드린 적이 있어요. 한참 때, 산을 날아다닐 때지.”

“그 스님이 그 스님인가요?”

“맞아, 선방에 오래 계셨던 노장님인데, 여기서 살다가 내려가셨지.”

사진:최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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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스님은 출가하기 전 결혼을 해서 아들을 둘 뒀다. 어느 해 겨울 큰아들이 대학 시험에 합격했다. 형제는 지리산 묘향대로 출가한 아버지를 찾아 나선 길. 등산로도 제대로 닦여지지 않았던 시절, 묘향대는 얼마나 깊고 높은가. 혹한에 칠흑 같은 밤, 형제는 산길을 잃고 헤매다가 끝내 동사하고 말았다. 이듬해 봄 둘은 껴안은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선방스님은 그로부터 얼마 후 묘향대를 떠났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선방스님은 노장님이 되어,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묘향대에 쌀을 좀 가져다주고 싶다고 호림 스님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5년이 지나 스님이 묘향대에 터 잡고 살기 시작했으니, 그 인연들이 참으로 묘하다. 호림 스님은 그 노장님에 대해 “못 놓을 것도 놓으니 스님”이라고 했다.

해뜨기 전 이른 새벽, 쌀쌀한 바람 불고 절 마당에 청명한 기운이 가득하다. 밤새 오락가락하던 비도 그치고 안개도 걷히고 있다. 묘향대 정면에 토끼봉 정상, 손 뻗으면 닿을 듯하다. 동편으로 일출 직전의 노을이 하늘을 붉게 색들이고 있다. 안개 사이로 봉우리가 하나씩 드러나면 툇마루에 선 스님이 “저것은 천왕봉, 저것은 연하봉, 오른쪽에 촛대봉, 그 옆에 영신봉” 하고 가르쳐 준다. 그 밖에 어지간한 봉우리들은 스님이 선 자리보다 낮다. 250년 전 개운조사가 수행했다는 묘향대. 굽이굽이 능선과 봉우리들이 앞 병풍이 되고, 낙조 아름다운 반야봉이 뒷 이불이 되는 천하의 길지(吉地). 그 땅에 모옥(茅屋) 같은 암자 하나, 기둥에서 연기 피어오르는 옛 시골집 같은 낡고 작은 집, 스님보다 더 오히려 그 집이 긴 세월, 무욕의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

하산은 노고단으로 잡았다. 어제 길로는 다시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정 사장은 그 길로 내려갔다. 산길이 신작로처럼 평탄하고 좋다. 역시 산은 법정 등산로로 다녀야 한다. 긴 능선에 늦봄의 햇살이 가득하다. 빛이 좋으니 꽃도 좋고, 세석 철쭉제도 곧 열리겠다. 스님께 합장하고, 떠나오는 길. 스님이라고 안 외로운 것은 아니다. 묘향대 두 사람은 같이 살아 덜 외로울 것이다. 민 머리의 스님과 긴 머리의 처사는 전생에 부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지나간다. 멀리 보이는 노란 지붕, 운무 속으로 아스라하다. 다 떠나오지도 않았는데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 바람 빠지듯이 사는 것이 헛헛할 때, 그곳에 갈 것이다. 다시 갈 때는 또 하루를 자고, 그 밤을 위해 술을 두 병쯤 사 들고 가고 싶다.    

사진:최배문

이광이
60년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 따라 대흥사를 자주 다녔다. 서강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와 더욱 친해졌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냈고, 도법 스님, 윤구병 선생과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책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